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초 당시 나이 서른셋 강윤선 준오헤어 대표는 집을 팔기로 했다. 태어나서 처음 ‘진짜 우리 집’이라 불렀던 서울 돈암동 단독주택. 그 집은 그의 전 재산이기도 했다. 그는 집을 팔아서 미용실 직원 16명과 함께 세계적인 미용 교육 기관인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에 교육을 받으러 가기로 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서울에서 집 한 채만 있으면 엄청난 부자다”고 말했다. 강윤선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그가 살던 곳은 서울 남가좌동 빈민촌에 있는 무허가 판잣집. 그랬기에 태어나 처음 살아본 집다운 집, 돈암동 집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집을 팔아버렸다. 집 팔아 마련한 1억5000만원에 돈이란 돈은 다 끌어모아 2억원을 마련했다. 만 17세 때 미용 일을 시작해 20년 가까이 모은 돈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집은 정말 아까웠지만 돈 구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다른 건 생각 안 했다. 오직 직원들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미용이란 게 어떤 건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로부터 22년. 동네 미용실 원장이었던 그는 국내 미용계 최강 기업을 이끄는 경영인으로 우뚝 섰다. 그가 집 팔아서 직원들과 연수를 떠날 때 3개였던 준오헤어 직영점은 작년 말 100호점을 돌파했다. 올 들어 4개가 더 문을 열었다. 2010년 이후에만 47개를 오픈했다. 현재 직원은 2500여명. 이 중 헤어디자이너만 1200여명이다. 미용 브랜드 중 이렇게 많은 직영점을 운영하는 경우는 국내는 물론 외국에도 드물다. 영국 비달사순은 전 세계에 직영점이 30개 정도다. 국내 다른 유명 브랜드는 대부분 가맹점 형식으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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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9일 서울 청담동 애브뉴준오에서 만난 강윤선 준오헤어 대표는 "훌륭한 헤어디자이너의 공통적인 특징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강 대표는 1982년 서울 돈암동에서 준오미용실을 연 이후 34년 동안 준오헤어 브랜드를 키웠다. 그는 "미용은 이제 생계 수단이라는 단계를 넘어 사회적 성공과 자아실현의 무대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준오헤어는 세계적 헤어그룹 웰라가 주최하는 ‘인터내셔널 트렌드 비전 어워드’에 최근 7년 동안 한국 대표로 출전했고, 2007년엔 53개국 대표 중 1등(골드 트로피)을 차지하기도 했다. 국내 최초 헤어아카데미 설립, 해외 연수,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인재를 키웠던 열정과 노력이 국내·외에서 맺은 결실이었다.
올해로 준오헤어를 시작한 지 34년째를 맞은 강윤선(55) 대표를 지난 29일 준오헤어 본사가 있는 청담동 애브뉴준오 건물에서 만났다.
―직원들과 해외 유학 간다고 집을 팔다니 무모한 건가, 낙천적인 건가.
“돈은 나중에 벌면 되고, 집은 언제든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배우는 건 때가 있는 것 아닌가. 사업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직원들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것이다. 사람마다 욕심이 다른데, 내 욕심은 사람의 성장에 대한 욕심이었다.”
그는 두 달간 영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서울 성북동 산동네에 1400만원짜리 전세를 얻었다. 방이 3개인 그곳에서 남편과 두 살 된 큰아들, 미용실 직원 5~6명과 함께 살았다. 그가 다시 집을 산 것은 그로부터 7~8년이 지난 후였다.
미용실에서 꿈을 찾다
멋 내는 걸 좋아했던 강윤선(사진)은 고등학교 과정 야간 전수학교 1학년 때 동네 미용실에 갔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만났다. 밤에 학교 다니고 낮에 돈 벌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한 50대 아주머니가 미용실에 보따리를 맡겨도 되느냐고 부탁했는데, 미용실 주인이 차갑게 거절했다.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다신 이곳에 오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이후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미용실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며칠 후 그는 무궁화고등기술학교에 등록해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인생 전체를 좌우할 큰 결정을 한 셈이다.
