셰익스피어는 역대 최고의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400년이 되었어도 그의 작품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든 즐거움을 주든 무엇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희극 즉, 해피엔딩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 것이 이 책의 주제일테고 내가 찾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익스피어 5대 희극을 읽고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살았지 나보고 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행복하게 끝 맺었다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뒤 문장에서도 자신이 발견한 이 책의 미덕이 나오는데, 이미 다 읽고 그 느낌을 쓰는 독후감에서 자신의 생각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이런 내용은 정말 불필요합니다. 순종하는 님의 글에서 이런 부분이 종종 발견되는데 습관이 되기 전에 고쳐야 할 부분입니다. 일기처럼 혼자의 고백이라면 두서없이 표현할 수 있지만 이것은 독후감으로 일정한 내용을 갖춰줘하는 글입니다. 이 부분은 삭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장은 매우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저 행복하게 끝 맺었다'것이 읽은 소감의 전부라면 뒤에 전개되는 자기 글의 의미가 무색해집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되짚어 보며 나는 결말 보다는, 읽는 동안은 미처 몰랐던 각 이야기에 인물들의 헌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각 이야기에 인물들의 헌신', 이런 점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렇게 시작했다면 순종하는 님의 생각이 훨씬 돋보였을 겁니다.
첫 번째 이야기인 <베니스에 상인>은 많이 읽어보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안토니오의 희생정신과 포셔의 지혜를 크게 칭찬한다. 나 역시 안토니오의 희생정신도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포셔의 지혜로운 판결을 더 높이 산다. 포셔의 지혜로운 판결 없었다면 안토니오는 죽었을 것이고 희극의 축에도 못 들고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구분되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포셔처럼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야기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읽는 내가 한숨이 나올 정도로 고약한 캐더린이 단 며칠만에 착한 아내가 된 것이 놀랍기도 하였지만 어쩌면 힘으로 복종하게 하려는 페트루치오의 행동도 그리 옳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페트루치오가 캐더린을 데려감으로써 모두가 잘 사는 길이 열린 샘이다. 나머지 세 이야기들도 보이지 않는 헌신을 담고 있다. 누군가에 노력으로 두 쌍둥이 형제가 만나고 각자의 사랑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때론 독이 되기도 했지만 다음의 이야기들을 행복으로 이끈 사람들은 반드시 있다. 그 역할이 아주 사소할 지라도 행복한 결말을 이뤘다면 행복을 주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아직 이성적으로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이 책에 자주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좋은 일인 것은 확실하다. 이 세익스피어의 5대희극은 4대 비극과 더 불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고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인생에는 희극이 올 때도 비극이 찾아올 때도 있을 것이다. 이 때 나 혼자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또한 남을 위해 헌신해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무엇보다 예수님의 진실 된 사랑을 전하면서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 '그것', '이것'은 붙여씁니다. '~지'는 뒤에 수가 나온 면 떼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모두 붙여씁니다. '떠난 지 400년', '했을지도'. 순종하는 님의 성향이 매우 진지하고 사색적이기 때문에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운을 떼는 작업이 다소 길게 진행됩니다. 더욱이 그 전초 작업이 본론 내용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면 정말 의미가 없습니다. 본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든가, 본론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이라도 간략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 점만 고친다면 매우 큰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앞으로 남에게 읽힐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놓고 훈련하기 바랍니다. 그래야 발전합니다. 독자를 염두에 놓고 쓴다는 것을 전제하면 훨씬 글이
선명해 질 것입니다. 수고했어요.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