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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마음.
진취進取 적극적인 자세로 뜻을 이룩하다
하나 :만주에 펼친 한민족의 기상
시대를 불문하고 세상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장, 발전해왔다.
01. 백암산성. 고구려 성 의 웅장한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성으로, 당태종 이세민이 침공했을 때 성주 손벌음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연합콘텐츠
? 진취進取 적극적인 자세로 뜻을 이룩하다
만주에 펼친 한민족의 기상
80년대 초 대학 수업에서 한 교수가 “우리 민족의 정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청일·러일 전 쟁,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매번 ‘당하는’ 입장이었기에 수긍할만 했다. 하지만 그 ‘한’ 의 정서로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동시에 기술강국‘, 한류’ 라는 거대문화를 흔히 우리 민족사는 반만년 역사라 말하지만 실제 우리 국민들이 체감하는 역사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종속되어 살았던 조선의 역사다. 그 종속된 500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결과가 ‘한’ 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민족정서의 표상이 될 수 없다.
고조선, 중국이라는 거대세력에 맞선 진취적 기상 우리 민족사의 처음은 BC 2333년 건국하여 BC 108년 에 멸망한 ‘조선’이다. 그런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왕조임에도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으나 위서로 단정 지어져, 이를 근거로 섣불리 말할 수 없다. 다만 중국 역사서인『한서漢書』에 등장하는 우거대왕의 모습에서 고조선의 기상이 어떠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700년 간 분열된 중국을 진시황이 통일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 혼란기를 평정하고 중국의 통일을 이룬 나라가 바로 유방이 세운 한나라였다. 한무제는 한나라 최고의 정복군주였다. 그는 타클라마칸 너머까지 영토를 넓혀 실크로드를 개척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가장 강한 종족이었던 흉노족마저 공략했다. 그런데 이런 그의 팽창에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고조선이었다. 한무제는 전통적 강국인 고조선 때문에 쉬이 패권을 완성할 수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한무제는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무례한 행동을 하여 처형된 섭하의 죽음을 트집 잡아 고조선을 공격했다. 이 때 고조선의 임금이 우거대왕이었다. 한나라 장수는 위청이었는데 그는 흉노족을 점령했던 백전노장이었다. 그러나 우거대왕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오히려 한나라 군을 기습 공격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대승을 거뒀다. 한무제는 이 패배 이후 한동안 고조선에 전혀 대항 못하였다. 그러나 권토중래하던 한무제는 다시 군사를 모아 고조선을 재침공한다. 그는 이번에는 육전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곧바로 평양성으로 들어와 성을 포위했다. 1년 동안 이어진 공방전에서 고조선 군은 한나라 군을 상대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속된 전쟁 에 염증을 느낀 일부 권신들에 의해 우거대왕은 암살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 평양성은 함락당하고 고조선은 망하게 된다. 실패했지만 우거대왕의 삶을 살펴볼 때 고조선 사람들의 기상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결코 굴복하거나 꼬리 내리지 않았고 도전적으로 맞섰던 것이다.
02. 압록강철교. 북한반도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연합콘텐츠
고구려, 민족의 기상을 떨친 영웅들
고조선을 멸망시켰던 한나라도 오래 가지 못해 위·촉·오 삼국으로 분열된 이후 약 400년 간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큰 혼란기를 겪게 된다. 이 분열된 중국을 다시 통일한 나라가 수나라이다. 통일된 중국은 당시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에 큰 위협이었다. 수나라를 세운 문제와 그의 아들 양제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끊임없이 군대를 보냈다. 특히 양제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100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결국 을지문덕 장군이 지휘한 고구려의 육군과 고건무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이로 인해 결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군을 2,300여명만 남기고 몰살시킨 전투는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은 큰 승리이다.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실패 이후 혼란한 중국을 다시 통일한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당나라를 세운 이 연의 아들 이세민이다. 그는 당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돌궐을 점령했을 뿐 아니라 히말라야산맥 동쪽, 고비사막 남쪽의 천하를 당나라의 영토에 편입시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다. 이런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대의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을 때 고수전쟁의 영웅이던 고구려의 영류왕 고건무마저 두려워했다.
