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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처음 온 지 얼마 안되서 글을 자주 올려서 송구스럽습니다
이전에 써 놓은 글이 있어서 주책없이 올립니다
특히 목회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지순례차 많이 가시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럽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꼭 권하고 쉽네요
더우기 요즘 같이 강대국 사이에 늘 끼여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옛날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여중국대륙의 수, 당나라를 정신없게 한 그 투르키시족(돌궐족)을 한 번 찾아가보고자 합니다.
터키 여행을 다녀와서
3월초에 역시 막내의 방학을 기다리던 차에 드디어 3월 10일 터키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가기 2일전에 지진소식을 듣고 고민하던 차 역시 오늘 취소하면 항공권 값 안 돌려준다는 회신을 받고, 본전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비장한 척?)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3월 10일 저녁 인천공항에서 처음으로 터키항공을 타고 가는데, 생각보다 비행기 서비스 등이 괜찮았다. 비빔밥도 좋았고 넓은 자리도 맘에 들었다. 그런데 히말라야 산맥을 지날 때 날씨인지 기압문제 때문인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힘든 여정을 겪었다. 비행기에서 본 터키 책자 소개는 참 매우 환상적이었다. 생각보다 볼 게 많다고 생각되었고, 항상 역사와 문화 속에서 의미와 교훈을 찾으려는 나의 소원을 만족시켜주었다.
새벽에 도착하여 비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데, 참 줄 선 사람은 100여명이 넘고 심지어 애기를 업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직 한 사람만 일하고 있으니 1시간 넘게 기다리다 겨우 나왔다. 전체 산업 중 서비스 산업이 62%, 그 중에서도 관광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의 관문관리가 참 엉망인 것 같았다. 적당히 일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오겠지 하는 자만의식은 아닐지?
가) 이스탄블
먼저 이스탄블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떠나기 전에 역사에 관심 많은 후배가 소개해준 덕분에 멋있는 책을 샀다. “로마인의 이야기”(선물로 받아놓고 아직도 안 본 책)로 유명한 시노오 나나미의 작품인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여행 중에 열심히 봤다. 역시 그 책을 읽어본 후 터키, 특히 이스탄불에 대한 이미지가 다르게 느껴졌다. 즉 당시 전쟁이 심각하게 벌어졌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고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당시 대포소리가 들리고, 황제의 친위대가 뒤에서 도망치는 아군을 죽음으로 밀어 붙히니 할 수없이 성벽을 타오르는 투르크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 톱카프 궁전(보석관)
생각보다 보석들이 이쁘지 않았지만 칼, 갑옷 등을 보석으로 만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40년전에 터키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신 할머니 왈: 자기가 이전에 본 것보다 너무 적다. 아마 많이 숨겨둔 것 같다고 하셨다. 멋있는 샹델리아도 없어지고, 하필 후문으로 들어가 웅장한 맛을 못 느꼈다고 하신다.
2) 성소피아 성당: 동로마제국의 성당으로서 많은 유적이 오스만터키 정복 후에도 오스만 황제가 재치있게 벽화를 살리기 위해 살짝 회로 칠하여 그나마 잘 보전된 점은 지도자의 대단한 수준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정복 후 적군과 백성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도, 절대 궁전에서 보물을 훔치거나 유적을 훼손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가 잘 융화된 모습이 바로 오늘의 터키가 나아가야 될 자세가 아닌가 한다.
또 한편 당시 지진에 대비 벽돌 사이에 공간을 두어서 공기가 통하게 하는 방법을 개발, 수 차례의 지진과 전쟁 속에서도 견뎌냄. 심지어 99년 터키 대지진시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15만채 부서지는 상황(리히터 7.4 규모)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비잔틴 제국의 당시의 물리학자와 수학자가 아르키메데스와 헤론을 연구하여 미리 지진에 대비하여 지음.(이를 바실리카 양식이라고 함. 내부가 텅빈 직사각형 강당이 있는 건물양식) 또한 그 후 오스만 투르크 시절의 건축가 시난이 지은 다른 이슬람 사원도 끄덕 없었음.
