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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수원] 비밀은 선물이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사도 14, 5 - 18
† 복음 : 요한 14, 21 - 26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장래를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소녀 시절에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신비
체험을 모아 책으로 남긴 그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가타리나
성녀는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 바오로가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자, 사람들은
바오로를 헤르메스 신으로, 바르나바를 제우스 신으로 여겼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은 한낱 인간일 따름이며
모든 힘은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선포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통하여 이미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유다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오해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당신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저의 부모님은 식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식당에서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 것이 무척 싫었습니다. 손님이 한창 붐빌
때에는 텔레비전도 맘 편히 보지 못한 채 나가서 그릇을 치우고,
콩나물을 다듬거나 마늘을 빻아야 했습니다. 저희 집이 식당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데다가 친구들이 노는 시간에 일을 하려니
억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일한 것이 아니면서도
철없던 그때 저의 마음은 그러하였습니다.
철이 들면서 조금씩 나아지다가 특히 군대에 가서는 부모님의
처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입고 싶고 쉬고 싶은 것 다
참아 가며 매일 식당 일에 매달리며 고생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더 이상 부모님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식당 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부끄럽게 생각한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뒤로는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신학생이 되어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부모님은 제게 일을 잘 시키지도 않았지만,
저는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일을 도와 드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아니,
부모님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지 못한 데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자연스럽게 지켜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명을
잘 지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에 얽매인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내 말을 지켜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요한 14,21-26
내 말을 지켜라.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
(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비밀은 선물이다
2013년 다해 4월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복음 : 요한 14,21-26
< 비밀은 선물이다 >
세간에 화제가 됐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2010년 아내 엘린
노르데그렌과 이혼할 당시 우즈의 외도에 의한 이혼으로
이혼합의금으로 5억 달러(5200억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준 이유는 외도와 불륜에 대한 책임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외도에 대해 침묵해준다는 대가라고
합니다. 노르데그렌은 이 돈을 받는 대가로 우즈와 관계된 외도에
대해 어떤 인터뷰는 물론 책도 쓸 수 없고, TV 출연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죤 드리아든은 “하인에게 비밀을 얘기하는 사람은 그 하인을
자기의 상전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비밀을 잡아 그것으로 상대의 재물을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비밀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아무에게나 말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도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당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진리의 성령님을 통해서인데 그것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곧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관계를 가져가면서 그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로의
비밀을 나누게 됩니다. 그만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는
증거이고 믿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가장 소중한 비밀을 말해버리는 사람은
조심해야합니다. 애정결핍이거나 그 비밀을 이용해 애정을 얻으려는
속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 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상대의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만큼 깊은 관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누구에게나 드러내 보이시지 않고 당신 계명을
지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당신 비밀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믿고 말한 것은 다른 이에게 발설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시는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둘의
관계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아 그 비밀을 지켜줄 수
없는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이비나 이단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신흥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한 번 이상은
기성종교를 거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기성종교에서 그릇이 합당하지도
않은데 많은 진리들을 가르쳐주어서 그것을 이용해 이단을 만들게 만든
책임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왠지 믿음이 가서 자신의 속내를 다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앞에서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선물은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믿을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지켜보시다가 믿을만한 사람에게만 당신 소중한 비밀을
선물하십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식사시간에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배님들이 드시는 음식이었지요.
글쎄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넣어서 비벼 먹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유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처럼 아주 신기하기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저것을 먹지?’라는 말과 함께 절대로
못 먹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오히려 제가
즐겨 먹는 음식이 되더군요.
이와 비슷한 체험을 군대에서도 했지요. 자대 배치를 받고서
선임 병들의 라면 먹는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글쎄
라면을 끓여먹는 것이 아니라 불려서 먹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 자신이 생각하기에 라면은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버너와 같은 화기를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라면 봉지에 뜨거운 물을 넣어서 라면을 불려 먹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봉지라면’입니다. 우동 면발처럼 퉁퉁 분
것을 어떻게 먹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없어서 못 먹더군요.
