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김경용, 민음사, 1994, pp55-59)
여러분들이 언어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발췌하여 올립니다. 특히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편 현대사회의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비판도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유사:차이
소쉬르는 언어를 차이의 체제 a system of differences로 본다. 차이는 언어뿐만 아니라 다른 기호체제에서도 의미의 기본적인 근거를 준다. 다라서 기호가 지니는 보다 원초적인 의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논의한 수준에서 좀더 내려가, <원자의 수준>이라고 할 만한 수준에 이르면 <유사:기본>의 기본적 의미체제를 발견하게 된다.
기호들의 기본적 의미 단위는 기호들이 서로 닮았느냐 서로 틀리느냐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서로>라는 말은 적어도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기호 사이에서 기호의 기본적인 의미가 상대적으로 결정됨을 암시한다. 하나의 독립된 기호는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미를 이해할 수조차 없다. 오직 하나뿐인 것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된다.
차이는 낱기호의 의미의 기본이다. 한글에서 까, 다, 따, 마……의 의미는 이들이 서로 중복되지 않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하나 다른 소리를 대표하고, 시각적인 모양도 다르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서로 다름[差異]의 의미를 부정형 negation에 의해서 정의한다. <까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 <까>의 정의는 오직 <무엇이 까가 아닌가>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래서 질문의 답은, <까는 다가 아니다>, <따가 아니다>, <마가 아니다> 등으로 된 부정의 연쇄가 된다. <까>의 값(가치)은 <까>가 아닌 것들의 총체로 ‘정의’된다. 이와 같이 <까>의 값은 다른 어느 것과도 치환되거나 혼동될 수 없는 <까> 고유의 가치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꽃님이 꽃님으로서 값이 있는 것은 꽃님이 꽃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꽃님은 돌쇠가 아니다; 장미가 아니다; 초콜릿이 아니다; 호박이 아니다; 부뚜막이 아니다; 솥뚜껑이 아니다; 바다가 아니다; 하늘이 아니다……. <꽃님은 꽃님>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꽃님의 자기 언급적 정의 self-referential definition의 뒤에는 무한수의 부정들이 전제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신을 만나는 대목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을 만나러 호랩산으로 올라갔다. 신으로부터 들려온 첫 음성은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었다(「출애굽기」, 3:5). 그 의미는, 신이 있는 곳은 인간이 있는 곳과 <다르다>는 것이다. 모세는 신발을 벗고 신의 음성을 듣는다. 신과의 대화중에 모세는 신의 이름을 묻는다. 신은 대답한다. <나는 곧 나다 I am who I am>(3:14). 소쉬르의 기호학은 이내 신의 답변을 <나는 호랩산이 아니다;불떨기가 아니다; 땅이 아니다; 하늘이 아니다……>로 풀이한다. 그래서 신의 답, <나는 곧 나>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쉬르가 아닌 모세가 신의 말귀를 못 알아듣고 다시 묻기 전에 신은 즉석에서 자기 이름을 짓는다. <나의 이름은 야훼이다>(3:15). 옳거니! 모세는 더 이상 이름을 따지지 않았다. 이쯤에서 모세도 소쉬르식 논리를 터득했을 터이다. 야훼는 모세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다; 아담이 아니다…….
이름의 의미는 그 이름 자체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아닌 것들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의미는 차이의 다른 말이고, 차이란 부정성에서 오며, 치환을 허용하지 않는다. 불치환성은 곧 가치의 기본이다. 꽃님의 어머니에게 꽃님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존재이다. 얼굴엔 적어도 두 홉은 됨직한 주근깨가 있고, 덧니까지 나서 볼품이 없지만, 꽃님 어머니에게 꽃님은 백설공주보다 더 귀하고, 퀴리 부인보다 더 영특하고, 브룩쉴즈보다 더 예쁘다.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체제란 단순히 차이의 체제다. <언어에는 오직 차이들만 있을 뿐이다>(1966, 120쪽). 언어체제 속에서 글자들이 갖는 차이만이 기호의 값을 말하고 있다. 어떤 기표의 의미는 미리 주어진 기의와의 관계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와 다른 기표들과 갖는 관계로부터 얻는다는 이론을 의미의 구별이론 diacritical theory이라고 한다(Lapsly & Westlake, 1988, 34쪽).