이 때 당나라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인의 기상을 보인 사람이 연개소문이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당나라의 압력에 굴복하는 고구려 내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 후 당나라 이세민에게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훗날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우는 말갈기병대, 토착 세력인 연나부의 양만춘 등은 물론 동돌궐의 진주가한과도 연합하여 사방에서 당나라를 압박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세민 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선봉에 세운 부대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아사나사마가 이끄는 돌궐족 기병대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국 역사책에는 그들이 출전했다는 기록만 나올 뿐 그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돌궐기병대는 연개소문이 이끄는 말갈기병대에게 전멸했는데 이를 숨긴 것이다. 또한 고구려 수군기지였던 비사성을 점령한 당나라 수군 오만명 또한 평양성을 향해 항해를 했는데 역시 그 이후의 행적 역시 알 수 없다. 이세민 또한 백암산성과 요동성을 점령한 후 안시성을 공략하다가 양만춘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의 반격을 받아 결국은 패배하여 돌아간다. 중국 최고의 영웅인 이세민은 죽을 때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구려와 수나라,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이 두 전쟁은 오늘날로 말하면 1, 2차 세계대전 급의 전쟁이었다. 중국과 고구려가 전력을 기울여 싸운 큰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자, 이런 영웅들은 중국의 의도에 의해 폄하되고 왜곡되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영웅들을 바로 아는 것, 그것이 우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의 뿌리를 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03. 장군총. 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으로 서울의 백제석총, 산청의 구형왕릉무덤과 형식이 유사한 것으로 동북공정을 반박할 수 있는 주요한 유물이다. ⓒ박혁문
04. 두만강 하류의 북한과 중국 훈춘 지역을 잇는 다리. 이 다리를 통해 중국의 물자가 북한으로 들어간다. ⓒ박혁문 발해, 대륙에 떨친 해동성국의 기개 발해사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해동성국’이라는 말 정도뿐 그 알맹이는 대부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발해에 대적할 나라가 없었기에 큰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한민족 최고의 정복군주인 발해 2대 임금인 무왕 대무예이다.
『구당서』에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을 고구려 별종으로, 『신당서』에는 속말말갈 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발해를 여진역사로 분류한다. 하지만 발해가 세워진 지역은 백산부, 속말부말갈족들이 사는 지역임에는 틀림없으나 발해를 세운 지배세력은 분명 고구려인들이다. 대무예가 일본과 국교를 맺을 때 보낸『일본서기』에 전해지는 문서에 따르면, 당시의 사신들은 대부분 고씨 성을 가진 고구려인이며 자신들은 고구려의 후손으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버지 대조영의 뒤를 이어 대무예가 발해의 2대 왕으로 즉위하자 당나라는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흑수부말갈을 이용했다. 이들은 단 한번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한 부족인데, 당나라는 추장 아속리계를 뒤에서 조종하여 발해를 끊임없이 공격하여 대무예의 장안성 입조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대무예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흑산부말갈을 공격하여 끝내는 그들을 발해의 백성으로 삼았다.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고구려의 옛 영토인 요동지역을 회복한 후 당나라 정벌군을 꾸려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 해군기지인 산동성의 봉래성을 공격, 산동성 일대를 점령한다. 당나라에서는 발해에 맞서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이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동성은 발해의 영지로 남게 된다. 이 전투의 후유증으로 당나라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끝내 당나라는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 역사책에는 장문휴의 공격을 해적떼의 약탈로 묘사하여 왜곡하고 있다.
