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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2. 17:41
고방[6262]추사와 과지초당(瓜地草堂)
| 추사 김정희와 과지초당(瓜地草堂) |
박영숙
1. 생 애
추사 김정희는 1786(정조 10)에 태어나 1856년(철종 7)에 졸하였다. 자는 원춘(元春), 본관은 경주, 호는 추사(秋史)이다. 그 외에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농장인(農丈人), 승설도인(勝雪道人), 과파(果坡), 노과(老果), 추재(秋齋) 등 300여 개가 넘는다.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말의 성리학자로 고려에 충절을 지키고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은거하던 중 태종이 형조 판서로 부르자 서울로 오는 도중에 정몽주의 묘소에 이르러 자결함으로써 절의를 빛낸 김자수(金自粹)를 중시조로 한다.
그로부터 5대를 내려와 서흥부사를 지낸 연(堧)이 가야산(伽倻山) 취령봉(鷲嶺峯) 아래에 터를 잡는데, 이곳이 바로 자손 대대로 살게 되는 한다리이다. 이에 연의 주손인 적(積)은 안기 찰방으로 있다가 광해군 때 폐모 사건을 계기로 가족과 함께 한다리로 내려와 은둔한다. 적은 슬하에 홍익(弘翼), 홍량(弘亮), 홍필(弘弼), 홍욱(弘郁) 4명의 아들을 두는데, 막내 홍욱이 황해감사로 재직시에 한재(旱災)로 인한 응지상소(應旨上疏)에서 강빈(姜嬪)의 원옥(寃獄)을 거론하였다가 장살된다. 당시에 강빈의 원옥은 사림들이 매우 원통하게 여기고 있던 터라 이 사건으로 인하여 홍옥은 사림의 추앙을 한몸에 받는 명사가 되니, 나중에는 사림의 종장인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적극적인 주청으로 효종 10년에 복관작 되고 숙종 44년에는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다.
그로부터 가문이 융성하여 홍욱의 장증손 홍경(興慶)은 영의정을 지내고, 그 말자(末子) 한신(漢藎)은 영조의 장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왕실의 내척이 되니, 이가 바로 추사가 봉사손으로서 대를 잇게 되는 월성위(月城尉)이다.
그러나 월성위는 후사 없이 39세로 요절하고, 장형 한정(漢楨)의 3자 이주(頤柱)가 출계하여 노영(魯永), 노성(魯成), 노명(魯明) 노경(魯敬) 4명의 아들을 두니, 4자인 노경이 추사의 생부이다.
월성위가의 적통인 노영에게 후사가 없으므로 추사는 백부 노영에게로 출계하여 월성위가의 적통을 잇게 된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추사는 왕실과 혼인 관계가 있는 노론의 명문 출신으로서, 융성한 가문을 배경으로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노영에게로 출계 한다. 어머니 기계유씨는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낸 유준주(兪駿柱)의 딸이다.
[화순공주] ▶추사 김정희 증조모
수학 과정을 살펴보면, 백부 노영은 북학의 선구자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재당질서(再堂姪婿)로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종유 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성절진하(聖節陳賀)겸 사은사의 행차에 참여하여 박제가와 접촉하는 기회를 갖는다. 이때 완당의 나이 5세인데, 북학에 경도되어 있던 백부의 영향으로 완당은 일찍부터 청나라의 문명에 관심을 갖는다. 더구나 노영은 완당의 교육을 박제가에게 맡기게 되니, 그로부터 완당은 20세까지 북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박제가의 문하로 들어가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
24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동지부사인 생부 노경을 수행하여 연경에 가게 된다. 이에 스승을 통해 말로만 듣던 청나라의 학문을 직접 접할 기회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연경 학계의 거두라 할 수 있는 옹방강, 완원과 사제지간을 맺어 그들의 학문을 전수받고, 당시 연경 학계의 이름난 학자들과도 교유하게 된다.
당시 47세인 완원은 자신의 경학관, 예술관, 금석고증의 방법론을 전수하면서 자신의 저서인 《경적찬고》 106권과 《연경실문집6권, 《십삼경주소교감기》 245권을 완당에게 기증하니, 이때에 별호를 완당(阮堂)이라고 짓는다. 78세의 옹방강으로부터는 금석 고증, 서화 감식, 서법 원류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다. 또한 옹방강은 추사가 귀국한 후에도 제자 섭지선(葉志詵)을 통해 완당의 경학질의(經學質疑)에 답함으로써 자신의 경학관을 피력하는데, 그의 경학관은 훈고(訓詁)와 의리(義理)를 동시에 중시하는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으로서 추사가 이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이 바로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다.
