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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먹을 거리
먹을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3대요소로 衣食住를 꼽고 있다. 이 의식주 중에 비록 옷이 앞에 나와 있으나 옷을 안 입었다고 당장 삶을 유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중에서도 食이 제일 상위급인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할 것이다.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양반이요,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하루 3食 식사하는 것, 즉 먹는 것이 아주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임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아프리카 세렌게티 평원이나 옹고롱고르 분화구에서 펼쳐지는 동물의 왕국을 보면 초식동물인 코끼리나 얼룩말, 톰슨가젤, 인팔라 등은 먹고 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온 듯 종일 풀을 뜯는 것이 그들의 일과여서 일평생을 먹는 걸로 소임을 다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더구나 육식동물들의 치열한 먹이사냥이나 먹이를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감추고 저장하는 처절한 싸움은 바로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생존경쟁이요, 즉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투쟁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도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 강한 자의 먹잇감이 되는 약자동물은 눈도 밝고 귀도 밝아야 하며 유사시 달아나기 위한 주력도 월등해야 하기 때문에 몸뚱이가 날렵하다. 그러나 맹수들은 우선 얼굴부터 험상궂고 외피도 얼룩지고 검은 줄이 있어 상대의 기를 꺾을 뿐 아니라 날쌘 발톱과 이빨까지 갖춰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도 잘 먹고 잘 살기위한 투쟁의 연속이 인간의 존립목표이자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기반이 되는 토지를 빼앗기 위한 쟁탈전을 고조선과 삼국시대 이래 우리 조상들도 꾸준히 벌린바 있으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에 맨 먼저 실시한 것이 토지를 빼앗기 위한 토지측량조사사업이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이었으며 수많은 농장의 설립이었다. 결국은 호남평야에서 생산하는 양질의 쌀을 수탈하여 저의 나라로 수송하려고 서둘러 개발한 것이 군산항의 개항이었고 전군도로와 군산선의 철도개통이었다. 그리고 부의 잣대로 여기던 만석지기요, 천석꾼이라고 하는 것도 농토에서 생산하는 토지를 일컫는 단위를 말하는 것이다.
가족의 하루 삼식 해결을 위하여 우리부모들은 흉년이 들거나 절량이 되었을 때 먹을거리 조달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지 내 짧은 글재주로는 표현을 못한다. 旱魃(한발)이 심하여 물이 말라들어 바닥을 들어낸 저수지 밑바닥을 파헤쳐 녹말가루가 나오는 마름을 채취하기도 하고 산야에 흩어져서 초근목피를 캐고 벗기는 등 야생동물과 같은 생활하는 것을 목격 한 일이 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모진 목숨이 연명이 되어 오늘날 밝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경지에 이르러 이제는 옛일을 까맣게 잊고 음식물을 마구 버림으로서 많은 음식쓰레기를 양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상황이 역전된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와 같이 삶의 질이 좋아진 세상을 만났는데도 일부 몰지각한 상인이 식자재를 가지고 얄팍한 꼼수를 부려 선량한 시민들을 속이는 행위를 하는 자가 있어 이를 공개하여 우리 모두가 타산지석으로 삼는데 일조하고자 이 글을 쓴다.