“미용이 굉장히 좋은 직업으로 느껴졌다. 기술만 있으면 평생 굶어 죽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나로선 그 이상 대단해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1년 과정을 마치고 동네 미용실에서 직원 생활을 한 뒤 잠깐 아는 사람과 동업을 거쳐 1982년 돈암동에 준오미용실을 열었다. 가게엔 항상 사람들이 붐볐다.
―미용이 천직이라는 느낌이 들던가.
“당시 미용은 생계를 위한 직업이었다. 수입이라야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뭐가 그리 재밌었나.
“사람 만나는 게 좋았다. 어릴 때 엄마는 공사판에서 일하다 언제나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집에서 사람 기다리는 게 무섭고 싫었다. 낮에 같이 놀던 친구와 헤어질 때면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 미용실을 하니 언제나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거다. 밤늦은 시간까지도. 손님들이 계속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님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게 사람을 좋아했으면 손님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을 것 같다.
“한 여자 손님이 회사에서 일을 끝내고 파마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다 끝나니 밤 12시가 됐다. 손님 혼자 보내려니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가서 버스 타는 걸 보고서야 가게로 돌아왔다. 마음으론 집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손님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걸 손님들도 아는 것 같았다. 손님이 돈으로 보이면 사업은 그 순간 끝나는 거다.”
―단골도 많았겠다.
“말도 마라. 하루에 손님 50명 이상 머리를 만지는 날도 허다했다. 한 번은 갑작스러운 폭우로 주변이 물바다가 됐는데, 환하게 불을 밝힌 우리 가게에 손님 20~30명이 가득한 걸 보고 이웃 상인들이 ‘마치 노아의 방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손님을 대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헤어디자이너로서의 실력 아닌가.
“나이보다 젊게 보일 수 있도록 감각적으로 표현을 잘했던 것 같다. 전통적이고 나이 들어 보이는 스타일은 안 했다. 파마를 할 때도 머리 전체를 꼬불꼬불하게 하는 게 아니라 두 가닥 정도만 말고 나머지는 펴는 식이었다. 손님에게 가장 잘 맞는 머리 스타일이 뭘까 항상 그 생각만 했다.”
그의 미용실은 꽤 유명세를 탔다. 감각이 앞서고 기술이 좋아서 전인화ㆍ최명길 등 당시 유명 여자 연예인들의 패션 잡지 화보 촬영 때 헤어 스타일링을 맡곤 했다. 그는 머리를 곧게 펴는 스트레이트 파마를 국내에 도입ㆍ보급하는 데도 앞장섰다. 부산ㆍ광주ㆍ대구 등 지방에 강연하러 가면 ‘환영, 강윤선 원장님’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나붙기도 했다.
“직원 성장시키는 데 모든 걸 걸었다”
강윤선(사진)은 “전엔 눈물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 직원들을 보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사람에게 모든 걸 걸었던 자신의 기대를 넘어설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한 직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체계적으로 미용 인력을 훈련시키고 키웠다. 1992년엔 업계 최초로 헤어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내로라하는 미용 실력자들을 초빙해 강의를 들었다.
―준오헤어는 미용계 디자이너를 키우는 사관학교로 알려져 있다.
“처음 입사한 사람은 누구나 2년6개월 동안 준오아카데미에서 5단계 과정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매단계가 끝날 때마다 테스트를 통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마지막 1년은 커트·컬러·파마 등을 조합해 디자인한 100가지 스타일을 실제 모델을 상대로 해보고 나서 강사로부터 합격 점수를 받아야 비로소 디자이너로 데뷔할 수 있다. 교육 시간은 1600시간 정도다. 이곳에서 일년에 150~200명 정도가 배출된다.”
―사람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가 뭔가.