이 실사구시설은 추사가 31세 때 지은 것으로 옹방강의 경학관에 완원의 철저한 고증학적인 경학관을 합쳐 종합 정리한 것으로 새로운 경학관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경에서 귀국한 후에 완당은 중국의 학자들과 지속적으로 서신을 왕래하며 정보를 얻고 학문을 토론하니, 추사의 학문은 가히 국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추사는 1819년(순조 19)에 문과에 급제하고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생부 김노경은 유배되고, 추사도 파직된다.
[추사선생 초상] ▶ (제자 소치 허련 그림)
1836년에는 병조 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고, 다시 윤상도의 옥사가 거론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된다. 헌종 말년에 방환되나 1851년에는 권돈인의 진종조천예론(眞宗祧遷禮論)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된다. 2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다시 관로에 나가지 않고 과천의 봉은사에 기거하며 학문에 몰두한다.
2. 학문과 서예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서예는 실학과 추사체로 점철된다. 학문은 우리나라 전역의 비(碑)를 고증하고 학문의 실체를 따지는 등의 금석고증(金石考證)과 실사구시정신(實事求是情神)을 들 수 있다. 서예는 비(碑)와 첩(帖)을 종합하여 독자적으로 해석한 예서체(隸書體) 및 예서의 필법에 바탕하여 글씨를 쓴 듯한 불작난(不作蘭)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청인(淸人) 완원(阮元)과 사제의 의리를 맺고 고증학, 금석학 등의 학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러한 완원과의 인연으로 호를 완당(阮堂)이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의 실학과 청나라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 금석학, 등에 일가를 이루었고 법고(法古)하여 독창적인 추사체(秋史體)를 만들었다.
1) 학 문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그는 연경에서 옹방강으로부터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얻었다. 그리고 그의 보고(寶庫)에서 <한중태수축군개통포사도비(漢中太守鄐君開通褒斜道碑)>ㆍ<宋척화악묘비(宋拓華岳墓碑)>ㆍ<당각본공자묘당비(當刻本孔子廟堂碑)> 등 금석ㆍ서화 진적(眞蹟)을 보게 되었고, 금석고증과 서화감식 및 서예원류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완원, 주학년(朱鶴年), 금용(金勇), 옹수곤(翁樹崑), 유화동(劉華東) 등과 교유하였으며, 환국 입조(立朝) 이후에도 중국의 명사들과 교류를 지속하였다. 때문에 그의 학문과 서예관 형성에 있어서 특히 옹방강, 완원의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희는 옹방강과 완원을 경모(敬慕)하고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받지만 그들의 학문관을 답습하지만은 않았다.
불녕은 옹방강에게 습숙한 자이지만 실로 그렇다 해서 다 곡감영종(曲循影從)하지는 않으며, 자못 이동(異同)이 있는데 그 크게 다르고 감히 구동(苟同)하지 않은 것은 『서경(書經)』의 금고문(今古文)에 대한 일입니다. 더구나 능정감(凌廷堪)의 『예경석례(禮經釋例)』같은 것은 담옹(覃翁)이 허여하지 않는 바이나 저는 기꺼이 읽고 있으며, 혜동(惠棟)과 대진(戴震)의 책들도 보기를 좋아합니다. 오늘날 담설(覃說)을 주장하는 자로 논하게 한다면 반드시 담옹의 경술(經術)을 혜동, 대진 제공(諸公)의 위에 둘 것이나 저는 실로 함부로 가벼이 평하지도 않으며, 담옹에게 사사로움을 갖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른바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을 박종(博綜)한다”함은 대개(大槪)를 든 것이며, 만약 또 이가(二家)에 그치고 말 따름이라면 어찌 그것을 ‘박종’이라 하겠습니까?
