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음 아픈, 읽고 난 후 가슴이 좀 먹먹해지는 기사를 두어 편 읽었다...
IOC 홈피에 손기정은 없다
기사 출처: 연합뉴스 (2010. 03. 03) Click
(서울=연합뉴스) 일제 강점시대인 1936년 열린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의 이름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http://www.olympic.org)에 일본어 발음으로 표기돼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금메달리스트를 검색해 손기정 선생을 찾으면 사진 8장과 함께 뜨는 이름은 일본어 발음인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표기돼 있다. 사진은 IOC 홈페이지 캡처. 2011.3.3 < < IOC 홈페이지 캡처 > >
정말로 그런가 하고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 홈피로 들어가 보았다. 손기정(Sohn Kee-chung)이 아니라,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검색하니 그의 사진이 나온다.
http://www.olympic.org/kitei-son
아, 그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뒤에도 차마 기뻐할 수 없었던, 오히려 나라 잃은 백성의 한과 설움에 시상대에서 눈물을 훔쳐야만 했던 그 날 이후로 벌써 64년이 흘렀고, 그의 조국이 광복을 되찾은 지는 55년이 지났으며 향년 91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뜬 지도 벌써 8년이 더 지났는데... IOC홈피와 전 세계 올림피안의 전당 안에서 그는 여전히 일본인 기테이 손으로 남아있다.
손기정 선생뿐만 아니라, 당시 동메달을 차지한 故 남승룡 선생도 (1912. 11. 23 ~2001. 2. 20) 일본식 이름인 "쇼류 난"으로 여전히 표기가 되어 있다.
故 손기정 선생이 여전히 일본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상황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 거지... 이 문제를 바로잡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도 모자랄 대한체육협회는 다른 식민지 국가들과의 형평성이나 따지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도 베이징 올림픽 공식 웹사이트에 손기정 선생의 프로필이 일본 국적의 Son Kitei로 표기되어 있어서 한 차례 논란이 된 바 있었는데, 2년이 훨씬 더 지나도록 그 동안 나아진 건 없고... 같은 내용의 기사를 2년 뒤에 다시 접해야 하다니...
또 다른 기사 >>
“손기정, IOC에선 아직 ‘기테이 손’이라 표기”
기사 출처: 동아일보 (2011. 03. 03) Click
1970년 광복절인 8월 15일 독일 베를린 올림피아 스타디움. 한국의 한 국회의원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사다리에 올랐다.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 가져온 장비를 꺼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념탑에 새겨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국적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꿨다. 저팬을 떼고 코리아를 새기는 데 5시간이 걸렸다. 워낙 공을 들였기에 경기장 직원들도 모르고 있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해 불법 침입 및 공공재산 파괴 혐의로 체포령까지 내렸으나 그는 이미 독일을 떠난 뒤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끌던 서독 정부는 “국적 변경은 불가능하다”며 저팬으로 환원했다. “정과 끌 등을 다 갖고 갔어요. 가서 보니 생각보다 높아 사다리만 구입했죠. 밤 12시 무렵 시작했는데 어느새 동이 트더군요.”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던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현실에서는 아직 미완성이다. 41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변한 게 없다. 4선 국회의원 출신 박영록 전 의원(89)이 2002년 세상을 뜬 손기정의 국적 회복에 여전히 매달리는 이유다. <중간생략> ....
정계 은퇴 후 2004년부터 4.96m²(1.5평) 남짓한 컨테이너에 살아 청렴 정치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박 전 의원은 “손기정을 떳떳한 한국인으로 만들어야 한이 풀릴 것 같다. 여생의 유일한 목표다. 그래야 손기정도 편히 눈을 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기정 선생과 관련된 지난 글 세 편 소개하며 마무리 >>
#1
독일의 재즈 그룹 "살타첼로"의 리더인 슈테판 뮬러 씨가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출처 Click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두 일본인의 그 표정이라는 것이…그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입니다…정말 불가사의한(아리송한) 사진입니다…왜 그 두 사람은 그런 슬픈 표정을 지으며 시상대에 올라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두 젊은이의 얼굴 표정이란 것이…두 사람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의 한없는 부끄러움과 슬픈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검열하에서 이 기사를 실었던 '동아일보(원문에는 eastasia라고 돼 있음)'는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합니다. . . . .