살면서 ‘아니다’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니다’ 싶은
것들이 더 괜찮은 경우도 있더군요. 그러므로 무엇이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쉽게 단죄해서도 안 됩니다. 대신
‘그럴 수도 있어.’라는 마음. 특히 여기에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더해진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다투고 싸우는 세상이 아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세상이 분명히 될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가 이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말만 할 뿐, 가장 실천하지 않는 단어가 또 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비싼 학원에 보내거나 비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 주면 잘 크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녀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자녀들은 문제아가 되어 나중에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중요한 것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주님의 진정한 언어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을 다시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리고 지금 당장 행해야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싫증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행복에 너무 익숙해졌을 뿐이에요.
코감기에 걸려 봐야 코로 숨 쉬는 일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깨닫는
것처럼(애거사 크리스티).
카페의 벽에 걸려 있는 예쁜 유화. 이 그림처럼 예쁜 오늘을
만드세요.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떤 선배 신부님께서 오랫동안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십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이런 말씀을 해주시네요.
“그런데 너의 글에는 고민이 없는 것 같아.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 같아서 좀 아쉽구나.”
이 말에 다른 신부님께서도 “맞아. 글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 깊이가
부족해.”라는 말도 해주십니다. 모두가 더 글을 잘 쓰라고 해주시는
말이겠지요. 물론 제 스스로도 저의 글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칭찬이 아닌, 이러한 비판의 말에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더군요.
겉으로는 비판을 많이 해달라고, 그래야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는 칭찬받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더군요.
즉, 비판받고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자신이 듣고 싶은 칭찬과 긍정적인 말을 나의 이웃에게도
해주었으면 합니다. 사실 잘 생각해보니 그런 말에 대해서는 인색했고,
대신 비판과 부정적인 말만 쉽고 편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입에
발린 말도 때로는 필요한데 말이지요.
오늘은 이런 말을 해 보면 어떨까요?
“멋져요. 예뻐요. 아름다워요. 당신과 함께 있어 기뻐요.” 등등의
상대방이 좋아하는 말을....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황혼의 미학
2013년 다해 4월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요한 14,21-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황혼의 미학>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황혼의 미학’(분도출판사)이란 책을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한 말씀 한 말씀이 어찌 그리도 설득력
있고 명쾌한 말씀인지...
제목만 보면 즉시 ‘노인들을 위한 책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드시겠지만,
읽다보면 노인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에게도 아주 유익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굴에 선량함을 가득 담고 침묵하는 노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부드러운 ‘황혼 빛’을 비춰준다. 부드러운 가을빛은 시들어
말라가는 낙엽도 빛나게 하지 않는가. 늙어가면서 중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다.
침묵하는 법을 배운 노인은 외롭다고 푸념하지 않는다. 침묵은 그를
하느님 세계로 훌쩍 옮겨놓는다. 고요한 노인은 말없이 자기 삶의
‘그림책’을 훑어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여 산다. 그리하여 그에게서는 평화와 고요가
흘러나오고 다른 사람들도 이 고요 한에서 편히 쉬고 싶어 한다.”
누구나 희망하는 ‘아름다운 노년기’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선량함, 부드러움, 너그러움, 침묵, 감사, 내적인 고요, 하느님과의
일치...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반된 현실 앞에 힘겨워하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어갈수록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이 계십니다.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발하게 활동하실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폭풍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끔찍한
고통 가운데서도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조차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시며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가시더라도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고, 그때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 가능할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계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성령의 현존, 성령의 역할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안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활력, 활기, 새로움의 원천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가 꽤나 오래 되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색창연한 고딕식 교회 건물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이제 ‘한물 간 단체’, ‘박물관’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에
아직도 생기가 넘치는 젊은 교회입니다.