“마융과 정현을 박종한다[博綜鄭玄]”는 정신은 원래 옹방강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김정희에게 있어서 옹방강 역시 ‘박종마정’의 한 대상으로 상대화되고 있다. 그는 옹방강, 단옥재, 유봉록, 혜동, 대진의 설이 서로 다른 데 대해 “이는 진실로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서서히 연구해서 천추의 평정을 기다릴 일이며, 오늘의 시비로써 그 위아래를 등제(等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즉 옹방강, 단옥재, 유봉록의 학문이 모두 옛것을 보존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옹방강은 옛것을 보존하되 얽매이지 않는 반면 단옥재와 유봉록은 옛것을 보존하되 옛것에 얽매인다고 보았다. 그러나 후학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한 입장을 지지하여 결론을 내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자의 입장을 반성적으로 검토하여 그 실(實)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견지한다. 이처럼 김정희는 어느 한 학설을 절대적 가치로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설을 상대적으로 검토하여 그 내실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적 성장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주체의식은 평심정기(平心靜氣)·박학(博學)·독행(篤行) 한다는 실사구시정신의 발로이다.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ㆍ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ㆍ조인영(趙寅永)ㆍ권돈인ㆍ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북한산 비봉에 있을 때 진흥왕순수비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2) 서 예
김정희 서예의 근본정신은 존고(尊古)이다. 존고는 복고(復古)가 아닌 박고(博古)이며 니고(泥古)가 아닌 상고(尙古)의 의미로 이른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다. 따라서 호고(好古)하되 가의처(可議處)를 찾아 새로운 옛것에 존고(尊古)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존고적 태도는 옛것을 투득(透得)함에 문호를 초월하여 개방적이고 종합적인 객관성을 지니기 위한 것이다.
김정희는 서예학이 미약했던 당시 상황에서 서예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글씨의 원류를 터득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는데, 24세에 중국 연경에 들어가 여러 저명한 석학들을 뵙고 그 서론을 들었다. 발등법을 입문하는 제일의로 하여 지법, 필법, 묵법과 분행포백하는 법과 戈(과), 波(파), 점획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던 바와는 크게 달랐다. 漢·魏 이하의 금석문자는 수천종이 되는 데 종요나 삭정 이전으로 거슬러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北碑를 많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비로소 그 처음부터 변천되어 내려온 원류의 시작되는 바를 알게 되었다.
김정희는 서예의 원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비(北碑)의 금석문자를 학습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한위(漢魏) 이하의 금석문은 수천종이 되기 때문에 실사고증(實事考證)을 통해야만 서의 원류와 그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예를 원류를 예서(隸書)로 보고 그 시기를 한말과 위진사이로 보았다.
서예는 변천하여 그 유파가 모두 뒤섞이어 그 근원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옛 것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대개 예자(隸字) 이후로 변하여 해서·행서·초서가 되었는데 그 전이는 모두 한말과 위진 사이에 있었다.
김정희는 서예의 원류를 예서(隸書)로 보았다. 예서가 변하여 해서·행서·초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예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서는 서예의 조가(祖家)이다. 만일 서예에 유심(留心)하고자 한다면 예서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예법은 반드시 방경고졸(方勁古拙)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졸처(拙處)는 또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서예에 유심(留心)하고자 한다면 서예의 조가인 예서를 학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서는 방경고졸(方勁古拙)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므로 그 졸처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졸처는 서예가 단순히 형사 위주가 아닌 주관적 사상성인 문자기(文字氣)와 학덕을 갖춘 이념의 미를 표현할 수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졸처는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 김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서는 대개 미끈한 자태나 시정(市井)의 기풍을 걸러내야 한다. 또한 예서 쓰는 법은 흉중에 청고하고 고아한 뜻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다. 흉중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한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않으면 팔뚝 아래의 손끝에서 발현될 수 없으니 심상(尋常)한 해서와는 비교할 수 없다. 모름지기 흉중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장본(張本)이 되며, 예서 쓰는 법의 신결(神訣)로 삼는다.
예법(隷法)은 서(書)의 祖宗이므로 졸처를 으뜸으로 삼아 시기(市氣)와 속기를 벗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과 학덕으로써 중(中)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춘 후 청아한 뜻이 손끝에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결(神訣)이라 보았다. 즉 금석서예의 방경고졸한 경계는 단순히 필력과 필세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고에 바탕한 청고고아한 지기(志氣)와 필의(筆意)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문자향 서권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문자향 서권기는 문자와 서권의 향기라는 뜻으로, 곧 ‘문장과 학문’에 의한 유아(儒雅)를 이르는 것이다. 또한 저속한 화수(畫手)와 같은 속장(俗匠)에서 벗어나는 묘체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서품이나 화품이 다 한 등급을 뛰어나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다 속장(俗匠) 마계(魔界)일 뿐이다.