한편, 산동성 대부분을 뺏긴 당나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게 한다. 이에 신라는 김사란을 지휘관으로 삼아 삼만명을 동원하여 발해를 공격하였지만 이들은 대무예에게 전멸당하고 만다. 이 두 전투 이후 발해는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어 300년 간 평화를 누리게 되고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정복군주로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 때보다 실은 더 넓은 영토를 개척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의 대명사 대무예,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의 뿌리로 당당히 존재하는 그가 해적의 일원으로 폄훼되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바르게 알고 재조명해야 할 민족기상
우리 민족의 정서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라고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전범이 될 만한 사건이나 인물을 찾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역사관이 한반도와 근래의 역사에만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워 고구려와 발해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대무예,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을지문덕 등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의 뿌리가 되는 조상들이 중국인이 되어 사라져 가는 것에 무관심한 것도 원인일 것이다. 이들이 살았던 지역과 이들의 활약상을 말하고 가르쳐야만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이 날개를 펼 수 있을 것이다.
글. 박혁문 (역사저술가)
01.『 왕오천축국전』. 신라 승려 혜초가 지은 인도 여행기로, 당시 인도와 비단길 지역의 종교와 풍속, 문화를 풍부하게 기록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에 뿌린 신라인의 열정
왕오천축국전과 혜초
신라 승려 혜통惠通의 출가담은 언제 읽어도 가슴을 치게된다. 『 삼국유사』의「신주」편에 실린 이야기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의아한 생각이 든 혜통,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이 것이 설마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혜통의 눈에 어떻게 하여 이런 모습이 비추었는지 알 수 없으나,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하다가, 혜통은 문득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리라 마음먹었다. 깊은 탄식의 끝이었다.
출가담도 출가담이려니와 그런 혜통이었으니 수행 또한 남달랐다. 혜통은 당나라로 가서 무외 삼장無畏三藏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무외 삼장은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 곧 중인도에서 태어나 716년에 당나라로 온 밀교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혜통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해가 665년이므로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밀교의 대표적인 승려였으므로 기록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스승이 혜통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혜통은 가벼이 물러서지 않고 부지런히 3년을 수행했다.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혜통은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스승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王’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화상王和尙이라 했다. 혜통의 정진精進이 목숨을 건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혜통이 이런 사람이었다면 또 한 사람 우리가 경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혜초(慧超, 704~787) 아닌가 한다. 그 또한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에게 배웠고, 723년경에 4년 정도 인도 여행을 한 뒤, 733년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산서성의 오대산에서 거주하였다. 필자는 혜초가 혜통의 어떤 연장선상에 있는 신라인의 기개로 환상될 때가 많다.
02. 타클라마칸 사막의 천산산맥. 혜초와 같은 수행승들은 목숨을 걸고 불법을 찾아 이 사막을 건넜다. ⓒ연합콘텐츠
한번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순례자들
사실상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혜초인데 말이다. 오직 『왕오천축국전』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혜초가 쓴 시의 일부이다. 『왕오천축국전』이 돈황敦煌석굴의 깊은 곳에 묻혔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우 100여 년 전, 그나마 신라 출신이라는 사실 말고는 고향이며 죽은 곳도 알 길 없지만, 719년 열다섯살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한 다음 결행한 4년간의 인도 여행을 어렴풋이 전해준다.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위의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을 읽을 뿐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 불을 들고 땅 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 가리오’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을 오르는 그의 가슴 속에는 불같은 열정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파밀고원은 멀기만 하고 생사를 오가는 여행길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던 것일까? 같은 길을 따라 거슬러 왔던 전도자들을 생각하며 걸었던 것일까? 이런 여러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의 진취적인 정신밖에 댈게 없다.
03. 돈황의 석굴을 조사하는 펠리오. 그는 돈황 석굴에 보관되어 있던『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였다. ⓒ강병기
중국 정통 밀교의 법맥을 이은 혜초 그러나 순례자의 마음인들 범인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의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마리 없어 /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렸다는 고사가 있거니와, 그런 기러기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막막한 심정이 잘도 그려져 있다. 혜초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으로 그가 중국 밀교의 초조 금강지(金剛智, 671~741)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 719년, 곧 그의 나이 열다섯살 때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5년을 수학한 혜초는 감연히 인도 여행을 떠난다. 갈 때는 해로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그가 남긴『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경의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P. Pelliot의 돈황 석굴 발견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1856~1945)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천년 세월의 긴 잠을 잔 책이 바로『왕오천축국전』이다.