3) 돌마바흐체 궁전: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억지로 혼자 꼭 봐야 된다고 우겨서 따로 택시 타고 가려 했으나, 우리 부부 2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가길 원하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참 자기 옷(명품과 가죽옷)은 수 백불 씩 사면서 의미 있는 문화유적지를 보는 것에는 그렇게도 인색들 한지.. 여행사에서 소개해주는 것은 엄청 지난 재고 명품 혹은 가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결국 면세점에서 실제 옷과 비교해보고 아차! 하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니 … 씁쓸했다. 명품구입요령은 미국이나 홍콩에서 특정기간에 무지 세일할 때 그 때 하는 것이 좋지 않나 본다.
4) 그랜드 바자르: 비단 길의 마지막 종착지 시장으로서 마치 남대문시장을 연상하게 했다. 진작 사진을 못 찍은 것이 유감. 특히 푸른색의 접시가 유명함. 골목이 엄청 복잡해서 길을 못 찾을 수 있음. 처음 출발지의 번호를 기억할 것. 1번지
사진: 보스프러스 해협과 명동과 같은 탁심시장에서
나) 앙카라
이스탄불을 떠나 앙카라로 향했으며, 마침 40년전에 앙카라 한국대사관에서 일했던 순복음 교회 권사님과 함께 택시에 5명이 타고(작은 택시에 인원초과가 적당히 넘어가는 교통문화?) 앙카라의 밤 문화를 즐겼다. 야시장도 가서 보고 불량식품도 사서 먹고 또 1200원짜리 터키 홍차를 카페에서 1600원에 한 잔 마시고.. 무지 싸게 옷을 사기도 하고.. 참 앙카라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화려한 건 수는 없고.. 시간은 왜 빨리 흐르는지…
다음 날 아침에 두 곳을 살짝 스치고 갔다.
1) 앙카라 한국공원: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곳. 서울시가 땅을 사서 지은 공원이라고 한다.
2) 아타투르쿠 기념공원(케말파샤 공원): 시간상 못보고 지나친 것이 유감. 민족지도자로서 왕조국가를 터키공화국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지도자의 공원이라서 정말 아쉬웠다. 특히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 정책은 터키가 발전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된 것 같다. 그 반대가 이란 등인데, 이슬람종교지도자가 국가를 운영하게 되면 결과는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다) 가파도키아
앙카라를 떠나 가파도키아를 가는 길에 먼저 데린구유를 부지런히 들어갔다 .한편 한참 땅굴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배가 출출했는데.. 점심은 동굴로 만든 식당(안은 호화스러움)항아리 케밥, 점심식사를 음악과 함께 우아하게 즐기고 나왔다
1) 데린구유: 기독교신자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지하25층까지 파고들어간 지하타운 하우스, 신학교, 회의실, 형벌도 갖춘 감옥(엄격한 통제하에서만 안전이 유지되는 피난 집단 생활이 가능함) 현재는 8층만 본다고 함. 통풍장치가 너무 잘 되어있었음. 당시 아이가(?) 도망친 닭을 찾다가 이 굴을 찾았다고 함.
2) 가파도키아: 괴레메 골짜기 낙타모양, 버섯모양, 가족모양 등 (화산이 터진 후 날라온 돌이 위에 있고 밑에는 사암석이 풍화되어 위에 화산석인 머리만 남게 되어 독특한 모양으로 바뀜, 시간이 지나면 때로는 그 화산암머리가 떨어지기도 함
라) 파묵칼레
파묵칼레: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성”이라는 뜻이며, 그 이유는 계단식 석회층들이 마치 목화로 만들어진 성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붙혀진 이름. 석회봉과 온천휴양지로 유명하다. 히에라 폴리스(병원과 휴양도시), 원형극장, 로마의 공중목욕탕이 있다 한편 터키가 태극기에 대한 존중을 볼 수 있었음. (입구 앞에 걸린 여러 국기 중, 중국과 일본국기는 잘 안보이고, 터키국기 양 옆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3개 나란히 타국 국기 대비 높은 위치에서 크게 휘날림, 마치 올림픽 금은동 메달 연상)
그 전날 밤 돈이 아까워서 option Tour로서 발리 댄스와 치마 입은 남자들의 환상적인 춤을 못 봐서 아쉬웠는데, 마침 이곳에서 온천(다국적탕? 나이든 터키 할아버지가 곱게 화장한 한국 아줌마들 보고 너무 즐거워 입이 안 닫혀지시는데..)을 잘 마치고, 집사람과 같이 카페에 가서 터키 남자가수의 호소력 있는 노래를 즐기고 그 뒤 발리댄서를 즐겁게 보게 됨. 신기한 것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즐긴다는 사실, 게다가 팁을 가슴과 허리 옆에 집어넣어주는 사람들이 대개 여자라는 점. 나도 아내에게 양보했으나, 나에게 좋은 기회를 양보해준 덕분에 가슴을 살짝 스치는데 헉….정신없이 비데오 돌리는 사람이 누구일까?