김정희는 ‘의재필선(意在筆先)’을 말한다. 서예는 형사(形寫)를 넘어 그 참뜻을 파악하고 자신의 사색(思索)을 통해 얻어지는 주관적 소양에 의하여 서품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그는 흉중에 학문에 기초한 ‘문자향 서권기’의 지성을 토대로 청고 고아한 뜻을 품은 군자 선비만이 속기(俗技)를 벗어나 순연한 작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서예에서 실사구시설에 기초한 존고를 중시하며, ‘문자향 서권기’를 갖춘 청고고아한 뜻을 흉중에 두었을 때 비로소 순연한 작품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추사체(秋史體)는 이러한 사상과 서예미학이 심미적 토대가 되어 탄생된 독창적인 결과물이다.
| 과천 추사박물관 |
과천시에 위치한 추사박물관은 조선후기 실학자 겸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박물관이다. 과천시가 이곳에 추사박물관을 세운 이유는 추사가 말년 4년간 과지초당에서 마지막 학문과 예술혼을 불태운 곳이기 때문이다. 추사박물관은 총 3층으로 1층은 추사의 학예, 2층은 추사의 생애, 지하 1층은 후지츠카 기증실과 체험실, 강좌실 등이 있다. 야외에는 추사가 4년간 기거했던 과지초당이 있다. 추사박물관은 세간에 추사가 명필 서예가로만 알려진 것에 가려진 그의 깊은 학문과 다양한 작품세계를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과천 추사박물관(외경)
추사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
세한도(歲寒圖)
국보 180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크기는 23cm*69.2cm)
이 그림은 추사가 제주도 대정읍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갖다준 것에 감명해 그려준 그림이라고 전한다. 사실 그림을 보면, 원근법도 맞지 않으며, 잘 그렸다고 볼 수는 없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하다. 사의란,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이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흘러흘러 일제시대에 이르러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매니아 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고 난 석달 뒤인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작품이다.
[제주도 유배시절 그림] ▶ 세한도(국보 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한도] 그림 부분 ▶ “長毋相忘”
[세한도] 발문 ▶ “歲寒然後 知松栢後凋”
[세한도 발문 번역]
지난해에 그대가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 주고, 올해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 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잇속을 좇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迫切)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죽로지실
竹爐之室(죽로지실) ▶예산 추사고태 사랑채 현판
추사가 쓴 선운사 백파율사비(白波律師碑)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조선 시대 스님인 백파율사(白波律師) 긍선(1767~1852)을 기리기 위해 1858년에 세운 비석이다. 백파율사와 절친인 추사 김정희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백파율사는 고창 무장 출신으로,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10대손이다. 12세에 선운사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조선 후기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불교를 중흥하려던 화엄종의 대가이다. 백파가 60세 때(1826년) 선종 종파들의 특징을 자신의 논리로 밝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짓자,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와 그와 친밀하고 불교에도 박식했던 추사는 편지로 백파와 논쟁하였다. 특히 1843년에 추사는 〈백파망증 15조〉에서 15가지를 근거로 그의 논지를 신랄한 표현으로 비판하였다. 이후 이들의 제자들이 서로 이어가며 100여 년 동안 논쟁하였다. 백파율사가 입적한 지 3년 뒤인 1855년 그 제자들의 부탁에 추사는 비문을 써주었다. 비문은 백파율사가 입적한 순창의 영구산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3년 후인 1858년 백파가 출가한 선운사로 보내져 지금의 백파율사비가 세워졌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몸돌, 머리돌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높이는 2.36m, 몸돌 높이 1.4m이다. 야외에 있던 비가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2006년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추사체] ▶고창 선운사 백파율사비
추사 생애 최후의 작 〈板殿〉
1852년 10월 9일부터 추사는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지내다가 1856년 10월 10일 향년 71세로 생(生)을 마쳤다. 1856년 10월 서울 봉은사 영기 스님은 화엄경 판이 완성되자 경판전을 짓고 편액을 추사에게 부탁했다. 추사는 병든 몸이지만 혼신의 기운으로 ‘板殿’(판전) 두 글자를 썼다. 세로 65㎝ 큰 글씨이다. 그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봉은사의 ‘板殿’ 글씨는 죽을 힘을 다해서 쓴 추사 최후의 작품이다. “七十一果病中作” 71세 과천에서 병 중에 쓰다.
[서울 봉은사 화엄경 경판전 현판] ▶“七十一果病中作”
| 과지초당(瓜地草堂) |
추사 선생이 과천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생부 유당 김노경(1766~1837)이 주암동에 과지초당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과지초당은 1824년 청계산 옥녀봉 아래 돌무께(현 주암동)에 마련한 일종의 별장이다. 이는 당시 청나라 학자 등전밀(1795~1870)에게 보낸 김노경의 세 번째 편지로 확인된다.
