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삶의 유산 ‘개혁 정신’
너지 임레, 그의 무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여행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았다. 6월 7일, 부다페스트 시내를 가로질러 차로 한 시간 가까이 달려간, 외곽 시립 묘지의 한 언저리에 있는 너지의 묘는 결코 마자르 영웅의 그것이 아니었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웅장하지도 않았다. 석관 위에 놓여 있는, 한참 지나 시들어버린 몇 송이 꽃과 무덤 앞에 서있는 추모의 종만이 그곳에 누워있는 이의 특별함을 짐작케 할뿐이었다.
너지 임레의 무덤, 그리고 그와 함께 반소 항거에 나섰다가 희생당한 이름 모를 400명을 기리는 비목이 헝가리 기독교 또는 종교개혁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말이 없다.
부다페스트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드물지 않게 눈에 들어오는, 십자가 대신 별을 단 개혁파 교회당 ‘템플롬’이 아니었다. 부더와 페슈트를 가로질러 흐르는 다뉴브강도 아니었다. 그 강의 이편과 저편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색창연한 건물도 아니었고 강 이편과 저편을 가로지르는 이런 저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잘 만들어진 다리들도 아니었다.
그냥, 부다페스트에 왔다면 너지 임레를 찾아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에 이끌리어 일정에도, 지도에도 없는 시립 묘지 너지 임레를 물어 물어 찾아갔다.
너지 임레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 헝가리 수상으로 있다가 개혁적 성향 때문에 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1956년 헝가리 의거와 함께 다시 수상이 됐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56년의 헝가리 반소 봉기를 군대로 짓밟은 소련은 1958년 그를 처형했다. 1989년 헝가리에 개혁의 열풍이 다시 불기 전까지 시립 묘지 그의 무덤은 접근 금지 구역이었다.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에서는 너지 임레 수상의 재매장식이 거행됐다. 30만 헝가리 인민이 모여들었다. 너지 임레와 30만 인민. 그것으로 이날의 의식이 나타내려는 상징은 분명했다. 저항과 개혁,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영웅광장에서 청년 빅토르 오르반은 자유 총선과 소련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연설을 하여 갈채를 받았다. 오르반은 뒤에 헝가리 수상이 되었다.
2001년 여름에 찾은 영웅광장에는 1956년 반소 봉기를 진압한 소련군의 탱크의 궤적도, 그 소련군 총칼에 흘려 광장을 물들였던 민중의 혈흔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가까이 1989년 10월 16일 이곳에서 거행된 너지 임레의 재매장 의식의 장엄도 민주화의 열기도 이제는 없었다.
마자르 영웅 설화에 등장하는 천사상과 그들의 선조 마자르 영웅들의 기마상이 응시하는 광장 너머 저쪽 대로에는 외국 대사관들이 늘어서 있었고 광장을 끼고 도는 사통팔달 거리들은 광장으로 몰려드는 외국 관광객들과 그들을 실어 나르는 관광 버스들로 흥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웅광장과 부다페스트의 대기를, 헝가리 민중들의 눈물과 피의 값으로 산 해방과 자유의 공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97년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가 열렸으며 ‘개혁주의의 로마’로 불리는 데브레첸이라는 도시가 있는 나라, 지금도 개혁파(깔뱅파) 그리스도인이 인구의 21%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시골 구석구석까지 십자가 대신 별을 세운 개혁파 교회당이 있는 나라, 모국을 떠나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도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견고히 이어가는 이민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나라. 헝가리가 보유하고 있다는 이러한 ‘기독교적’, 더 구체적으로는 ‘개혁주의적’이라고들 하는 단서들을 챙겨들고 향한 부다페스트 여행이지만, 이 도시가 나를 더 강렬하게 끌어당긴 것은 헝가리의 역사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저 꿈틀거리는 저항의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너지 임레를 찾아야 했던 ‘어떤 의무감’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 헝가리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아니 차라리 그들의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저항과 개혁의 정신은 신학적 사변이 이끈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치이고 치받으며 몸뚱아리로 빚어낸, 삶 바로 그것이었다.
