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독교인이다.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체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크리스마스 때에는 선물 받는 게 그저 재미있어 다녔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끔찍했던 6.25를 경험했고, 당시 금융조합 이사였던
아버지는 전쟁이 곧 끝난다 하시며 놋그릇들은 모두 관사 우물에 던져두고
옷장들은 뒤로 해서 벽을 향하게 해 놓으시고, 우리 식구 모두
양촌외가댁으로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 말대로 전쟁은 빨리 끝나주지 않았으며, 나는 놀란 소식을 듣게 된다.
평소 김구를 도우며 자칭 민족주의자로 독립운동을 외쳤던 할아버지가 불온한
사상가로 분류되어 우리 아군에게 총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빨갱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그대로 둘리 없다. 아버지를 부역을 하게 되었고, 9.28 서울 수복이 된다.
자의든 타의든 부역을 한 아버지는 겨우 14살이 된 오빠와 함께
대둔산으로 들어가 공비가 되었다.
13살 나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어린 가장이 되어 내 아래 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며
이집 저집 친척집을 찾아 피난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때 아버지 소식을 듣게 된다.
공비토벌에서 잡혀 대전 교도소에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들이
천 명 넘게 탄원서를 내주었고, 드디어 아버지는 집행유예로 가석방 되어 나온다.
아버지와는 기적 같은 상봉을 하지만 같이 따라간 오빠가 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만다.
이젠 학교에 갈 일이 과제다. 그때의 형편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공부는 때를 놓치면 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께 학교에 가겠다고 하여 허락은 받고 혼자서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근처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J중학교는 금강 하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학교였다. 그런 방법으로 어린 동생도
근처 초등학교로 편입을 시켰다.
가석방으로 집에 계시던 아버지는 한의사 시험을 보아 합격을 하였고,
한의원을 차린 후 생활이 안정이 되어 갈 때쯤 나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울 수 없다’고 좌절해 있는 한 남성을 만났는데
그는 육남매의 맏이였고, 나는“내가 함께 쓰레기 더미에서 그 장미꽃을 피우지요.”
라고 말하며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친구들이 걱정을 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단다.”
라고들 하며 나를 위로인지 비웃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언덕은 내가 만들어 비빈다.”
고 응수하였다. 그러자 친구들 모두가 기가 막혀 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결혼 후 첫 아이를 낳았는데 뇌성마비였다. 병원에 갔더니 아이를 보고 의사가 말한다.
“이 아이는 출산할 때나 아니면 그 후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출산할 때 머리를 건드린 모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아들이 몇 번의
수술 끝에 힘든 보행으로 고등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하고 서울대에 들어갔다.
87년에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교사였던 나는 늘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아들을 만류해야만 했다. “아들아, 네가 네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꼭 학생운동을 해야겠다면
네 맘대로 해도 좋다. 대신 엄마에겐 꼭 일러다오. 나도 네 뒤를 이어서 결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이런 위태로움 속에 난 더 열심히 교사로서의 임무를 다했고,
그로 해서 모범교사 훈장도 받았으며, 3년 동안 포상금으로
나라에서 보내준 여행도 다녀왔다.
가정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동생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어 매월 일천만 원이란 큰돈을 이자로 내주어야 했다. 남들이
1년 아니면 3년 은행에서 적금으로 타는 돈을 난 매월 이자로 내며 살아야 했다.
결국은 담보한 내 살던 집을 모두 빼앗기고, 시골로 집을 옮겨야 했다.
화병으로 시모님은 천국가시고, 남편도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입원을 해야만 했다.
아들은 서울대학교 핵물리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내에‘메아리클럽’
이라는 동아리에서 만난 며느리와 현충일에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떠났다.
이휘소 박사가 다니던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서 1995년 1월 23일
핵물리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 왔지만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명되기가 힘들었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Florida 주립대학에서 상임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위하여 강의실까지
휠체어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후진국 상태였다.
정년 후 모처럼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더니 힘든 삶은 날 놓아 주지 않았다.
2014년 남편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대변도 소변도 언어도 제대로 소통이
안 되는 상태의 마비가 왔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정상인과 다르지만 부자연스러워도
혼자서 화장실도 가고 식사도 할 수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비록 1달란트의 운명으로 태어났어도 그 운명을 바꾸어 몇 배의 달란트로
바꾸어 놓을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시편 119편 71절
시인의 고백처럼 여기까지 나를 환난에서 인도해 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나는 그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험이라면
앞으로도 욥처럼 순종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것이다.
부족한 내 삶의 고백의 글을 읽는 동안 글쓴이의 한 삶을 훔쳐보고 함께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지만
언덕이 없으면 언덕을 만들어 비비며 살아야 한다.
어떤 난관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모두가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이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