차이가 낱기호의 의미의 기본인 것에 비해서 유사성 similarity은 어떤 기호무리의 전체적 의미의 기본이다. 그리고 유사성은 이해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해는 의미를 한 차원 더 높은 곳에서 발견할 때 얻어진다. 기호간의 유사성은 범주화 categorization를 가능하게 하는데 범주야말로 이해와 지식의 기본구조를 이룬다. 서로 비슷한 기호들을 한데 모아 이름붙일 수 있을 때, 하나의 범주를 얻는다. 그리고 범주는 유사성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이해될 때 지식이 된다. 꽃님, 진달래, 영자, 양귀비, 논개, 엘리자베스가 모두 여자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 동창, 동료, 동지, 동족 같은 범주들은 모두 어떤 유사성이나 공통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것이다.
유사성에 입각해서 어떤 범주를 얻었을 때, 동시에 차이가 이 범주의 배후에 암시되고, 이 범주에 가치를 준다. 즉 <여자 이름>의 범주는,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식물>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음식>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은 전통적 커뮤니케이션이 목표로 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실용적인 행위로 송신자와 수신자 간의 의미의 공유를 목표로 한다. 여기서 의미의 공유란 다름 아닌 송신자의 마음에서 일어난 의미와 수신자의 마음에 일어난 의미가 똑같아지거나 적어도 서로 비슷해지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의미의 동일성 isomorphism이 일어났다고 한다. 장미꽃 한 송이를 매개로 꽃님과 돌쇠는 <사랑>이라는 의미 동일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의미 동일성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송수신자 쌍방간에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의미 동일성은 의미의 알맹이이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지혜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 경우의 차이는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꽃님과 돌쇠가 나눈 <달>이야기의 예를 다시 음미해 보자. 꽃님의 <달>과 돌쇠의 <달>은 함축 의미에 의미 이질성을 일으켰다. 차이의 발견은 피상적 지식을 주는 데 그친다. 꽃님은 돌쇠가 <무드 없는 맹추>로 보일 것이고, 돌쇠는 꽃님이를 <당연히 밝은 보름달에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멍청이>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 생각의 다름을 알았을 뿐 그 이상 깊은 지식을 얻을 수가 없다. 의미 이질성은 다분히 디지털 정보와 같은 데가 있다. <i> 아니면 <o>. 보름달이 밝은 정서적 의미를 알아차렸으면 <i>, 그렇지 못하면 <o>. 돌쇠의 정서적 상태는 <o>이었다. 보름달이 밝은 과학적 의미를 알아차렸으면 <i>, 그렇지 못하면 <o>. 돌쇠의 눈에 비친 꽃님의 지식상태는 <o>이었다. 두 멍청이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것밖에 없다. <i>와 <o>의 차이, 즉 정보의 차이뿐이다. 정보의 차이는 피상적인 것이라 지식을 축적할 수 없다.
현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지식을 축적하지 못하고 있다(Ellul, 1990). 피상적 정보는 <폐기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산물인 고아고는 차이를 무한정 변조 modulation하는 제도이다. 광고는 실제상 같은 것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인위적 돌연변이의 기구이다. 같은 재료를 쓴 진통제인 데도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붙여 서로 다른 상품인 것처럼 만든다. 커피도 수십 종류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에서 차이란 피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광고는 이 피상적 차이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하며 소비자들은 바로 이 피상적 차이를 산다.
의미 동일성보다 차이의 조작에 더 신경을 쓰는 사회가 현대 사회이다. 차이의 변조가 극성할 때로 극성하고 있다. 사람은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광고는 바로 이것을 이용한다. 사람들에게 개성 있는 차이를 만들어주기 위해 수많은 장신구들이 생산되어 판매된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미디어에 의해 기호의 교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표의 교란에 혼미해지는 동시에 그것에 점점 더 미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