04.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실크로드 통행을 감시하기 위해 쌓은 가욕관성. ⓒ연합콘텐츠
그대 서번이 멀다 한숨 짓는가 /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 길은 거칠고 설령雪嶺 높은데 /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 치네 /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
「서번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제목의 시이다. 서번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이다. 지금은 서장이라 부르는데, 이때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다. 설령雪嶺은 눈 쌓인 봉우리이지만, 여기서는 히말라야산맥을 이른다. 한참 인도 여행 이 무르익을 무렵, 혜초는 우연히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게 된다. 설령은 도적떼 출몰하는 계곡이었기에 대국의 사신답지 않게 코를 빼고 가고 있다. 처량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 나는 새마저 놀라는 길을 사람이 무슨 재주로 편히 지날 수 있겠는가. 승려인 혜초마저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고행의 대가代價였을까, 혜초는 귀국하여 스승의 총애 아래 수행 정진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지 불공不空 법맥을 잇는 제자로 우뚝 섰다.
글. 고운기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01. 영국 청년실업 심각 퍼포먼스. 영국 런던의 덴마크 스트리트에 있는 취업지원센터 앞에서 청년 실업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젊은이들이 ‘일할 준비가 됐다’ 라고 적힌 가방을 들고 대규모 줄서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 다. ⓒ연합콘텐츠
무한경쟁 시대가 요구하는 도전정신과 역동성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짧은 기간에 선진국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대외무역, 특히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무역의존도는 이미 103%(2013년 기준)로, 수출이 국가 경제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전략을 택한 이후 가격, 기술, 품질, 수요기반의 부단한 혁신을 바탕으로 한 철강산업 및 조선산업을 육성한 결과 주요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1964년 고작 1억불이었던 수출액은 7년후인 1971년 십억불에 이르렀고, 1977년에는 백억불, 1995년에는 천억불, 2014년에는 6천억불을 달성해 무려 50년 동안 6천배의 성장을 달성했다. 이러한 경이적인 기록은 도전정신, 끈기, 진취성으로 이뤄낸 기적이었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청년실업
현재 우리 경제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는 암울한 징표 중 하나인 청년실업자수가 38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소위 ‘3포 세대’ 청년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 2014년 고용동향에 의하면 전체 실업자수 93만 7000명, 이 중 15~29세 실업률이 9%에 달해 청년실업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7000명, 이 중 15~29세 실업률이 9%에 달해 청년실업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청년취업난이 장기화되면서 학생도 아니고 취업자도 아닌 청년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니트족’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니트(neet: 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ing)족’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지 않는 사람을 뜻하며, 보통 15~34세 사이의 취업인구 중 미혼으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가사일도 하지 않는 무업자無業者를 지칭한다. 이 중 단지 시간만 보내고 있는 니트족도 56.2%에 달해 청년 고용률을 저하시키는 주원인으로 지목됐다. 또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 의존하는 사람, 즉 ‘캥거루족’도 많아지고 있다. 캥거루족이 늘어난다는 것은 미혼자의 증가와 출산율의 저하를 의미하고 이는 노동인구의 감소로 이어져 결국 국가성장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02. 한강 일대 서울의 야경.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주년을 맞는 해로, 지난 70년간 한국은 국민들이 가진 엄청난 잠재력에 힘입은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펼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미지투데이
무한경쟁 시대가 요구하는 진취적인 인간상 이러한 청년 실업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제도적인 방안과 더불어 청년들의 인식변화가 필요하다.
지난해 10월 대한상공회의소와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으로 개최된 제7회 기업가정신주간 국제컨퍼런스를 통해 발굴된, 도전정신과 진취성으로 성공한 기업가 한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학교 재학 중 창업하여 성공한 송성근 대표의 이야기이다.