#2
손기정 선생과 김연아 선수를 연결지어 쓴 미국 뉴욕 타임즈의 2009년 11월 14일 자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서 보면...올림픽 역사학자인 David Wallechinsky가 말한 "이러한 '민족의 자긍심'(national pride)이야말로 김연아와 손기정을 잇는 연결고리"라는 말이 인용되어 나와 있습니다.
Korean Olympic Hero Championed Liberty
기사 해석 출처: 해맑은아찌님 글 Click
다음 2월 밴쿠버에서 열릴 올림픽 피겨 경기에서 그녀는 금메달을 차지할 것으로 유력시되고 있다. 어떤 한국인 여성 스케이터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연아는 아마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옹의 달콤하지만 씁쓸했던 애잔한(bittersweet) 성공 이후로 가장 눈에 띄는 한국인 금메달리스트가 될 것이다. 그때(1936년)는 히틀러와 제시 오웬스(100미터우승자, 미국), 일본에 강점당했던 한반도 시절의 경기다. 손기정 옹은 2시간 29분 19.2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첫 번째 한국인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이름 아래 뛸 수밖에 없었고 ‘손 기테이’라는 일본 이름과 일장기가 올려지는 것과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것을 포디움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손기정 옹은 남한의 내셔널리즘과 애국의 본보기가 된다. 1948년 처음으로독립 국가로 이 나라가 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개회식에서 손기정 옹은 국기의 기수가 되었다. 그는 사망하여 대전의 국립공원에 묻혔고 그의 이야기는 역사 시간을 통하여 아이들에게 교육되고 있다..
“아 손기정 옹 알아요.” 현 월드 챔프 김연아는 금요일 연습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 자세한 것까지는 몰라도 우리나라가 식민지였음에도 올림픽에서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죠. 저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요.” 아마도 지금 김연아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체육인일 것이며 국가대표 축구팀의 주장이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윙어인 박지성보다 더 유명할 것이라고 기자들은 말한다. 한국에서 김연아는 우유로부터 에어컨까지 여러 광고에 출연한다. 금요일에 이 인터뷰를 할 때 한국의 3개 TV 방송국이 마이크를 들이밀고 십여 명의 기자들과 여러 사진사, 카메라맨들이 몰려들었다. 1980년 올림픽에서 미국 하키팀이 소련을 이긴 장소로 유명한 이 링크에는 9개의 김연아 배너가 걸려있다. 하지만 김연아가 그처럼 우아하고 유명하지만 역사 시간에 아직 가르칠 사항은 아니다. 그 차이(역사 시간에 강의할 주제가 되는 것)는 손기정옹 용이다. 손기정은 1935년에 2시간 26분 42초로 세계기록을 세웠지만 1936년 올림픽에 나갈 것인가에 딜레마가 있었다. 한국은 1910년에 일본에 합병되었고 손기정이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일본 올림픽팀의 선수로 나가야하기 때문이었다. 베를린에서 한 때 손기정은 일본이름을 거부했었다. 대신 지속적으로 그의 한국 이름으로 사인했다. 여러 버전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손기정은 그의 사인 옆에 태극기와 한반도 그림을 같이 그렸다고 한다. 그는 2분 여의 격차를 두고 올림픽에서 우승한다. 같은 한국인인 남승룡이 (역시 일본팀으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3위를했다. 일본 국가가 시상대에서 울려퍼지는 동안 두 메달리스트는 그들이 나중에 밝히기를 항의의 표시로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한국인에게는 참 힘든 시기였어요. 손기정 옹은 우리에게 독립의 희망을주었고 우리가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김연아의 다큐를 찍고 있는 한국 메이저 TV 사 SBS 부사장인 33세 문윤석 씨의 말이다. 올림픽 역사가인 David Wallechinsky.에 의하면 레이스 후에 손기정은 일본의 강점(强占)에 대해 잘 알고있었고 그것을 인터뷰시 이야기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는 스포츠라이터들에게는 좀 어두운 이야기였지요.” 데이빗의 말이다. 그래도 손기정은 인터뷰에서 정치적인 힌트를 주었다. “ 사람의 신체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지만 그 다음은 심장과 정신이 대신한다” “The human body can only do so much. Then the heart and spirit must take over.” 이것은 강점(强占)당했던 한국에 국가적 자존심을 세우는 커다란 순간이되었다. 한 일간 신문 ? 동아일보-는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사진의 웃도리에서 일장기를 지워낸다. 데이빗의 책 “올림픽에 관한 완전한 책”에 의하면 이 신문 기사와 관련된 8명이 투옥되고 신문사는 9개월 동안 정간되었다.
