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돌아보며 궁상이나 떨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요즘 기준으로 보면 선물 축에도 끼지 못할 것들이, 훈훈한 명절선물이 돼 따뜻한 정과 함께 주고받던 과거가 우리에겐 분명 있었다. 캐러멜과 건빵, 카스텔라나 건포도 정도면 훌륭한 먹을거리 선물이었고 양말 고무신에 질긴 바지와 점퍼는 어린이들이 좋아해 친구에게 자랑하던 선물이었다. 와이셔츠 넥타이 구두선물을 어른들이 기뻐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양복지와 한복옷감 필터담배는 한때 매우 귀한 고급선물로 꼽힌 적도 있었다.
권력층 저택으로 운반되던 50년대 ‘추석 선물’
바쁜 추석
1958. 9. 27 [경향신문] 1면
추석은 물론 가을의 한가운데요, 봄여름 가꾸고 키운 작물을 거둔 후의 풍요가 만월(滿月)만큼 가득한 명절이다. 선물은 주기보다 나눔 의미가 컸고 있는 사람이 아래에 내리는 게 많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지나며 이런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물자가 귀해 서민은 선물 엄두를 못 내고 가정에서 차례음식 차리고 겨울채비 옷가지나 아이들에게 장만해주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다만 일부 ‘있는 사람’(흔히 고관대작이라 불리는)만 ‘선물 사태’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나누는 게 아니라 ‘상납하는’ 선물풍조가 번졌다는 얘기다.
1950년대 초반 한 신문은 “추석을 맞아 팔리는 과일상자의 태반은 고관 댁과 권력층 저택에 운반돼갔다” 며 “전쟁하는 이 나라의 후방에서 이런 꼴이 벌어지고 있으니…”라며 개탄했다. 50년대 후반엔 아예 “국회의장 집 문간에 모 지사가 보낸 꿀, 어느 소장이 보낸 밤, 장관의 자개함, 의원의 수박 등이 가득 쌓였다”며 “의장 집 앞 은행 뜰에는 주차한 차도 가득하다”고 고발했다. 그러면서 “거리에는 사과궤짝을 가득 실은 지프차가 분주히 돌아다니지만 서민들은 그저 어린이 옷가게, 양말가게나 들를 뿐”이라고 개탄했다.
물론 없는 사람에게 전하는 선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전쟁 중엔 군 병원, 전쟁고아원, 난민촌 등에 시청 구청에서 선물을 보냈고 종류는 대개 쌀, 떡이나 건빵, 가루우유, 건포도 등이었다. 우유와 건포도는 물론 전쟁구호품으로 그리스 등에서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문은 ‘뇌물성 선물’에 더 큰 관심을 보여 “사회부, 경제부기자들은 추석이 상징하는 것으로 어린이의 ‘색동저고리’와 서민이 찾는 ‘동대문시장’을 꼽지만 정치부기자들은 선물사태가 나기 마련인 고관 집 대문간부터 떠올린다.”고 꼬집었다.
60년대 이후 불우시설에 추석선물 전하는 풍조 생겨
추석 명암 두갈래 속에
1960. 10. 5 [동아일보] 3면
상납선물 풍조는 민간에도 묘한 여파를 몰고 왔다. 56년 대구에서는 모 초등학교 사친회가 학부모 집을 찾아 교사들에게 줄 추석선물비를 걷다 말썽이 났다. 59년 신문투고란에는 어느 ‘통탄 공무원’이 “명절을 빙자해 감독기관이나 권력층에 선물을 한다며 아랫사람들에게서 돈을 거두고 있다”고 고발하며 “부모처자에게 고기 한 점, 무명옷 한 벌 마련도 못하며 거액을 내는 말단 공무원의 처지를 상급자들이여, 알기나 하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아마 이런 분위기도 4.19혁명이 나는 데 한몫을 했을 것 같다.
60년 4.19혁명 후 추석 경기에 대해 어느 신문은 한마디로 “말이 아니다”고 했다. 명절 때면 관청 회사 은행 개인이 사가던 상품권도 전혀 팔리지 않는다며 “선물 보내고 이권운동이나 하던 과거의 썩어빠진 버릇이 없어진 명랑현상일까, 혹 돈뭉치나 보증수표가 대신 왔다 갔다 한 건가, 아니면 돈이 아예 씨가 말랐나”고 자문했다. 상납이 주춤해 설까, 불우시설에 선물을 보내는 훈훈한 이웃돕기 현상이 그때부터 제법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관공서에선 캐러멜 카스텔라 빵 등을 고아원 양로원에 보냈고 민간에서도 자진해 불우시설을 찾아 송편 사과 쌀 밀가루를 전하는 일이 생겨났다.
