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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테일러 부부가 600년 된 은행나무 옆에 지은 당시 최대의 벽돌집… 쪽방으로 방치 문화유산 지정 시급
딜쿠샤를 세운 앨버트 테일러 부부.
1920년을 전후한 어느 봄날, 벽안의 젊은 부부가 서울 성곽 순례에 나섰다. 앨버트 와일러 테일러와 메리 린리 테일러. 1917년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테일러 부부에게 본격적인 첫 서울 나들이였다.
외국인이 20㎞에 달하는 성곽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언덕을 오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열심히 걸었다. 두 사람은 성곽길에서는 가장 높은 북악산 정상 ‘쌀바위’에도 올랐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북악산에서 인왕산 쪽 성벽을 따라 내려오던 두 사람은 높이 30m가 넘는 거대한 은행나무와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 성벽 아래 언덕에 우뚝 서있는 거목은 아름다움을 넘어 성스럽게 비쳤다(조선시대 권율 도원수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현재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두 사람은 은행나무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특히 메리는 이를 ‘우리 나무’라고 부르며 남편 앨버트에게 “은행나무 옆에 집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 뒤 메리는 몇 달 동안 틈만 나면 은행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가 서울을 내려다보곤 했다. 은행나무가 있는 언덕은 메리의 신혼집이 있는 서대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 행촌동 1-88번지 사직터널 위쪽에 자리한 은행나무 옆의 딜쿠샤. 91년 전 건축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에는 저소득층 10여가구가 나누어 살고 있다. | 우철훈 기자
1920년대의 딜쿠샤와 은행나무.
■ 은행나무 옆의 딜쿠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마침내 은행나무가 있는 땅이 매물로 나왔다. 앨버트는 시세보다 비싼 10만원에 땅을 구입했다. 1만평이 넘는 넓은 부지였다. 두 부부는 지체없이 집짓기에 나섰다. 건축 설계는 식민제국 일본이 정한 건축법을 따라야 했다. 서울의 모든 건축물은 남산 중턱의 조선신궁보다 낮아야 한다는 규정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인왕산 언덕배기였지만 문제는 없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대저택으로 설계를 했다. 거실, 침실, 서재, 드레스룸, 욕실, 부엌, 창고, 식품저장실, 실내 화장실은 물론 여러 하인들의 방까지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방이 10개가 넘었으며 제일 큰 1층 거실은 폭이 14m나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큰 개인 벽돌 저택이었다. 벽돌과 대리석 등 건축 자재는 독립문 쪽에서 지게와 소달구지를 이용해 운반했다.
외국인이 당산목인 은행나무 옆에 저택을 짓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근 마을 사람들이 격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외국인이 신령한 땅에 무엄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분개했다. 무당은 “지신님이 복수할 것이다” “화마가 집을 삼킬 거다”라며 테일러 부부에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은행나무골’로 불린 그곳은 옛날부터 주민들의 성황당 기도처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테일러 부부는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집을 지어야 했다. 건물이 완공된 것은 1923년이었다.
테일러 부부는 집의 이름을 ‘딜쿠샤’라고 지었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 ‘이상향’이라는 뜻으로, 결혼 전 연극배우로 활약했던 메리가 세계 순회공연을 할 당시 방문했던 인도 러크나우 지역에 있는 궁전의 이름이다. 메리는 그때 집을 갖게 되면 딜쿠샤로 이름 붙이겠다고 마음먹는다. 테일러 부부는 대리석 추춧돌에 ‘DILKUSHA 1923’이라는 집의 이름과 건축연도를 새기고 성경 구절 ‘PSALM CXXVII-I’(시편 127장 1절)을 새겨넣었다.
앨버트 테일러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2006년 서울시에 기증한 사진이다. 신문 기사는 딜쿠샤 화재사건을 보도한 1926년 7월27일자 매일신보.
■ ‘기쁜 마음의 궁전’ 그리고 화마
테일러 부부에게 딜쿠샤는 이름 그대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었다. 딜쿠샤의 2층 복도에 서면 창밖으로 저 멀리 관악산이 ‘거대한 수탉의 볏처럼’ 보였고, 뒤로는 인왕산이 버티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젖히면 서울의 시내 전경이 펼쳐졌다. 은행나무가 서 있는 진입로와 양쪽 잔디밭에는 가을이면 노란 낙엽이 카펫이 되어 깔렸다. 집 주위에 있는 감나무에는 감들이 주렁주렁했다. 감나무 밖으로는 포플러가 집의 보초를 서듯 둘러서 있었다.
집 안은 중세 귀족의 집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화려했다. 거실의 뒤쪽 벽 가운데에는 벽난로를 설치했고, 양옆에는 등받이가 있는 나무의자를 놓았다. 거실 안쪽 모퉁이에는 얼음 저장통을 두었다. 얼음은 한겨울 하인들이 한강에 가서 떼어다가 소달구지에 실어왔다. 난로 반대편에는 커다란 앤틱 사이드보드가 놓였다. 벽에는 유난히 큰 괘종시계가 걸려 거실 전체를 조망하는 듯했다. 부엌 바닥에는 돌을 깔았고 석탄 화덕을 이용해 요리를 했다. 각 방의 창문과 여닫이문은 아치형으로 만들어 조형성을 높였다. 응접실에는 앨버트가 골동품점에서 사들인 고려청자, 백자, 항아리 등 각종 자기와 예술품들을 진열해 놓았다.