1948 올림픽의 기수가 된 40년 후 손기정은 74세로 또 다른 영광의 순간을 맞는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민주국가로 탈바꿈한 한국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손기정은 개회식의 성화를 스타디움으로 봉송한다. 데이빗 왈레친스키는 말한다. “그는 한국의 세계에 대한 커밍아웃의 상징이었어요. 상화를 들고 터널을 통과할 때 모두가 그를 알아보았어요. 그가 누구라고 알려줄 필요가 없었죠. 그저 거대한 함성뿐이었어요. 그는 마치 공중에 날아올랐다가 트랙에 바운스하는 것 같았어요(74세의 손기정 옹이 씩씩하게 봉송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임).” 손기정에게 마지막 영광의 순간이 있었다. 그는 황영조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할 때 관중석에 있었다. 황영조는 탈진해서 결승선을 통과한 후 쓰러졌다.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56년 만에 잇는 승리였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그것은 특별한 기쁨이었는데 황영조가 제친 경쟁자는 다름 아닌 일본의 모리시다 고이치였던 것이다. 황영조는 정치적인 시선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그의 운동화가 일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황영조는 자신의 금메달을 손기정 옹에게 바쳤고 손기정 옹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손기정은 10년을 더 생존했다가 2002년에 사망한다. “김연아와 손기정을 이어주는 것은 많은 다른 이유가 있지만 ‘국가적 자존심’이다.” 왈렌스키의 말이다. “피겨 스케이팅은 겨울 올림픽의 꽃이다. 자신하건대 한국인들은 김연아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며 특별히 여성이기에 더 그렇다. 한국은 이미 양궁 같은 종목을 휩쓸었다. 하지만 양궁은 피겨 스케이팅이 아니다. 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 챔피언은 누구나 알게 된다."
#3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올림픽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직후 시카고 트리뷴/로스앤젤레스에 실린 타임즈의 필립 허시 기자의 글입니다. 여기에서도 손기정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에 얽힌 사연이 짧게 언급되었습니다.
No trips on this night fantastic
출처 Click
이틀 전에 (쇼트 경기 때 조애니 로셰트때문에) 너무나 많은 아픔을 담고 있었던 눈물이 다시 한 번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탄과 경이와 기쁨의 눈물들이었다. 이번에, 한 피겨 스케이터가 금메달을 눈물을 훔쳤는데, 한국의 김연아는 (쇼트와 프리) 양쪽에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고 기립박수를 이끌어내는 저력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부터 L.A.까지 울려 퍼질 올림픽 챔피언의 역사를 잣게 했다.
여러분도 그거 봤습니까? 당신도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까? 퍼시픽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수백 개의 태극기들이 흔들리며 나오는 바람이 여전히 이 퍼시픽 림 스트리트(거리 사이)를 빠르게 통과하고 있다. 만약 이게 (미식)축구 경기였다면, 김연아는 다섯 번의 터치다운으로 이긴 게 될 것이다. 만약 이게 야구였다면, 5회말[5 이닝] 이후 콜드 게임으로 끝난 게 될 것이다.