성령은 마치도 한 마을의 중심인 공동우물 같은 존재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들의 이 끝도 없는
갈증을 지속적으로 채워주고 우리의 이 숱한 죄를 매일 깨끗이
씻어주는 맑은 샘과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에너지 충만한 당신의 입김을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불어넣어주십니다. 성령께서 부여해주신 힘으로 우리
영혼의 성덕의 불을 지필 수 있으며, 그분의 에너지로 우리는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며, 그분의 불길로 덕지덕지 낀 우리
영혼의 죄를 태워버릴 수 있으며, 그분의 지혜로 평화와 선을 향한
투쟁을 계속해나갈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나에게 그런 힘이 있듯
추억 속에서 떠오르는 사람과 말들이 간혹 우리를 감명 깊게
하지요. 과거가 단순히 뇌에 기록으로만 남지 않고 되살아난다고
봅니다. 사람들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다면 대자연에도 하늘에도
있어야 하지요.
진리의 말을 듣고 즉시는 몰라도 늦게 알아듣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나의 능력인가요? 좋아요. 나에게 그런 힘이 있듯
하느님도 그렇죠. 대자연 큰 힘님이신 하느님의 말씀님과 그 힘이
성령이란 힘님이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4월29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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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구체적인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지킨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보통
오감에 의존한다. 그러니 우리의 오감으로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맡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그분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해도
관념적이거나, 막연한 느낌, 혹은 뜬구름 잡는 듯한 피상적인
느낌이기 쉽다.
만약 우리의 삶이 그분께서 일러주신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인 혹은 막연한
느낌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분을 느끼고 사랑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을까?
오감이 아니라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도 자신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음으로 바라보고 들어야 한다.
그분의 눈빛을 읽어야 하며, 그분의 뜨거운 가슴을 느껴야 한다.
그분의 삶을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소망도 마음으로 보여드려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마음으로 느끼려 할 때, 그 다음은 성령께서 알아서
도와주신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느낌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한 번의 십자가를 긋더라도 마음으로 그어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보호자 성령님
저는 예비 신자 교리를 할 때 그들의 신상명세서를 미리 살펴보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세속적인 조건을 미리 알면 편견이
생길까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후에 예비 신자반의 구성을 살펴보면,
교수님도 계시고, 고위 공무원이나, 외교관, 변호사, 의사 등 높은
지위에 계신 분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교리를 처음 시작할 때
보면 분명히 우리말로 하고 있는데도 학력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눈빛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성사를
받고 나면 그때 온전히 눈이 뜨이는 것을 봅니다. 세례 때 성령께서
오시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 기억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견진성사를 받고
어느 순간 성경에 흥미를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예비
신학생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신학교를 다니고 사제서품을 받고
지금껏 사제로 살고 있으니 제 안에 계신 성령께서 견진성사를
통해 모든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세례성사 때 우리 안에 오신 보호자 성령께서는 우리가 큰 죄와
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우리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어느 때 불현듯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도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 조그만 틈새로
당신의 빛을 비춰주시기 때입니다.
- 윤종국 신부(서울대교구 동작동천주교회) -
◈ [기타] <내맡긴영혼은>
TV와 인터넷은 마귀가 아닙니다- 이해욱신부
2013년 4월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TV와 인터넷은 마귀가 아닙니다.
저에게 전화를 주시어 "이것이 제 성격입니다."를 쓰게
만드신 자매님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어제 저녁, 어느 자매님이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리산 <마리아처럼>에 가려 합니다."
"그러면, 자매님이 <마리아처럼> 카페에 들어가셔서 직접 원장님께
신청하세요."
"저는 컴퓨터가 없습니다."
"그러시면 아는 친구분에게 부탁 드려서라도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저도 컴퓨터를 못 했었는데 하느님 때문에 컴퓨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집에 컴퓨터가 있는데 저는 컴퓨터를 안 할 겁니다."
"교황님께서도 사제들에게까지 인터넷을 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위한 블로그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듯이 우리 신앙인은
현대 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황님이 하신 말씀인지 제가 알고 있지만,
오늘날 많은 사제들을 죄로 몰아넣는 것이 인터넷이고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죄에 빠져 생활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인터넷에 음란물이 떠돌고 있다고 해서 인터넷을 안 하시면 앞으로
영적인 도움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TV, 특히
평화방송이나 기독교방송을 열심히 보셔야 됩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TV나 인터넷을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방송이 얼마나 편성을 잘 합니까?"