하루는 직장에서 퇴근하여 집에 당도하니 안식구가 배가 아파서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만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마을근처의 의원에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맹장염이라고 하며 빨리 전문병원으로 가 보라고 독촉했다. 그래서 택시로 왕십리에 있는 맹장수술전문병원이라는 김 외과에 안식구를 데리고 가니 원장은 이미 퇴근을 하였다기에 사정을 하여 병원 뒤에서 살고 있는 원장을 불러와서 진찰을 받은 결과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다고 빨리 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간호사에게 수술준비를 시키는 등 법석을 떤 끝에 밤에 수술을 잘 마쳤다. 약 2주일 정도 입원을 하여야 한다기에 입원은 하였으나 한편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집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었다. 그때는 간병인 제도라는 것이 없는 때여서 환자를 돌보랴 아이들을 보살피랴 나는 직장에 출근도 하여야 하는데 어떤 묘안이 없어서 전전긍긍 하고 있던 차에 천우신조로 남원에 사시는 재종누님이 찾아왔다. 그래서 병원에서 환자간호를 누님에게 부탁하고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챙기며 직장에 출근 할 수가 있었다. 그런 뒤에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10여일의 날자가 훌쩍 지나니 환자의 상처도 아물어 퇴원하는 수속을 마치는 중에 원장선생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 “ 환자가 너무나 허약하니 퇴원을 하면 중앙시장 뒷골목에 있는 보신탕집에 가서 개다리를 사다가 계속 몸보신을 시켜야 환자가 빨리 회복합니다.” 일단 퇴원을 한 뒤에 환자에게 원장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펄쩍뛰면서 “지금까지 개고기를 입에 댄 적도 없고 앞으로도 먹고 싶지 않다” 고 한마디로 거절하기에 할 수 없이 꿩 대신 닭이라고 소꼬리가 좋을 것 같아서 마장동 풍성산업이라는 도축장 옆 고기시장으로 소꼬리를 사려고 갔다. 소머리, 소족 소뼈 소꼬리를 파는 가게가 잇달아 있고 물량도 엄청 많이 쌓여있어서 고르기가 쉽지 아니했다. 그래서 구경을 하고 지나가는데 어느 젊은 사람이 나에게 다가 오더니 무엇을 사려고 왔느냐고 묻기에 한우꼬리를 사려고 고르는 중이라고 했더니 잘못하면 속으니 진짜를 사라고 하면서 옆에 가게로 안내를 한다. 가게에 가서 한우꼬리가 있느냐고 물으니 자기가게는 한우만 취급하는 곳이니 염려를 마시라며 소꼬리를 가지고 왔는데 밑에 꼬리부분에는 누런 한우 가죽을 벗기지도 않고 그냥 그 상태로 보여주기에 일단 한우로 안심을 하고 그놈을 골랐다. 그랬더니 잘라야 한다고 안으로 가지고가서 톱으로 잘라서 가지고 왔는데 가죽을 벗긴 자리가 오래된 듯 조금 말라있기에 내가 “이것 가짜가 아니냐. 다른 소의 꼬리에 한우가죽만 입혔다가 빼내고 자른 것이니 나는 사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 양반 큰일 날 소리를 한다”면서 “이 양반 만날 속아만 보고 살았나? 이곳에서 내가 장사를 수십 년 했는데 그까짓 쇠꼬리 하나 거짓으로 팔아먹겠느냐? 사람을 제대로 보고 그런 말을 하라. 우리 집은 안심해도 되니 믿으시라.“고 하면서 자기네 상호가 찍힌 명함을 건네주기에 반신반의하면서 소꼬리를 사가지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마당가에 큰 솥을 걸고 소꼬리를 다 집어넣고 장작으로 불을 지폈다. 한나절을 폭 고은 뒤 큰 다라에 퍼 담고 차게 식혔다. 밤새도록 식힌 뒤에 아침에 기름을 걷어내고 이놈일부를 작은 솥으로 옮겨 붓고 데우려고 솥뚜껑을 여니 묵처럼 엉켜있어야 할 놈이 그대로 물이 되어 솥 안에 하늘의 구름이 떠 있었다. 완전히 속았다. 깨끗이 당했다. 이런 인간이하의 장사치들과는 상종할 가치가 없는 것 같아서 직접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은 것이 너무나 분하고 어굴했다. 깊이 생각 끝에 성동구청 위생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동료에게 전화를 하여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고 직원을 고객으로 가장시켜 00상회에 가서 소꼬리를 사는 것처럼 하고 진짜여부를 조사 해 달라고 했더니 며칠이 지난 뒤에 전화가 왔다. 직원을 내 보내 고객인 듯 소꼬리를 사렸더니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이 우유소꼬리에 한우 가죽을 씌워 팔고 있기에 자인서를 받아서 1주일 영업정지를 시켰다고 한다. 1주일 영업정지라니 솜방망이로 등을 치는 격이다. 法이라는 글자는 원래 물 수변(水)에 갈거(去)자라 물같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학교에서 배웠으나 우리나라의 법이라는 것은 한술 더 떠서 술에다가 물탄 맹물 같아서 아무 실효성도 거두지 못하는 물탕이었다. 시장에서 상습적으로 선량한 시민을 속이는 사기꾼을 영업정지 1주일이 당키나 하느냐 이 말이다. 신성한 먹을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사람을 속이는 자는 능지처참을 해야지 1주일 영업정지로는 처벌이 너무나 가벼워서 1주일 후에도 또 계속하여 선량한 소비자를 속이고 우롱할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손톱만큼의 반성하는 기미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가벼운 행정처분에 코웃음 치며 바람잡이를 내세워 계속사기극을 벌릴 것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번 기회에 만천하에 이 사실을 공개하노니 선량한 시민들이시어! 이런 사기극에 절대로 속지도 말고 휘말리지도 맙시다. 그리고 이런 나쁜 사람들은 이 땅에 다시는 발을 못 붙이도록 우리 모두가 감시자의 역할을 제대로 합시다.
