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게 하소서 / 박영수
갓난아기는 하루에 수백 번을 웃는다고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웃는 일이 점점 줄어가게 마련인가 보다.
오랜만에 목욕탕엘 갔다. 체중이 또 좀 빠진 것을 알았다. 술잔에도 유머 한 자락 담아 돌리던 내가, 코로나로 술도, 웃을 일도 멀어져 버린 때문인 것 같다. 혈압이 높아졌을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니는 병원에서 ‘조심하라’며 약을 바꾸어 준다. 거리를 두고서라도, 만날 사람 만나며 즐겁게 살아가야 하겠다.
내가 우스갯소리를 좋아하게 된 건 중년이후 생겨난 고혈압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천명 고개를 넘어서며 삶의 청량제 같은 수필이 내게로 왔다. ‘영수’란 나의 이름이 받침 뺀 ‘여수’로 불리다가, ‘영원히 수필이나 써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 많던 닉네임들 중에 아직도 지인들이 기억해 주는 하나가 있다. ‘건배의 달인’임을 일컫는 ‘건달’이다. 건달은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지만, 알고 보면 인도에서 음악의 여신 ‘간다르바’를 어원으로 한 종교적 용어이다. 하여 누가 ‘박 건달!’하고 부르면 ‘여수 떠네.’ 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한다.
유머에 얽힌 추억 한 자락 털어놓아 본다. 문화원 시절, 우연한 일로 당시 매스컴에 뜨고 있던 C예술고교 졸업식장엘 간 적이 있다. 이날 초면의 교장선생이 단상 뒷줄에 앉아 있던 나에게 축사를 청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일어서서 여학생들로 가득한 단하를 내려다보다가, 묘한 끼가 발동을 했다. 그럴싸한 퀴즈가 떠올랐던 것이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 다 아시죠?”
‘네’하는 대답이 시큰둥하다.
“퀴즈 하나 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모두 열 글자인데, 이 문장을 네 자로 줄여보는 겁니다.”
손을 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끌 수가 없다. 답을 내놓아야 한다.
“자, ‘인생/예술’ 네 글자, 인생은 짧으니까 ‘인생!’, 예술은 길으니까 ‘예에에~ 수우울~!’ 이게 답입니다.”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여러분은 ‘예에,수울, 고’ 졸업생이십니다. 앞날이 길게 빛이 날 것입니다!”
짧은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기는 듯했다.
세상 일 얄궂다. 기억 저 편에 있던 이날의 축사가 몇 년 후 뜻밖의 사단을 일으켰다. 모처럼 아내와 함께 간 어느 식당에서이다. 식사 주문을 하고 앉아 있을 때 종업원이 다가와 귀엣말로 “문화원장 하던 분이시냐? 저 쪽에서 뵙고 싶다는 분들이 있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라기에 내가 그쪽으로 갔다. 거기 모르는 젊은 여성들이 일어나 손뼉을 쳐 댔다. C예고 출신들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졸업식 때 너무도 인상적이었단다. 맥주 한잔 들고 건배를 외치기도 했으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뜻밖의 문제가 터졌다.
내가 젊은 여성과 친한 듯 보였나보다. 집사람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사실을 밝혀도 풀리지를 않았다. 1년 전,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후유증이 평생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질투심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생전 부부싸움 한번 안하고 살아온 우리 집에 때 아닌 냉전사태가 벌어졌다.
그 사나흘 뒤이던가. 이 평지풍파를 말끔히 가라앉혀줄 손님이 우리 집을 찾아들었다. 청주 옥산면에 사시는 노老부부가 TV화면을 통해 우리 집에 나타났던 것이다. 바로 KBS <인간극장> ‘웃으면 되는 겨’이다. 소를 키우며 사는 닭살부부의 유머 감각과 후덕한 인간미가 닷새 동안 아침마다 아내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학교문턱도 넘어보지 못해 지금도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영감님은 한 번도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고, 마음씨 고운 할머니는 남편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그저 ‘하하하’ 웃어 넘긴다고 털어 놓는다. ‘마누라 등 긁어주는 사람이 나’라며 ‘나는 마누라를 웃길 수 있어 즐겁고, 마누라가 잘도 웃어주어 행복하다’신다. 내가 사는 청주말씨가 이리도 정겨울 수 있을까.
이 웃음천국 같은 ‘인생극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역시 허구로 꾸며내는 드라마 보다 진솔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실화가 더 감동적일 수 있다. 집사람 얼굴이 그 집 할머니처럼 밝아지면서, 뇌의 상처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세상일에는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다.
요즈음 일상화 되고 있는 방콕생활에 때 아닌 트롯 열풍이 불고 있다. 허지만 사람들에게 ‘눈물 꽃’만 피우고 ‘웃음꽃’은 잘 피워주지 않는 것 같다. 어찌 트롯만이 그러랴. 아침부터 즐겁게 노래하는 새들도 ‘운다.’고만 한다. 세계적 오페라에도 <울게 하소서>만 있다. 세익스피어 걸작엔 4대 비극에 5대 희극도 있지 않던가.
해해 웃다가 학, 나자빠지게 하는 ‘해학諧謔’을 ‘백신’에 견줄까. 모든 일 생각하기 나름이고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 풍진 세상에 밝은 웃음을 안겨줄 수 있는 이가 고마운 사람 맞다. 오오, 웃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