"어느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교구 신부님입니다."
"그 신부님이 뭘 몰라서 그렇지 평화방송과 인터넷이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모릅니다. TV와
인터넷은 사용하는 사람이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충 한 10분 정도의 통화였는데 제가 그 자매님께 드린 말씀은
대체로 매체를 선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그 자매님은
"어떤 신부님의 말씀에 따라 TV나 인터넷을 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에 좋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먼저, "TV에 대해서" 저의 경험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평화방송에 근무할 때는 제 사무실에 타 종교 방송
모니터용까지 여러 대의 모니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저희 평화방송을 재미없다고 잘 시청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참 부족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평화방송이 저에게 영적으로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어느 영성강좌가 있으면 시간을 기다려 시청하게 되었으며,
지나간 영성강좌 프로도 평화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평화방송의 지나간 프로그램 보기를 통하여 그곳에 모아진
영성강좌를 차례로 다 시청한다면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무신 세미나다, 무신 신학원이다, 무신 학교다 하고 돌아다니지
않으셔도 많은 영적 지식을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긴 세월 "신학을 전공한 신학생"보다도 더 높은 신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평화방송뿐만 아니라 기독교방송도 자주 시청하십시오.
하느님을 진짜로 경험하고 사랑하는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는 정말 살아있고 은혜로워 우리의 영을 살찌게 합니다.
그리고, 일반 방송의 TV프로 중에 특히 "연속 드라마"는
시청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역사적인 사극이라 하여도
차라리 역사책을 읽는 것이 낫지 영적인 차원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역사극을 시청하려 시도해 본 적도 있지만,
시청하다 보면 권모술수, 계략, 모략 등의 내용으로
제 영혼이 짜증을 느껴 끝까지 잘 시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팔순이 넘은 어느 수녀님이 찾아오셨는데, 저녁 시간의
연속드라마 방영시간이 되니 TV앞에 진을 치고 앉으셔서
드라마에 아주 푹 빠져 계신 모습을 보고 그 분의 영혼에
측은지심을 느꼈습니다. 그 수녀님의 하루 중 제일 큰 취미
시간이 드라마 시청이시랍니다.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면 그 드라마의 노예가 됩니다.
아무리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라 하여도 영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드라마 속의 인물과 사상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TV에는 우리 생활에 아주 필요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다큐 프로,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하여 시청하면 영육간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인터넷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터넷의 폐해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그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다 그 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터넷을 죄악"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칼이 위험하다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주방의 서랍 속에
감추어 둡니까? 도저히 음식을 조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입니다.
TV를 시청하지 않고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마치도 거룩한 사람들의 표상인양 가르치거나 착각하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합니다.
저는 감히,
"TV와 인터넷은 하느님 은총의 도구!"라고 외쳐봅니다.
제 사무실의 거실 TV 화면 상단에는 작은 십자가가 붙어
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왜 저기에 십자가를 붙여
놓았냐고 궁금해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TV가 바보상자가
아니라 "은총 상자"라는 의미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인터넷이 현대 사회의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이기(利器)이면 교황님께서 모든 사제들에게
"하느님을 위한 블로그를 만들라."고 하셨겠습니까?
정말 인터넷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 카페 하더덧들의 영적
교류가 그 어디 가능했겠습니까?
이 카페는 "하덧사 공동의 하느님을 위한 블로그"입니다.
"영혼의 거룩한 공동우물(샘물)"입니다.
저를 통해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을 하신 분들이 인터넷을
시작하시지 않으면 저와의 영적 교류가 끊기게 됩니다.
제가 이 카페의 지기이지만, 이 카페는 저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덧사 모든 이의 소유이고 곧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하느님의 소유이기에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거룩한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을 통하여
모든 분들과 소통합니다.
영적지도도 이 성전에서 펼쳐집니다.
정말 TV와 인터넷은 최고(最善)의 "하느님 은총의 전달자"라고
저는 외쳐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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