사진: 발리댄스
마) 에페소
다음날 터키에서 가장 화려한 동로마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에페소”로 이동하였다.
에페소: 아마 이태리보다 더 큰 규모의 로마문화를 바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정말 당시 사람들이(아니 귀족들이) 살던 상황을 잘 알 수 있었다. 목욕탕(남자들의 미팅장소? 특히 전쟁을 겪었던 남자들의 자랑(흉터)을 늘어 놀 수 있었던 장소), 50명이 동시에 매일의 큰 일(대변)을 볼 수 있었던 목욕탕의 폐수를 활용한 자연의 수세식화장실(중앙의 연못은 천연의 소리를 막는 방충음 역할), 2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노천원형극장(메아리 울림 환상적), 1만2천권의 장서가 보관되었던 셀수스 도서관(현지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상업 아고라의 광장(시민들이 모여서 논의와 토론을 즐기면서 장사하는 시장으로서), 심지어 사창가 안내지도(발이 작은 미성년자 출입불가 표지, 현찰만 접수 표지?)
한편 문 앞에는 루가의 묘와 뒤 문에는 성모마리아의 교회(메리 교회라고 기재)에서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갖춘 존재이며, 성모마리아가 신의 어머님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사진: 에페소의 핵심 도서관 앞에서 그리고 루가와 성모마리아 교회에서
바) 트로이
트로이: 일단 트로이의 유적을 찾아보겠다는 어릴 적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무역업을 하여 돈을 번 뒤 49세에 유적 탐사를 시작한 독일인 슐리만은 조사 시작 후 2년 반 뒤에 드디어 보물을 찾았고, 드디어 밤에 몰래 보물을 정신 없이 파내다가 유적을 많이 부수게 되었다. 얼마나 애처가였는가? 아니면 부인에게 죄진 것이 많았는가(?) 그 왕관과 장식품을 부인에게 선사하는 둥 너무 개인적인 치부를 일삼았다고 한다. 벌판을 바라보니 과거 신화로만 여겨진 트로이 대전쟁이 막 벌어진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 기회를 빌려서 영화 “트로이의 목마” 와 “알렉산더”라는 영화도 보고 싶다.
사진: 트로이의 목마(영화속의 모형) 앞에서
사) 느낀 점
이상 내가 본 것을 간단히 정리해보았고 아래 내용은 내가 느낀 것을 적고 다음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을 위해 끝으로 터키 상식에 대해 적고자 한다
1) 음식: 반찬 중에 자주 나오는 올리브(특히 안에 빨간 고추를 넣은 것), 싱싱한 야채 + 석류소스로 무침, 콩을 만든 매콤하면서 짠 국이 중독이 될 정도로 좋았다. 길가에서 보고서 고른 음식이 더 좋았고 특히 전기통닭은 70년대 우리가 즐기던 그 시대로 돌아가는 느낌을 줘서 너무 좋았다.
2) 생활 속의 문화: 깊은 이야기는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만 하면, 새벽 5시 모닝콜이 필요 없음( 현지 터키이 코란을 잘 읽어서 잠이 절로 깨어짐), 커피 끓이는 법과 결혼성사(남자가 동의의사를 표했는데 여자가 그 남자가 싫으면 커피에 설탕대신 소금 투입, 그러나 다 마시면 남자가 강력히 결혼을 원함을 보여주는 방법)
3) 로마유적지를 활용과 자세: 문화유적지는 거의 동로마시대 유적지로서 관광을 통해 먹고 사는 터키관광은 로마의 유적을 보기 위해 이태리가 최고일 것이라는 나의 환상을 깨버렸다. 비록 정복을 통해서 로마문화유적을 차지했지만, 그 나름대로 다국적문화에 대한 열린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주변국가와 무역이 활성화된 이스탄불에는 다양한 인종이 있었던 것 같다. 자국내의 오스만터키의 문화만을 절대 최고라고 하는 쇼비니즘이 아닌 그저 다국적인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그 자세와 태도가 훌륭한 것 같다. 타 문화에 개방적이면서 자기 종교와 민족에 대해 엄청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참 터키 땅에 이태리가 원조인 로마문화를 관광사업을 위해 잘 살리려는 터키정부의 노력을 나쁘게 보이지 않았지만, 이태리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즉 광개토왕비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동북공정을 하는 중국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즉 터키는 동로마문화재가 자국 내에 있지만 앞서 땅을 차지한 로마인들이 만든 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했다. 그 궁금함을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그저 로마문화로서 인정해줄 뿐 다른 해석은 없다고 한다. 이게 그저 옆에만 있으면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자세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중국동북의 조선족은 물론 위태한 북한을 식민지 통치하려는 중국의 숨은 의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4) 지역에 따른 민족성의 차이
터키에는 정말 다양한 민족들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흑인들이 다른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엄청 적었다. 이민족과의 혼인에 매우 관대했던 지역이고 보니 피부와 얼굴이 각양각색으로 보여졌다.
