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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기기 백성호의 예수뎐2
“당신이 유대인들 임금이오?” 빌라도 묻자, 예수의 한마디
카드 발행 일시2023.06.17
에디터
백성호
백성호의 예수뎐2
관심
㊳예수, 사형선고를 받다
예수는 제사장 카야파의 관저에서 심문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죽을죄를 뒤집어씌웠다. 사형선고였다. 그들은 예수를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끌고 갔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빌라도 총독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예루살렘 성의 동쪽 문인 다윗 게이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좁다란 골목길, 바닥에는 돌들이 박혀 있었다. 2000년 전 로마 시대에 마차가 다녔던 길이었다.
예수뎐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유대를 다스리는 지사였다. 시리아 총독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군인 출신인 빌라도는 서기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의 행정 장관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별로 없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연대기에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예수라는 사람이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당했다”는 대목이 남아 있다. 빌라도와 예수의 이름이 한 문장에 등장한다.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이 식민지 총독이나 지사 등으로 부임하는 일이 흔했다.
빌라도는 평소에 예루살렘에서 살지는 않았다. 사마리아 북서쪽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카이사리아에 머물렀다. 유대 지사들은 주로 그렇게 했다. 유월절을 맞아 그는 마침 예루살렘의 관저에 내려와 있었다.
처음 취임할 때만 해도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서를 무시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를 금한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은 황제를 종종 신으로 추대했다.
예수뎐
빌라도는 취임 후에 로마 황제의 얼굴을 그려 넣은 깃발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여오는 문제로 큰 충돌을 빚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는 계명을 깨는 일이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신성한 성전이 있는 지역에 우상을 그린 깃발을 들여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항거했지만 결국 깃발은 성안으로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빌라도는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예수가 끌려왔을 때는 사정이 좀 달랐다. 로마에 있던, 빌라도의 정치적 후견인인 세야누스가 실각한 상태였다. 빌라도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잡음이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직속 상관인 시리아 총독에게 시끄러운 일이 보고되는 것도 곤란했다. 제사장 카야파는 빌라도의 이런 처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나는 빌라도의 관저 앞에서 눈을 감았다. 꼭 2000년 전이었다.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예수는 올리브산으로 이동했다가 체포됐다. 밤에 끌려와 새벽 내내 심문을 당했고, 이윽고 닭이 울며 아침이 밝았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꼬박 밤을 새운 것이다.
더구나 카야파의 저택에서 극심한 조롱에 주먹질까지 당했다. 예수는 기진맥진한 상태였을 것이다. 빌라도 총독의 관저는 아침이 돼서야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그들은 아침까지 기다렸다. 성경에는 “아침이 되자”(마태오 복음서 27장 1~2절) 예수를 결박해서 끌고 가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고 기록돼 있다.
예수뎐
유월절은 ‘모든 재앙이 지나가는’ 절기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부정 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유대교를 믿지 않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일은 대표적으로 부정 타는 일이었다. 로마인 빌라도의 관저도 이방인의 집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만 빌라도 앞으로 들여보내고, 자신들은 밖에서 빌라도를 응대했을 것이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자 빌라도가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태오 복음서 27장 11절)
짧은 생각
사람들은
투덜댑니다.
내 삶은
문제투성이야,
여기저기
온갖 지뢰밭이야.
아,
문제없는 삶,
문제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렇게
하소연합니다.
맞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괴롭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문제는
왜
존재하는 걸까요.
우리의 삶에는
왜 어김없이
문제가 생기는 걸까요.
만약
문제가 없다면,
그때는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될까요.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몸이 아픈 걸
싫어합니다.
통증이 생기면
괴롭고
힘드니까요.
그런데
통증이 없다면,
우리 몸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병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통증이 있어서,
그 덕분에
우리가
뿌리인 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문제가 생기는 건
무언가
내 삶의 방식이
이치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바로잡으라고,
그래서
더 큰 사고를 막으라고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일러주는 겁니다.
통증이 없으면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듯이,
문제가 생겨야
내 삶이
어느 지점에서
어떤 식으로
이치의 궤도에서
이탈했는지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문제로 인해
우리가
삶의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연결 고리를
깊이 이해하면
내 삶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마냥
밉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로 인해
깨달음의 문고리를
찾을 수 있고,
문제로 인해
구원의 문도
두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모든
수행과 수도는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말입니다.
문제!
정말 미우면서도,
너무
고마운 존재입니다.
에디터
백성호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0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