그는 태양광시스템과 LED조명 시스템, 친환경 제품 등을 개발해 제작·시공까지 통합 제공하는 회사를 창업한 청년사업가이다. 2010년 5월 ‘중소기업인의 날’ 청와대에 초청돼 대통령과 정재계 인사들 앞에서 창업 성공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때 집이 없어 컨테이너에서 살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던 송 대표는 대학교 입학 전부터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직해 자금관리, 조직관리 등 여러 부분을 익히는 등 일찍부터 꿈에 대한 장기적인 준비를 해왔다.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바로 도전해라, 고통도 있고 시련도 있겠지만 그 시련이 훗날 돌아보면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오늘 창업을 꿈꾸는 많은 청년들에게 산 교훈이 되리라 생각한다.
8톤 덤프트럭 한대로 시작해 1조원 규모의 그룹을 일군 박주봉 대주·KC 회장은 또 한명의 도전정신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7남매 중 장남인 그는 어린 시절 구두닦이, 떡볶이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성인이 된 그는 다른 사람보다 일감을 더 받기 위해 트럭을 끌고 새벽 2시에 출근했고, 3년 후 그가 소유한 트럭은 50대로 늘어났다. 그렇게 밑천 20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은 점점 성장했다. 부산 낙동대교, 서울월드컵경기장, 여의도 IFC몰 등이 박 회장의 손끝에서 이루어졌다. 현재는 철강·화학·자동차·물류·건설·에너지 등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문화, 예술, 스포츠 등에서도 도전정신으로 역경을 극복해낸 사례를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온갖 힘겨운 시기를 이겨내고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쓴 서건창 선수. 그가 긴 시련을 딛고 야구계의 ‘영웅’이 된 스토리는 끊임없는 도전이 이루어낸 진정한 승리를 보여준다. 서건창 선수는 광주일고 야구부 시절 왜소한 키와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구단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03. 송성근 대표가 대학교 재학 중 창업한 ㈜솔라사이언스. 태양광시스템과 LED조명 시스템, 친환경 제품 등을 개발해 제작·시공까지 통합 제공하고 있다. ⓒ연합콘텐츠
04. 수많은 슬럼프와 신고선수의 설움을 이겨내고 ‘안타 제조기’로 거듭난 서건창 선수.ⓒ연합콘텐츠
결국 그는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신고선수(프로야구에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해 계약금 없이 프로팀에 입단한 선수)로 LG에 입단했다. 2008년 6월, 그는 1군에서 한 타석에 들어서 삼진을 당하고 물러난 뒤 결국 그해 8월 LG에서 방출됐다. 갈 곳 없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현역입대뿐이었다. 육군 소총수로 군에 입대한 그는 야구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경계근무를 서면서도 자신이 타격, 주루, 수비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고, 왜소한 체격을 보완하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에 더욱 힘썼다. 전역 후 넥센의 신고선수로 다시 프로 무대를 밟은 그는 2014년 시즌에서 새로운 타격 폼으로 ‘안타 제조기’로 거듭났고 사상 최초 200안타를 돌파하며 전설을 썼다. 그리고 2014 프로야구 MVP, 최우수신인선수 및 타격 3관왕(안타, 타율, 득점)을 달성했고, 이어 시즌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영예의 대상까지 수상했다. 손에 못이 박히도록 배트를 휘두르고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며 이룬 결실이었다. 불운을 탓하고 어려운 상황을 비관했다면, 최고의 타자 서건창은 없었을 것이다. 비록 지금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부분’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실천한다면 신고선수에서 MVP로 올라설 수 있다.
05. 사회 초년병인 20대와 주축 계층인 30대 취업자 수가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한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취업 관련 정보를 살펴보고 있 다. ⓒ연합콘텐츠
06. 도산 안창호 선생 필적. 도산 선생은“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라 며 무실역행 정신을 강조했다.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되새겨보는 무실역행務實力行정신 송성근 대표나 박주봉 회장, 서건창 선수는 무한경쟁 시대가 요구하는 진취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 이들은 긍정적인 생각, 적극적인 실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책임지는 자세를 가졌다. 동시에 지속적인 자기계발로 항상 도전하는 역동성을 지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라며 무실역행務實力行정신을 강조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여 움츠리는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다. 어떤 일이든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회를 기다리기 전에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밝지만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글. 김의식 ((사)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교육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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