서울시우문학 제4호에 게재
山 水 會
공자님 말씀 중에 仁者는 樂山(요산)이요, 智者는 樂水(요수)라는 구절이 있다.
요산요수란 산을 즐기고 물을 좋아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산행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소망하는 기본목표요 공통분모이리라. 1970년대에 행정서기 발령을 받아 종로 5가 대학천가에 있는 서울시 북부수도사업소에서 같이 근무했던 9명의 동료들이 주축이 되어 김동수 동료의 주선으로 1994, 12, 3 경기도 가평 현리입구 “가족콘도”에서 1박을 하면서 우리끼리 친목도모와 건강유지를 위하여 매주 일요일에 근교에 있는 산행을 하면서 심신을 단련하자는 의견을 모아서 조직한 것이 산수회란 모임이었다. 이 山水會라는 모임명칭은 무엄하게 공자님 말씀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고 서울시 水도국에서 인연을 맺은 우리들이 山을 사랑하고 산을 가까이 하여 산과 함께 하기위한 모임이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첫 산행은 그 이튿날인 12, 4 깨끗한 물이 흐르고 역사적인 사찰 현등사가 있는 운악산 등산으로 산수회 출범의 테이프를 끊었다.
그 뒤로 春風秋雨 숨이 막히는 더위속의 여름이나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에도 한 번도 거르지 아니하고 매주 일요일마다 산행을 계속하여 2014년이 되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만 20년이 되는 성년이 되는 해가 되니 회원은 낡았어도 산수회는 이제 철이 든 한창때인 청년기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간에 근 20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회원 중에도 변동이 생겼다. 회원 중에 “여름에는 왜 땀이 나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왔으나 챙겨오라는 간식이 없기에 공부 못하는 사람이 가방만 크다고 한 방 놓았더니 “염려하지 마 그래도 먹어줄 입은 가지고 왔어” 웃기는 이야기를 잘 해서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던 방한의 회원은 관악구청에서 위생과장을 하다가 퇴임을 한 친구인데 1999, 8. 29 선영에 벌초하러 갔다가 벌에 쐬어 운명을 했는데 산수회 주관으로 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을 거행하여 마지막 가는 회원의 명복을 빌었다. 그 뒤 2003, 1, 13에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항상 정력이 넘쳐서 젊은 여자들을 몰고 다니며 고스톱을 밥보다 좋아한 윤정남 회원은 00기업(주)의 대표이사로 근무 중이었는데 임파선 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였기에 회원은 7명으로 줄었다. 그래도 산행모임은 계속되고 세월은 제멋대로 한 없이 흘러갔다.
1995년 겨울의 초입에 우리들은 홍익회가 주관하는 열차산행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11, 25-26(무박2일) 열 차내에서는 밤새 떠들어 대는 젊은이들과 한 칸에 함께 탔기에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밤새 달려서 경남 밀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동도 트지 아니한 미명인데도 등산은 시작되었다. 길도 잘 보이지 아니하여 우리 일행 중 김정섭 회원은 발을 헛디뎌서 개울로 빠지기도 하는 등 넘어지며 엎어지며 오르던 우리 일행은 산행중간에 조남성 회원이 주선하여 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아침밥을 들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천황산만 올랐다가 내려 왔는데도 독일병정 이교희(필자의 저서 낙수첩 제2집 48P “독일병정” 참조)는 스테미너가 왕성하여 천황산은 물론 재약산 까지 한꺼번에 2개산을 등반하는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이 친구 2009년도부터 무릎관절로 다리를 절면서도 열심히 우리 뒤를 따라오면서도 자기를 버리고 우리가 먼저 갔다고 농담을 하더니 나중에는 자기로 인하여 회원들의 산행에 걸림돌이 되니 미안하다고 스스로 단체행동을 접고 말았다. 한 반년 뒤에 보니 자기 안식구를 차에 태우고 근교에 다니며 물통에 물을 받아 짊어지고 내외분이 정답게 산책을 하고 있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그 뒤 서울시에서 근무하다가 공업진흥청으로 가서 공업연구관으로 퇴직한 서원도 동료를 보충하여 일행이 7명으로 충원되어 산수회는 아무 탈 없이 지금까지 꾸준하게 지속하고 있다.