60년대, 윗사람에게 선물 보냈다가 ‘파면’되기도
61년 5.16 직후엔 사회분위기가 급변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추석을 앞두고 “공무원 상하 간, 혹 일반시민이 공무원에게 선물을 보내 일을 잘되게 하다거나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일은 이제부터 없다”며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음성적 증수뢰가 발견되면 엄벌하겠다.”고 경고했다. 시중에는 모 경감이 치안국장 부인에게 양단 치마저고리 한 단과 수표를 보냈다 잘렸다는 얘기가 돌았다. 상인에게 선물이나 돈을 받은 경찰관 등 수십 명이 파면되면서 “선물에 웃지 말고 파면에 울지 마세”란 유행어도 생겼다.
공무원사회가 얼어붙은 대신 무의탁시설엔 선물이 답지했다. 박의장부터 전국 양로원 노인 2천여 명에게 각각 송편용 쌀 3홉과 사과 두 알씩 보냈고 천주교 주교, 서울시장, 시경국장, 육군참모총장 등이 캐러멜 카스텔라 밀가루 등을 추석선물로 내놓았다. 회사나 공장들은 지역 불우이웃이나 자매결연을 한 마을에 소나 돼지를 보내 주민 공동으로 잡아 추석차례를 지내고 잔치까지 벌이도록 해 신문들이 미담기사로 소개하곤 했다.
62년부터는 선물도 다양해졌다. 부산시는 고아원 양로원 사람들이 보고 예뻐하고 때로는 먹기도 하라며 토끼 700마리를 선물로 주었는가 하면 재일동포들은 학용품이 부족한 초등학생들을 위해 연필 공책 등을 보냈다. 또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벌어졌고 간장과 조미료 메리야스 들이 친척 친지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물로 인기를 끌었다. 서민 가정에서는 아이들의 월동용 겨울옷이 인기여서 동대문 남대문시장이 북적이기도 했다.
추석을 앞둔 초등학교에는 새 옷을 입은 아이들이 늘어나고 또 자랑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것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이 생겨 일부 교사들은 “새 옷은 집에서만 입고 학교에는 옛날 옷을 그냥 입고와라”고 당부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사탕선물을 받은 아이들이 주머니 가득 사탕을 넣고 다니면서도 아까워 먹지는 못하다 사탕이 녹아 바지나 점퍼에 늘러 붙는 일도 있었다. 아이들이 울면 엄마는 “사탕보다 옷이 아깝다”고 구박을 주면서도 호주머니에 늘러 붙은 사탕을 떼어 내느라 하루를 다 쓰기도 했다.
60년대 중후반 선물품목에 상품권 등장
불황속에 흥청망청…희비 섞인 추석 대목
1964. 9. 17 [동아일보] 3면
60년대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석선물 상품광고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다. ‘승표 간장’ ‘왕자표 메리야스’ ‘미도파 와이셔츠’ ‘사자표 시대 샤쓰’에다 ‘가정 표 양말’ 등이 1면 5단 광고로 실리곤 했다. 신문광고의 추석선물 상품선전 문구만 봐도 시대상을 알 수 있다. 60년대 초엔 간장 양말 내의에 와이셔츠 등 생필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것이 60년대 중반에는 와이셔츠와 함께 넥타이, 통조림, 백화양조(청주), 조미료, 설탕으로 옮겨갔고 후반에는 구두, 시계, 비누, 종합 과자와 맥주광고가 등장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카메라, 쌍안경에 하모니카, 건강베개, 전기밥솥, 화장품, 아동장난감 등 다양한 공산품이 선보이고 햄 소시지 등 새 식품류가 인기였다.
상품권이 선물품목으로 신문에 등장하고 또 그 부작용이 문제가 된 것은 60년대 중후반 이후다. 67년 신문은 “누가 무엇 때문에 사가고 누구에게 주며 그것으로 어떤 물건을 바꿔가는 지 알 필요가 없는” 상품권이 알음알음 선물로 인기를 끈다고 소개했다. 처음엔 돈 있는 사람만 가는 곳으로 알려졌던 백화점이 서민들에게도 시장보다 인기 있는 쇼핑장소로 부상할 무렵이었다. 68년엔 “포장선물 풍습이 점차 사라지고 상품권이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기사에 사람들이 상품권 발매소에 줄을 선 사진도 실렸다.