“저는 노쇠한 몸에 병이 찾아들어 의지가 갈수록 약화되는데 직무는 여전히 번잡해서 날마다 문서에 파묻혀 있습니다. 요사이 서울 가까운 곳에 집터를 구해서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자못 정원과 연못의 풍모를 갖췄습니다.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구축해서 ‘과지초당’ 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봄이나 가을 휴가가 날 때 적당한 날을 가려 찾아가 지내면 작은 아취를 느낄만해서 자못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 합니다.(1824.11.20.)”라고 하였다.
과지초당은 정원과 숲이 빼어나고, 연못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추사 가문의 절정의 역량을 상징하는 곳으로,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다고 하여 청관산옥(靑冠山屋)으로도 불리웠다. 1837년(현종3)에 김노경이 별세하자 추사는 부친의 묘역을 과지초당 인근 옥녀봉 중턱 검단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그 후 과천을 자주 찾아 과지초당에서 보내는 시일이 늘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 및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철종3) 8월 이후 1856년 10월 10일 서거하기까지 말년 4년간을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는〈가을날 과지초당에 다시 오다(秋日重到瓜地草堂)〉라는 추사의 시를 통해 확인된다.
出門秋正好 문을 나니 가을이 정히 좋은데
携衲更堪憐 중을 끌어 다시금 어여쁘다네
款款三峯色 정겨움 내보이는 삼봉의 빛은
依依五載前 가물가물 다섯 해 이전이로세
靑苔仍屋老 푸른 이끼 낡은 집에 그대로 있고
赤葉漸林姸 붉은 잎은 수풀에 물들어 곱네
飄泊西東久 동서로 떠돈 적이 하도 오래라
山中銷暮煙 산 속에 저문 연기 잠기어 있네
이는 추사가 유배을 마치고 과지초당에 돌아온 추사 선생의 심정을 표현한 시이다. 과천시는 과지초당 관련 조사를 벌여 1996년 6월 「과천관련 추사 관련 유적 조사 보고서」를 발간하였고, 2007년 11월 과지초당과 독우물을 복원하였다. 2011년 5월 추사박물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2013년 5월 추사박물관을 준공하였다. 추사박물관은 2013년 6월 3일 개관하였다.
과지초당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경기도 과천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나, 남양주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추사박물관에 소장 중인『추사필담첩』[175장]의 과지초당 관련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과 청나라 문인 유식이 나눈 필담에 과지초당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임하여 있는 현재의 수락산 자락 아래라고 묘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김노경은 “몇 년 전 나라 수도 동문 밖 30리 수락산 기슭에 작은 농장을 구하였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선현 매월당 김시습 공이 은거하던 곳입니다. 좌우에 돌봉우리가 연꽃처럼 마주하고 가운데 작은 연못이 있으며 그 연못가에 삼간초옥을 짓고 ‘과지초당’이라 이름하고 약간의 서책을 구비하였습니다.[[數年前始占小庄於國東門外三十里水落山下, 卽小邦先賢梅月堂金公時習隱居之地. 左右石峯對 峙如芙蓉 中有小塘 塘上築三間草屋 名瓜地草堂 藏書若干卷]”라고 하였다.
과지초당 안내판
와당(瓦堂)으로 다시 지은 과지초당
날렵한 과지초당의 마루턱에 앉아
[국제퇴계학연구회]
과지초당 우측 두 기둥에 주련이 있다. 오이 나물을 좋아하고, 가족의 화목하고 따뜻한 삶을 노래하고 있다.
大烹豆腐瓜薑菜 (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녀손)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부부, 아들딸, 손자손녀와의 만남이다
유배 등 각박한 삶속에 범상한 생활과 가족에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고독한 노학자의 말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소박한 나물 밥상과 가족의 화목함, 늘그막 노인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요 행복이 아닐까.
과지초당 누마루 간담회
[국제퇴계학연구회] ▶ 과지초당 누마루 간담회
《추사필담첩》에 따르면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말한 과지초당이 경기도 남양주 수락산일 가능성도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과지초당은 2007년 과천시에서 복원하였으며, 현재 추사박물관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
[출처] [2025] 경기서부 유적지(儒蹟地)(8) 추사 김정희 / 과지초당|작성자 백 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