산수회 모임이 10년이 되던 지난 2004년도 벽두에 “산수회 10년사”라는 산수회 10년의 발자취를 뒤 돌아보는 우리들의 역사를 책으로 엮은바 있다. 이 “산수회 10년사”에는 한길수의 “산수회 10년을 돌아보며” “방한의 영전에 드리는 조사” 서원도 회원의 시 “산 길” 이채율 회원의 “自省의 말씀” 그리고 10년간 520회 정도 우리가 답사하거나 산행한 기록 즉 목적지, 당일 참여한 회원, 답사한 현장이나 산행하면서 보고 느낀 사항, 당일의 소요 경비내역 등을 기록하였고 10년간의 회비 수지 결산서를 첨부하였더니 자그마하지만 우리들의 추억담이요, 산역사로 기리 남기고 싶은 기록이 되었다. 여기에 당일의 산행코스와 소요시간 그리고 절명의 순간을 찍은 사진 등을 곁들였다면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산행기가 되었을 것으로 자부한다.
이제 독일병정의 전철을 내가 밟고 있다. 2년 전부터 양쪽 발등이 저리고 아파서 병원에 가면 소염제나 진통제 진정제 계통의 약을 처방해 주고 한의원에 가면 침을 놓고 몸을 보해야 한다며 한약제를 처방해 준다. 그러나 발등이 붓거나 곪지도 않고 산을 오를 때만 저리고 아픈 현상이 나타나기에 죽을병은 아니라고 자위하고 하루하루를 견디며 열심히 산행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발등이 저리고 아픈 빈도가 잦기에 지인의 소개로 신경전문병원에 가서 다양한 검사를 한 뒤에 원장의 진찰을 받으니 척추 뼈가 튕겨져서 디스크를 누르니 지나가는 신경이 눌려 아프다고 수술을 권하기에 몸에 칼을 대기도 싫고 나보다 먼저 다리가 아파서 허리 수술을 받은 안식구의 경우가 생각나서 수술대신 간편한 시술을 받았으나 막대한 경비만 지불하고도 효과가 별로 없기에 마을에 있는 신경과에 다니며 지금도 물리치료 위주로 병과 싸우는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내가 독일병정대신 산수회원들의 정상적인 산행 스케줄이나 진행 속도, 또는 코스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산수회 모임에 걸림돌이 되는 제2독일병정이 된 느낌이다.
회원들이 이제 稀壽 전후가 되다 보니 옛날 같지 않고 북한산의 인수봉이나 도봉산의 포대능선, 만장봉, 관악산의 연주암 등의 산행은 자재하고 일정 높이의 능선까지만 산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눈이 오거나 빙판으로 길이 미끄러울 때는 주로 아차산을 조심해서 오르거나 양재천이나 올림픽공원 그렇지 않으면 청계천 등 걷기 위주로 전환을 하다 보니 이제 모임 명칭을 “川水會 ”로 개명하자는 의견이 나오더니 산책위주로 급을 낮추어서 활동한다고 “散水會”로 개명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산수회! 이제 20년이라는 연륜이 흐르다 보니 뒤처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 전체회원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 같아서 면목이 없다.
그러나 우리회원 중에도 취송은 심장이 안 좋아 조심해야 한다고 안전위주로 하려고 하고 문봉은 대장암 수술을 받고 나서 정양 중이며 다송도 발등이 아프다고 치료 받는 등 통증의 경중이나 그렇지 않으면 선후 또는 완급은 몰라도 이 시점에서 이와 비슷한 수순을 밟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路程이요, 歷程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마의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이것은 정비석 선생의 금강산 여행기인 “山情無限”의 마지막을 장식한 결구인데 선배 문인이 쓴 이 글은 우리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낸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회원 모두가 이제 가을도 지나 해가 서산에 기웃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선생의 글이 공감하는 바가 너무 커서 이 글을“山水會”의 꼬리로 장식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에 붙였다.
서울시우문학 제4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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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속이는 사람은 똑똑하고 속는 사람은 바보라 하는
요즘 세상이지요.
마음 아프게 저질스럽게 하고는 약으로 주는 듯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말고 모르는 체하라 합니다.
공연히 마음고생 하면 본인만 손해 본다고.
세월을 탓 할까요? 어쩔 수 없이 등에 짊어진 세월!
건강하세요.^^
먹을꺼리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는 것은 정말 파렴치한이나 하는 잣이겠기요? 더구나 환자가 먹을 보양식을 그렇게 속이다니....참 많이 속상하였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