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
오늘 복음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제자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말씀인 요한복음 21장 15절 그 이전의 말씀, 곧 요한복음 21장 1절에서 15절 일곱 제자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는 그 내용 가운데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들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넋을 잃고 그저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드로가 먼저 일어나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
그저 멍하니 이런 저런 생각에만 잠겨 있던 제자들, 그들이 하던 생각들이란 그간 벌어진 일들에 대한 일련의 후회, 실망, 두려움 그런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 좋은 쪽으로만 그들을 이끌어 갈 무렵, 베드로가 몸을 움직여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가서 고기라도 잡아보겠네. 그저 앉아 있기만 할 수가 없군.”
그러나 베테랑 어부꾼 베드로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 마음이 산란하게 흐트러지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 온갖 생각들로 마음이 산란해져 허탕만을 치고 있던 그의 마음을 다잡아 주시고 그의 몸을 바르게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자 그물을 끌어들일 수 없을 정도의 고기가 잡힙니다.
그제야 자신들에게 나타난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줄을 깨닫게 된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신 그 분, 밤새 아무 것도 낚지 못한 무기력한 낚시꾼인 그들을, 스승을 잃고 무기력해 있던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눔으로서 그들의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 받습니다.
한편,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만을 따로 불러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와 나누는 대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예수님의 첫째 제자 베드로, 예수님께 다른 어떤 제자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주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걸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을 때, 베드로는 스스로 지은 실수와 잘못에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렇게 큰소리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예수님을 보기에는 죄송스러우며, 다른 제자들을 보기에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상태, 그런 비참함의 나락을 체험한 베드로는 자신의 그런 나약한 모습에 스스로 마음깊이 아파하며 외딴 곳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다는 가슴 아픈 현실과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 대한 자괴감에 어찌할 줄을 몰랐던 베드로, 그래서 아마도 베드로는 몸이라도 움직여 그 모든 생각의 꼬리를 끊어버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지은 죄와 잘못에 관하여서는 한 마디도, 정말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단지 이렇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예전 그 때, 곧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한다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큰소리치던 그 때와는 달리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똑같은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일을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아마도 몹시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며 슬펐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한 그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시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죄인 베드로에게 그 어떤 죄도 묻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으로 그를 감싸 안아 주시는 예수님의 이 같은 모습은 바로 십자가에서 모든 이의 죄의 용서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이에게 아무런 질책도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삶을 바친 단 하나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에 베드로가 변화됩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허풍쟁이 베드로가 누구보다 용감하고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 어떤 위협과 협박에도 용기 있게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임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모습 역시 베드로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 분의 사랑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박해하던 바리사이 사울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는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 속에서 드러나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변화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예수님의 모습이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닌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예수님,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해 비참한 나락에 빠져 있는 이,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자비로 다가가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는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자비의 예수님이 비참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그 모습, 그래서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비참과 자비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참한 우리를 자비롭게 용서해 주시고, 그런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 여러분 모두가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나의 모든 죄와 잘못을 용서받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힘과 용기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