헝가리의 역사에 교회가 있었고 교회의 역사에 인민이 있었다. 헝가리와 헝가리 교회의 역사는 따로 가지 않았던 것이다. 헝가리 교회는 교인의 교회이기에 앞서 헝가리 인민의 교회였던 것이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헝가리는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헝가리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속 대지주들과 결탁하여 농민과 농노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수탈하는 대 귀족 계급에 불과했다.
그 시절 헝가리 인민들은 주교가 대성당에서 집전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미사를 거부하고 헝가리 방방곡곡을 돌며 깔뱅파 설교자들이 마자르 말로 선포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교도 투르크에 패전하여 하 세월 그들의 압제에 시달리게 된 것은 부패하고 타락한 교권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교자와 회중이 그렇게 모국어로 연대하여 세워나간 개혁파 교회는 그 자체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압제에 맞서는 저항이자, 개혁을 갈구하는 몸부림이었다. 16세기의 마지막 10년에 이르러 헝가리 인민의 80∼90%가 개혁파에 속하게 된 역사적 사실은 그렇게 가능했던 것이다.
헝가리는 150년간의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에서 벗어났지만 이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간섭을 받게 되고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일당 독재 공산화는 이 나라에 잠시도 숨쉴 틈을 허락지 않았다. 이러한 질곡의 역사는 헝가리 인민과 교회로 하여금 압제에 대한 결코 소멸될 수 없는 마음 속 깊숙히 저항의 심층을 차곡차곡 다져 올리게 했다. 1956년 너지 임레를 선봉으로 일어선 반소민중 봉기로부터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해 1989년 6월 16일 너지 임레를 재매장하고 그해 10월 23일 헝가리공화국을 선포함으로 마침내 저 미완의 ‘1956년 10월 혁명’을 마무리한 1989년의 민주화 운동까지, 헝가리의 저항 정신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헝가리와 헝가리 개혁교회를 따로 놓고 생각하는, 결코 개혁주의 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없는 좁다란 이원론은 너지 임레의 묘지 앞에서, 그리고 저항의 진원지 영웅광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너지 임레의 재매장식에서 소련 군대 철수를 주장했던 그 청년, 지금은 수상이 된 빅토르 오르반이 개혁파 교인이라는 솔깃한 사실도 이제 더 이상 호재가 못되었다. 그는 개혁파 교인이기 이전에 헝가리 인민으로 영웅광장에 갔을 것이며, 헝가리 개혁파 교인에 앞서 헝가리의 젊은이로서 ‘소련 군대는 물러가라’ 외쳤을 것이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나 확인한 마자르 후예의 저항 정신은 부패하고 불의한 교회와 세속의 압제에 저항하고 바른 교회와 사회를 세우고자 했던 개혁파 선진들의 정신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체였다. 마자르 후예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체의 압제에 저항했던 것이다.
‘마자로르짜기 리포르마투스 에기하츠’, 곧 헝가리 개혁교회의 문장에는 로마서 8장 31절이 적혀 있다. 두려움 없이 세상의 권세에 항거할 수 있었던 그 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역설의 역사·역사의 역설
역사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역설의 역사라고 해야 할까? 한 민족의 역사에 깊이 얽혀 있는 교회는 또 다른 역설의 함정에 빠져든다. 신학과 신앙이 역사와 삶에 침잠하여 때로는 감흥 없는 일상이 되고 생명 없는 화석이 된다는 이 역설. 그래서 교회의 역사는 현실의 역사이자 현실을 넘어선 초월의 역사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 아래서 한국 교회는 겨레와 질곡을 같이 했다. 신앙 공동체가 민족 공동체와 역사를 함께 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 교회는 암담한 역사를 초월한-때로는 ‘외면’이나 ‘도피’라고 비난을 받기도 한-종말의 신앙, 근본의 신앙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헝가리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선택 선교사의 두 가지 상반된 지적이 다시 떠오른다. “전통에서는 한국 교회보다 월등히 앞서지만 그만큼 형식화되고 명목화된 것이 헝가리 개혁교회의 신앙이다. 한국 교회는 이들에게 복음의 열정을 심어주는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주는 헝가리 개혁 교회를 한국 교회는 본받아야 한다.”
이렇게 헝가리 개혁교회의 역사는 한국 개혁교회와 비슷하고도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제 100년을 넘긴 우리는 그들에게 열정의 신앙을 들고 선교하러 들어갔다. 400년 개혁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들에게. 역사는 또 그렇게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