“미용은 사람이 재산이다.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이냐가 중요하다. 삼겹살을 팔든 휴대전화를 만들든 누가 어떤 생각으로 일하느냐가 핵심이다. 인재는 영입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모셔온 인재는 언제 떠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키운 인재는 스스로 알아서 일하고 외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정성 들여 키웠는데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다른 데로 가면 그 또한 미용계 발전에 도움이 될 거다. 재밌는 건 준오헤어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우릴 떠난 그 친구들이란 거다. 나가서 ‘정말 잘 배웠다’는 말을 많이 해준다. 2년 반 교육시켜줬다고 구차하게 조건을 달고 싶지 않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가면 된다. 이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냐, 그래서 내가 지금 행복한가 그것이 중요하다.”
그는 4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치 있고 의미 있는’이란 말을 10번도 넘게 했다.
―직원들 교육에 모든 것을 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다. 오로지 교육만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다. 그건 내 경험이기도 했다. 가난하고 못 배웠기 때문에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달라지고 발전하는 나를 발견했다. 경영에 관심 갖게 됐을 때 피터 드러커나 잭 웰치 책을 읽을 때면 그렇게 신이 났다.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회사 경영을 해야 하는지, 인재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등이 쏙쏙 들어오더라. 어제보다 좀 더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게 내 모토이다. 1990년대엔 삼성 임원이 듣는다는 1인당 80만원짜리 리더십 강좌를 모든 직원이 듣도록 하기도 했다.”
―준오헤어에선 10년 이상 일한 직원이 300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용계에선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통상 이쪽 세계 이직률은 40~50%라고 말한다. 우린 10% 안팎이다. 우리한테 온 친구들은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 미용계 무림 고수인 그들이 단지 머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준오아카데미 같은 데서 다른 디자이너를 상대로 강의도 하고, 미용실에서 후배를 키우는 일도 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가 성장하는 느낌이 들고 배울 게 많다고 하더라. 자기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직원들 교육이 수입 증대로도 이어졌나.
“헤어디자이너 1200여명 중 한 해 수입이 항상 1억원 이상인 사람은 200명이 넘는다. 한 번이라도 1억원을 넘어본 사람은 300여명에 달한다. 최근 조사해보니 연수입 1억5000만원 이상을 기록한 헤어디자이너가 2012년 4명에서 작년 40명 가까이로 늘었더라. 한 달 최고 수입 기록은 7000만원이다. 그 기록을 가진 친구는 한 해 수입이 3억원쯤 된다.”
준오헤어는 전 직원이 한 달에 한 권씩 회사가 정해준 책을 읽도록 하는 ‘독서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1995년 시작해 올해 만 20년째이다.
―독서가 미용사들이 업무에서 필요로 하는 실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을 것 같은데.
“우리의 진짜 서비스는 고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제대로 서비스하려면 고객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세상도 알고 지식도 있어야 한다. 책은 역사와 시공을 초월한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능력이 커지면 미용 기술도 수준이 달라진다. 미용은 이제 생계를 넘어 작품 활동이다. 사회적 성공과 자아실현의 무대이기도 하다. 헤어디자이너들에게 ‘너희들은 조각가’라고 말하곤 한다.”
―책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직원들에게는 고역일 수도 있다.
“책 읽고 독후감 쓰기 싫어 그만둔 직원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는 철칙이다. 독서 잘 안 하는 직원 앞에서 책을 5장씩 북북 찢어 준 적도 있다. 하루에 무조건 10페이지는 읽으라는 뜻이었다. 하루 10페이지면 한 달에 3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이고, 이게 쌓이면 1년에 12권, 5년에 60권이 되는 거다.”
―독서를 그토록 중시하는 덴 개인적인 경험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집에선 교과서 이외의 책을 사 준 적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무슨 인생론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비난하지 말라’ ‘불평하지 말라’ 는 등 내용이 정말 위로가 됐다. 그 이후 거의 활자 중독 수준으로 책을 봤다.”