세계 넘버 원 스케이터에게 쏟아지는 올림픽의 그 모든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김연아는 만치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회전을 했고 날개가 달린 것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오, 그렇다, 그녀는 그녀의 생일 날 (선물)상자에서 금메달이라도 발견한 열아홉 살배기 부천의 소녀처럼 나중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150.06점의 신기록 연기를 마치고, (기뻐서) 소리지르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녀의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눈은 접시처럼 휘둥그레졌다. 보드 너머로, 그녀의 코치인 브라이언 오서는 마치 그가 그 5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한 것처럼 제스쳐를 하면서,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고 주먹으로 펌프질을 했다. "제가 울 거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못했어요."라고 김연아가 나중에 말했다. "솔직히 제가 왜 울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안심이 돼서 그런 걸지도, 어쩌면 제 연기에 제가 만족해서 그런 건지도요." 아니면, 그것은 세계 최고의 무대 위에서 세계 최고의 스케이팅을 했을 때 선수라면 (누구든지 으레) 그런 반응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전 프리-스케이트 세계 최고 기록을 거의 17점이나 경신했고, 결과적으로 (2위와) 어마어마한 23점의 점수 차로 시합에서 우승 차지했는데, 김연아는 그 정도로 잘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선수들의 자심감을 빼앗는) 위협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프리 스케이팅으로 들어서면서, 김연아는 일본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보다 앞서 1위에 올라 있었다. 운명의 장난으로, 목요일의 파이널 그룹에서, 김연아가 아사다 바로 앞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파란 세퀸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쓰레기나 다름없는[말해 봤자 입만 아픈 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김연아는 아주 우아하고 파워풀하고 정확했다. 아사다가 (자신의 연기를 하기 위해) 그녀가 빙판에 들어서기 전에 근본적으로 게임 오버였다[이미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충분히 확실하게도, 비록 아사다가는 김연아가 시도하지 않은 두 개의 트리플 악셀을 완벽하게 착지하긴 했지만, 아사다의 절망은 그녀가 투 풋 랜딩을 하나 하게 이끌었고, 풋워크 동안 거의 넘어질 뻔했으며 원래 트리플로 예정됐던 토 룹은 싱글로 뛰고 마는 원인이 되었다. "중반 쯤 지나서, 저는 제가 끝까지 잘 해내서 강하게 끝마쳐야 한다고 결심했어요."라고 아사다가 말했는데, 그녀는 김연아보다 겨우 20일 늦게 태어났다. 뭐가 됐든, 이 한국 여성이 일본 여자선수들을 근본적으로 잠보니로 밀어버린[정빙한] 셈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올림픽에 관한 의심스러운 사실을 담고 있는 동료 한국인들에게 만족의 수단을 가져다 주었고 말이다.
여러분은 한국이 딴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 금메달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땄는데, 실제로는 일본팀에게 수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이 일본의 지배 하에 있어서 손기정이 손 키테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손기정과 달리) 김연아는 이 메달을, 단 한순간도, (일본의) 어느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있다. 김연아가 포디움에서 활짝 웃는 동안, 2위인 아사다는 처음부터 우거지상이었다. 김연아가 빅토리 랩을 위해 빙상을 (흐르듯이) 떠다니는 동안, 아사다는 (아까와) 똑같이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김연아의) 뒤를 따라갔다.
아사다가, "저는 후회가 돼요[분해요]."라고 말하면서, 패배의 가혹함을 보여준 반면, 김연아는 젊음에 찬 승리의 차분하고 시원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메달 스탠드에서,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실제로 애국가를 (따라) 부르려고 했었다. 미디어 (취재) 구역에서 그녀는, 한 손에는 금메달을 들고, 마치 (그녀가 금메달을 딴 걸) 아무도 믿지 않을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한 손에는 (금메달) 선수 임명장을 들고 있었다. "제가 올림픽에서 우승하다니 믿겨지지 않아요."라고, 마치 (올림픽에서 우승한 걸) 현실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주문을 외우듯이], 대회의 이름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그녀가 말했다.
(지난) 일요일 밤 어머니인 테레세 로셰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캐나다의 스케이터 조애니 로셰트에게 비록 이 대회의 한 부분이 여전히 속해 있기는 하지만, 이번 올림픽은 (엄연히) 김연아의 쇼였으며, 김연아의 순간이었다. <중간 생략>......
여기 나온 그 누구도 김연아를 따라잡은 선수는 절대로 없었으며, 미국 선수들이 (김연아에게) 닿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애쓰다가 (결국) 46년 만에 처음으로 이 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데 실패하는 동안, 김연아는 한국에 첫 피겨 스케이팅 메달을 선사했다. 미국의 미래가 거기에 있다 -- 아카디아의 미라이 나가수(16세)는 강력한 프리 스케이트 연기로 4위에 올랐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것은 한국과 김연아의 차지이며, 김연아는 포디움을 향해 스케이트를 타고 갈 때 "사랑해!"라고 소리치는 한 팬의 말들의 (소나기) 세례를 받았다. 김연아가 우아하고 감정적인 포옹으로 스케이팅 세계를 꽉 끌어안은 날 밤, 그녀는 그 감정을 되돌려 놓았다.
|
출처: Viva la Reina~! 원문보기 글쓴이: 원더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