한편 외국인에게 항상 자신에 차있고 친절하게 “할로”라고 하는 꼬마 애들을 보면서 또 뭔가 식민지 백성처럼 눈치를 보는 중국신장의 위구르족과 같은 민족이면서 또 많은 차이를 느낀다. 두 지역의 같은 민족이 어떻게 변했고 또 어떻게 변해갈 지를 연구하는 것도 재미있는 분야 같다.
한민족도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남북의 국민들에게 그 엄청난 다른 분위기를 느껴지는 것처럼. 다른 나라의 사례들이 우리의 거울과 교훈으로 만들어야 될 것 같다
5) 터키의 고민
터키도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이슬람의 전통을 잊어버리고 점점 유럽화를 해야 할 지, 아니면 그래도 이슬람화를 계속 강화해야 할 지? (현재 이슬람 지도자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주고 있다고 함) 답은 터키의 위대한 지도자 아타튀르크가 정치와 종교분리원칙을 이미 알려 주셨는데… 종교가 정치에 깊이 참여하는 그런 미래는 참 암울할 것이 뻔하다. 동서양의 중간 완충지역인 만큼 동양의 성공사례인 한국의 발전방식(새마을 운동과 전략적인 산업의 선택과 집중 육성등)을 참고로 한다면 성공적인 또 다른 모델이 나올 것 같다
6) 한-터 공통점과 협력방안
“칸카르데시쉬”는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으로 흔히 터키와 한국의 관계를 지칭한다. 물건 값 깍을 때도 잘 써먹으니 외우면 좋을 것 같다.
한편 호텔 케이블TV에 나온 고정적으로 나오는 선덕여왕도 보았지만, 이전에는 역시 대장금의 인기가 많았다고 함, 아리랑 TV도 나와서 참 타국으로 느껴지지 않았음.
한편 한국과 터키는 민족은 달라도 같은 우랄알타이 어족으로서 문장의 어순이 같고 가무를 즐기고 조상과 전통을 중요시하고.. 많은 공통점을 느꼈다. 지금 현대 기아자동차등 투자가 이루어져 많은 택시 등이 현대마크를 달고 다니고 있다. 또 최근에 원전수출도 성사되어 양국간 관계는 너무너무 좋을 것 같다. 터키는 부존자원은 많지 않지만, 넓은 땅과 충분한 유휴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나마 이슬람 영향이 적은 나라인 만큼 터키와 같이 협조하여 상호에게 이익이 되는 프로젝트를 많이 찾았으면 좋겠다.
오직 유럽지향적이지도 않고 또 종교가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는 이슬람식도 아니 차라리 한국식 개발운동을 현지화하여 정말 터키가 유럽보다 더 잘 사는 국가가 되어 2014년에 EU에 구걸하여 들어가는 것이 아닌 정중하게 초청을 받았으면 좋겠다.