이때쯤 어느 신문은 “추석이라고 손님이 들끓지는 않으나 불경기는 아니고 매상도 괜찮다. 도시민 소비행태가 고급품 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토산물에서 일용품으로 갔던 선물이 고급 공산품, 그리고 상품권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였다. 시민의 취향이 이렇게 바뀌다보니 웬만한 상점에서도 상품권 비슷한 ‘선물권’ ‘인환권’ ‘물품교환권’을 앞 다퉈 발매하기 시작했다. 또 그에 따른 부작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상품권을 대량 팔아놓고 폐점한 사례’ ‘교환권에 명시된 물건이 떨어졌다며 값이 떨어지는 딴 물건을 내주는 행태’ ‘표시가격보다 값싼 물건을 사도 차액을 돌려주지 않는 행태’ ‘상품권 품목 대신 더 비싼 물건을 강매하는 행태’등이 연이어 고발됐다.
70년대, 상품권이 뇌물수단으로 변질
간소한 추석을 보내려면..
1973. 9. 3 [경향신문] 5면
이런 가운데 70년대 들어서며 시장은 아동용품과 제수용품, 시골 소매상에 보낼 옷가지나 파는 곳쯤으로 위상이 격하됐다. 또 자연히 아동복 와이셔츠에 설탕 구두 등의 판매가 주춤해졌다. 특히 설탕은 명절 때 가격이 평소보다 떨어지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공산품 제조가 활기를 띠고 질도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사람들 사이에 건강이 제법 화두로 등장하면서 설탕보다 꿀이 인기를 끈 까닭이었다. 이런 물품 고급화에 상품권은 현금을 대신할 뇌물로서의 역할이 대두되면서 70년대 내내 말썽을 일으켰다.
70년대 최고로 추석경기가 좋았다는 73년 여성단체와 각 시민단체들은 “추석을 간소하게 보내라고 말만 할게 아니라 각 기관 직장에서 선물이란 이름으로 상사에게 뇌물을 전하는 풍조가 문제”라며 특히 상품권이 뇌물전달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그해 S백화점의 경우 추석이 있던 달 총매출의 70%이상이 상품권매출이었고 그 가운데 80%가 기업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액면가도 72년까지는 5천원이 최고가였으나 2만 원 권이 등장해 거의 고액수표 역할을 했다. 정부는 명절 때마다 추석선물 금지와 엄벌을 되뇌었지만 입에 발린 말이 돼가고 있었다.
뇌물 막기 위해 각종 수단과 동원했지만..
추석절 부조리 막게 “면담은 5분간”
1975. 9. 17 [경향신문] 7면
74년 감사원은 추석 직전에 인사를 하면서 “선물 주고받지 않기를 위해 인사를 앞당겼다 ”고 했다. 75년 서울시 운수국은 사무실 앞에 ‘면담은 5분간’이라는 안내문을 붙였다. 또 수위를 앉혀 출입자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업자의 출입을 통제했다고 선전했다. 어떤 공무원들은 “명절을 앞두고 일부러 휴가를 가 업자를 피한다.”고 선전했다. 뇌물을 안 받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한꺼풀 뒤집어보면 그만큼 명절에 각종 선물에 상품권이 뇌물형식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웅변한 꼴이기도 하다.
75년부터 79년까지 매년 국무총리는 추석 직전 담화를 발표해 “공무원은 선물을 주지도 받지도 마라. 업자도 공무원을 만나지 마라”고 강조했다. 경제부처 장관들은 산하단체 협회 등에 특별공한을 보냈고 정보부 경찰은 추석절 선물행위 근절을 위한 암행감찰을 강도 높게 벌였다. ‘명절선물’이 큰 악덕으로 인식되면서 예상치 않은 부작용이 일어났다. 돈이 안 돌아서인지, 혹은 사람들 마음이 메말라선지 구호시설에도 온정의 손길이 뜸해진 것이다. 한때 값싼 캐러멜이나 카스텔라 건빵은 그래도 풍성하게 돌았던 그곳에 찬바람만 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추석선물, 소중한 사람들을 챙기는 따듯한 마음으로..
귀성의 봇짐속에 정을 담고…
1979. 9. 17 [동아일보] 5면
79년 한 신문은 추석 직전 공단에 찾아가 공원들이 가족들에게 어떤 추석선물을 준비했는지 물었다. “아버지에게 줄 필터담배 한 보루와 동생들에게 줄 양말 1켤레씩”(전자회사 19세 여공) “홀어머니에게 줄 생강차와 옷, 언니에게 커피 1병”(무역회사 18세 여공) “아버지 시계, 동생 학용품”(전자 회사 17세 직공) “부모님 보약, 옷”(물산 21세 사무원). 마음이 담긴, 명절의 훈훈함이 가득한 선물리스트였다. 고가 외제품이니 수입과자가 불티나게 팔린다는 기사들 대신 공단직원들의 이 따뜻한 선물 목록이 보도되자 사람들은 가슴을 여몄다. 역시 명절은 마음 없이 이득이나 좇아 선물이랍시고 뇌물을 건네는 때는 아니라는 얘기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