테일러 부부의 일상은 잘 꾸며진 저택과 정원에 걸맞게 우아하고 고상했다. 그들은 종종 조선에 와 있는 서양인들을 초청해 만찬을 가졌다. 주말에는 정동의 서울유니언클럽(경성구락부)에 가서 서울 주재 영사, 선교사, 사업가 등과 예배를 올리거나 테니스와 수영, 볼링을 즐겼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테일러 부부와 같은 외국인들에게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치외법권이 주어졌다.
‘언덕 위의 작은 궁전’ 딜쿠샤에도 불운은 있었다. 1926년 7월26일 서울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딜쿠샤가 벼락을 맞아 건물 일부가 불에 탔다. 딜쿠샤의 화재는 이튿날 동아일보와 매일신보가 주요 기사로 보도할 만큼 화제가 됐다. ‘행촌동 산상에 폭우 중 큰 불’이라는 제목의 매일신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십육일 오전 여덟시 오십분경에 폭우와 동시에 낙뢰가 4면에 요란할 때 서대문 밖 행촌동 일번지에 벽돌 2층으로 지어놓은 미국인 테일러의 집 2층에 불이 일어났는 바 시내에 있는 각 소방대는 전부 출동하였으나 행촌동 산꼭대기 아래 수도가 6정(町) 밖에 있으므로 도저히 물을 끌어들일 수 없게 되어 약 한 시간 반까지 지붕과 그 밑 목재는 전부 타게 된 후 겨우 수도가 연결되어 동 열시 오십분경에 진화되었다.”
신문은 이어 딜쿠샤 화재로 경찰 추산 약 3만원의 손해를 봤으며, 그 집에는 2만원의 보험에 가입돼 있었다고 전했다. 화재 당시 테일러 부부는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 있어 화를 면했다. 화재로 파괴된 집은 곧바로 복구되어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1920년대 딜쿠샤(붉은 선 원)가 위치한 인왕산 자락의 서울 성곽 전경.
■ 보존 대책 시급한 문화유산
테일러 부부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일제의 외국인 추방령으로 쫓겨날 때까지 딜쿠샤에서 살았다. 일제 패망 뒤 딜쿠샤는 미 군정청으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소유권이 어떻게 이전됐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서울 최대의 벽돌 저택’은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딜쿠샤는 저소득층의 삶의 터전으로 활용되었다. 무주택 서민들이 이 집을 쪽방으로 나눠 살았다. 지금 이곳에는 10여가구가 살고 있다. 딜쿠샤는 현재 국가 소유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관리권이 넘어간 상태다. 그러나 캠코는 건축물의 관리, 보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입주자들이 오랜 연고를 내세우며 이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딜쿠샤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 아담한 벽돌집이 있다. 1930년대에 서양인이 지은 집으로, 작곡가 홍난파가 인수해 살았다 해서 ‘홍난파 가옥’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 건물은 2004년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홍난파 가옥은 규모나 역사, 담긴 사연 등에서 볼 때 딜쿠샤를 따라가지 못한다.
오랫동안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렸던 벽돌집이 딜쿠샤라는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6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해 딜쿠샤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관련 자료들을 서울시에 기증하면서부터다. 그 후 딜쿠샤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나 딜쿠샤 거주 주민들의 거취 문제로 해결되지 않으면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딜쿠샤의 이야기를 담은 메리 린리 테일러의 자서전 <호박목걸이>(송영달 옮김, 책과함께)가 번역·출간됐다.
딜쿠샤에서 내려다보이는 서대문 일대는 요즘 ‘돈의문 뉴타운’ 지구로 지정돼 재개발이 한창이다. 평동, 송월동, 홍파동, 교남동, 행촌동 일대에 빽빽이 들어섰던 한옥과 빌라 등은 대부분 철거됐다. 방진막이 둘러쳐진 공사현장에서는 포클레인들이 막바지 땅고르기를 하고 있다. 2~3년 뒤면 이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것이다. 딜쿠샤는 뉴타운 건설로 사라질, 서대문지역뿐 아니라 서울의 역사·문화를 증언해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하루빨리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위해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운찬 기자 sidol@kyunghyang.com
(*기사 작성에 메리 린리 테일러의 회고록 <호박목걸이>를 참고했다.)
▲ 남편 테일러 UPA통신 특파원… 3·1운동·제암리 사건 해외 알려
부인 메리는 ‘호박목걸이’ 출간… 한국 생활풍속 밀도있게 담아
딜쿠샤의 건축주 테일러 부부는 한말~일제강점기의 증언자들이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남편 앨버트 와일러 테일러(1875~1948)는 금광기술자인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를 따라 한국에 건너왔으며, 부자가 함께 운산금광을 운영했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 UPA통신(UPI 전신) 특파원으로 임명돼 고종 장례식과 3·1운동을 취재했다.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전 세계에 알렸으며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최초로 취재해 보도했다.
1941년 일제의 외국인 추방령에 저항하다 서대문감옥에서 6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48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테일러 부자의 유해는 마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안장됐다.
메리 린리 테일러(1889~1982)는 영국 첼트넘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다. 영국 배우로 동양 각지를 순회 공연하던 중 일본에서 앨버트를 만나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917년 한국으로 왔다.
이후 1942년까지 딜쿠샤에서 살다 남편과 함께 강제추방당했다. 화가, 작가, 여행탐험가 등 다양한 재능을 가졌던 메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해변에 집을 구해 노년을 보냈다.
딜쿠샤의 추억을 잊지 못한 그는 한국 생활을 담은 회고록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를 남겼다. 이 책은 딜쿠샤 이야기뿐 아니라 당시 민간의 결혼, 장례식 등 생활풍속을 밀도 있게 그려내 ‘20세기 초의 생활풍속지’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