7) 이 글을 마친 후기
우리 어머니께서는 늘 자신의 집을 “우주정류장”이라고 하신다. 즉 많은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해외에서 와서 머물다가 떠나는 상황을 늘 접하시다 보니 그런 표현을 하신 것 같다. 여행도 그런 비슷한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적당히 여러 부류로 갈려진 사람들끼리 매일 7일간 16시간(=102시간) 이상을 같이 지내니, 막바지에서는 자신들의 처지 또는 친구들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뭐 아줌마 부대가 대세이다 보니 주제가 “자식들 성장과정과 결혼과정과 그 후” 또는 “주위에 바람난 사람들”이야기” 그리고 “나이가 들어 스스로 잘 챙겨야 된다” 세가지가 가장 많은 공통된 주제였다. 같이 오신 아줌마들의 열강의 덕분에 아내께서 공부를 많이 하시게 된 것으로 느껴진다. =====================================================
아) 기본 상식
1) 지역: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 국토는 한반도 3.5배, 인구는 7천5백만, 바다의 3면이 흑해(북), 에게해(서), 지중해(남)으로 구성, 동서양이 만나 빚어낸 조화로움을 가진 나라
2) 한-터관계: 터키인의 조상은 훈족(흉노)과 튀르크(돌궐족)인데 고조선시대부터 이웃에 위치, 우리나라와 동맹을 맺어 중국 한, 수, 당의 침입에 대항했으나 전쟁에 밀려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주함. 6.25때 미영 다음 순위로 1만5천명 파병, 741명 전사. 그래서 한국을 피로 맺어진 형제나라(칸카르데쉬)라고 함
3) 음식: 중국, 프랑스와 함께 3대요리라고 함. 지리적인 영향으로 다양함, 케밥 위주이나 (양, 소, 특히 닭고기 위주), 쉬시케밥(꼬치), 되네르(회전), 에크맥(빵), 피데(피자), 터키 커피와 홍차가 유명
4) 언어: 우랄알타이 어군, 어순동일 문법이 비슷, 현재 알파벳으로 문자를 사용. 조금만 공부하면 쉽게 대화가 될 것 같은 자신감을 줌
5) 예술: 1522년 술래이만 대제가 예술을 크게 부흥시킴. 최고의 건축가 “시난”을 지원 술래마니에 사원을 세움, 한편 이즈니크 도자기와 타일 그리고 터키식 양탄자가 유명, 세계최초의 군악대가 존재
6) 노밸상 작가: 터키역사를 배경으로 동서양의 문명충돌을 배경으로 소설을 써서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7) 기독교 성지: 에페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빌라델비아, 사데, 라오디게아등 초대 교회 7곳. 이 중 에페소에는 요한과 루가의 무덤유적 그리고 성모마리아의 집. 또한 카파도키아의 지하교회와 동굴교회
첫댓글 동기들과 직접은 못보지만 이렇게 게시판에서 간접적으로 만나 반갑습니다. 많은 분들이 여행시 참고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나도 관심이 많은 내용인데... 사진이 하나도 안보이네.
대충 읽어 봤네...9년전에 마누라랑 이스탄불은 다녀 왔지....터키의 유산이 참으로 많터라...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점심먹으며 유람선도 탓지.....그외에 소피아 성당등 볼것이 참으로 많터라......근데 내륙은 안가봤어...근 시일(?)내에 꼬옥 다녀오고 싶은 곳이지.....잘다녀왔다니 다행...다리 성성 할때 마니 다녀....얼굴보니 반갑네....
현철아 사진 다시 다 고쳐서 올렸는데 잘 보일 것 같은데.. 확인 부탁하고... 영근아 오랫만이다. 내륙도 참 아기자기 하게 볼 것이 많네. 이전에 돌궐족이 남의 땅을 뺏아아도 돈 되는 땅(동로마 문화유적이 많은 땅)을 잘 뺏은 것 같네
사진 잘 보이네. 좋은 글 고마우이!
참 비단길을 다녀와서도 사진을 다 Up date 했습니다. 아마 지금은 보실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모교 은사님 얼굴도 찾아보시지요
진옥아 너 덕분에 앉아서 좋은구경 다한 것 같다...재밌는이야기 , 여행담 잘보고 간다....글구 네모습 옛날이나 변함 없구나...안식구와 더불어 가족모두 건강하길 바란다....
강총무님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현철아 서울 가면 병원에 한 번 찾아가마!
총무는 무슨....순제가 총무지....
Welcome!
이렇게 자네을 만날수 있어 너무 좋구만 ~~~~30년이 넘어선 시점에서 자넬 사진으로만 만나지만 옛모습 그대로 내 기억속에 있는 자네와 별 다르지 않아 좋았네~~~~덕분에 구경 잘 하고 가네
기곤아 남미에서 한 번 보자 아마 10월께 NY에 가면 남미에 가보려고 한다. 그럼 또 연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