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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일 눅 6:1~11 본질을 붙잡으라. 신년감사주일 예산수정교회
오늘은 2022년 새해 첫주일 신년감사주일이다. 2021년을 뒤로 보내고 새해 첫주일을 맞이한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즉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도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고 한다. 옛사람을 벗어버려면 나의 고정관념, 고집, 전통이라는 비본질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로 돌아와야 한다. 오늘 본문은 율법의 본질을 꿰뚫고 실천하는 예수님과 율법의 껍데기인 비본질을 붙들고 있는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논쟁을 다루고 있다.
1. 본질은 하나님 말씀이다(1~11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그 이유는 허기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위가 추수와 타작을 금지하는 ‘미쉬나’를 어겼다고 비난한다(2절). 그들이 중요시한 것은 미쉬나(유대인의 구전법과 전통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은 모세의 율법에 세세한 규정을 덧붙이고, 그 율법을 해석한 것이다.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39가지로 해석하는 데,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는 것을 추수로, 껍질을 까기 위해 비빈 것을 탈곡행위라고 지적했다. 비본질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23:24~25에서는 이웃의 포도원에 가서 그릇에 담아오지 않는 상태에서 포도를 따먹는 것과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않고 이삭은 따는 정도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로 이해되었다. 또한 신23:25에서 율법은 농부가 가난한 사람이나 나그네가 먹을 수 있도록 자신의 밭을 전부 추수하지 말고 남겨둘 것을 명하고 있다.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비본질에 묶여 있지 않게 된다.
2. 본질은 사람의 생명이다(6~11절)
‘안식일의 주인’(5절)이신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신다(10절). 여전히 비본질에 묶여 있던 바리새인들은 이 행동에 극심한 분노를 드러낸다(11절). 예수님은 고발할 증거를 찾고 있는 그들 앞에서 당당한 행동을 한다. 손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시고, 바리새인들에게 무엇이 안식일에 합당한 지를 묻는다(8,9절).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요구에 우선한다. 그들의 전통은 안식일에는 선을 행해서도, 생명을 살리는 일도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미쉬나는 하나님을 고리타분하고 앞뒤가 꽉꽉 맞힌 분으로 만들고 엄격한 재판관의 이미지로 고정시킨다. 마치 사람이 객이고 안식일이 주인인듯한 인상을 준다. 비본질이 본질을 압박한다. 그러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날이다. 안식일의 본질은 사람의 생명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사람의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병도 고치시고, 배고픔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셨지만,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표를 사람들에게 생명, 즉 영생을 주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그분이 생명을 주실 수 있는가? 그 분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요14:6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 요10:10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모든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을 믿게 될 때 생명을 얻는다는 것에 있다. 인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후 인간이 스스로 영생할 수 있는 길은 봉쇄되었다. 이 영생은 육체적인 영생과 영적인 영생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은 영적인 영생과 육체적인 영생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인데요. 인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인간은 이 땅에서 영생을 맛보고 살다가 장차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의 몸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죽음이 이길수 없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1;2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비본질인 구약의 율법과 그것을 재해석한 미쉬나를 믿고 붙들고 살아갑니다. 생명을 등한시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본질인 복음되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과 그 분의 말씀을 붙잡고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비본질에 매여서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본질인 예수님을 붙잡고 생명을 살리는 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3. 본질을 붙잡으라
예수님은 성경에서 늘 본질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신다. 마16:16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참으로 멋진 고백입니다. 그 후 구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책망하신다. 그 책망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생각인 ‘그리마옵소서’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충성이라는 비본질에 사로잡혀 있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사탄의 생각임을 지적해준다. 또한 예수님은 눅12:4~5 말씀에 몸을 죽이나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비본질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본질이다. 헌금도 그렇다. 고후9:1~5에 보면 바울이 연보의 본질을 말한다. 자원하여 준비하고 기쁨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축복으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교훈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꾸 비본질을 붙든다. 억지로 하고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체면으로 하며, 준비없이 한다. 그리고 기쁨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과 인색함으로 한다. 이처럼 헌금에 있어서도 비본질을 붙들고 바리새인처럼 드려서는 안된다. 헌금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선하게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다.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마 7:21~23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선지자 노릇도 하고 병고치고 귀신도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보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한다. 그러면 본질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신앙은 화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해도 묵묵히 말씀의 기초에 뿌리를 내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에 인생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왜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본성적으로 형식이나 껍데기나 외모만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내가 새 왕을 선택하였으니 가서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장남 엘리압을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겉모습이나 키를 보지 마라. 나는 그를 이미 버렸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여호와는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삼상16: 16~17절). 사무엘이 실패했습니다. 사무엘의 한계입니다. 겉모습, 외모라고 번역된 원래 히브리어의 뜻은 ‘눈빛’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사실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언행, 눈빛을 보고 평가합니다.
사람의 눈빛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나오고, 그 사람의 생각이 나옵니다. 눈에 초점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빛을 보면 얼마나 성실하게 사는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생활을 통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위기가 올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맞서 싸웠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어주셨고, 교사가 되어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세우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은 때때로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끊임없는 훈련과 고난,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눈빛을 보고 다른 사람을 알 수 있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눈빛으로는 마음의 중심은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막내아들 다윗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새에게 막내아들 다윗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막내라는 의미는 보잘것없는 존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존재라는 의미가 담긴 용어입니다. 장남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다윗은 가정에서 주목 받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새도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도 실패했고, 아버지 이새도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홀로 양을 치며 베들레헴 광야에서 아버지가 하라고 하는 일에 순종했습니다. 단조롭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을 꾸준히 해내면서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주어집니다. 고난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우리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평안한 환경 속에서는 절대 마음의 중심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훈련속에서 연단되고 성장할 때 사건이나 사람을 볼 때 비본질이 아니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시면서 말씀이라는 본질에 집중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