가난했고 못 배웠다…그래서 성공했다
그(사진)는 중학교 때부터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졸업 동기 1000여명 중 일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딱 2명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나.
“연탄 배달로 가족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공장 가서 돈 벌어오라’고 했다. 중학교 안 보내주길래 혼자 전수학교를 찾아갔다. 입학금은 사채 하는 동네 아줌마에게 빌렸다. 학교는 야간에 다니고, 낮엔 사환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도 난 그때 정말 행복했다.”
―그런 환경에서도 행복감을 느끼다니.
“우리 동네는 돈이 귀했다. 다들 못 살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직장 다니면서 돈도 벌고, 떡볶이ㆍ순대ㆍ튀김 등 원하는 걸 사먹을 수 있었다. 친구도 사주고 나도 먹고. 내 맘대로 돈을 쓸 수 있어서 좋았다. 난 상대적인 부자였던 셈이다.”
―가난했고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
“가난하고 못 배워서 성공하기 더 좋았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못 배웠기 때문에 부족했고, 항상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내가 너무 부족한 존재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경영을 맡아 줄 회사 CEO도 훌륭한 분으로 영입했다. 요즘도 영어 단어를 외운다. 사람들은 ‘영어 쓸 것도 아니면서 왜 외우느냐’고 한다. 시간은 공부를 해도 가고 안해도 간다. 그러면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현재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최고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고를 꿈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최고를 꿈꾸는 건 생각의 크기를 넓히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꿈과 생각의 크기를 넓혀야 한다고 꼭 말하고 싶다.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세금도 안 내잖나. 하하”
인생을 바꾼 말 “내일 뭐하지”세 살 때 그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부모가 모두 집을 비운 사이 방에서 끓이던 된장찌개 냄비 위로 엎어졌다. 여덟 살 위 언니가 깜짝 놀라 어머니를 찾아다녔지만, 어머니는 저녁때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는 당시 입은 화상 때문에 18번 수술을 했다.
―화상이 어느 정도 심했나.
“살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병원에서도 죽을 줄 알았다고 했단다. 1년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도 한동안 ‘앞으로 나란히’를 못했다. 오른쪽 팔이 몸에 붙어서.”
―병원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세브란스병원에 첫 외국인 성형외과 의사가 있었는데, 그분이 수술도 해주고 병원비도 해결해줬다고 한다.”
―가난에 화상까지. 그런 현실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나.
“참 이상하지. ‘세상이 왜 이래, 왜 나만 불행한 거야, 죽고 싶다’ 이런 생각을 안 했다. 그런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매일 언제나 바빴다. 머릿속엔 ‘내일 뭐하지’라는 생각이 꽉 차 있었다. 몇시에 일어나지, 뭘 입지, 뭘 먹지, 미용실 쇼윈도는 어떻게 멋지게 꾸미지…. 내일 뭐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죽을 리는 없는 것 아닌가.”
―화상 입은 상처는 몸에 그대로였을 텐데.
“어릴 때 친구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럴 땐 ‘난 왜 이래’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음 날 어떻게 복수할까 고민하는 스타일이었다. 밖으로 드러난 상처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걸 어떻게 감출까 하는 방법을 더 많이 생각하는 식이었다. 회사를 경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후회나 번민보다 대안과 방법을 생각했다.”
―그런 역경을 이겨내니 인생은 뭐라는 생각이 들던가.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이란 말을 제일 좋아한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잘 사는 게 현명하고 가장 행복한 것이다. 인생을 두 배로 사는 방법이 뭔지 아나. 내일 할 일을 오늘 계획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진다.”
―직영점을 250개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적이 있다. 사업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나.
“25년 전쯤 직원들과 술을 마시다가 결심한 게 있다. 직원들과 평생 같이 가겠다고.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더라, 회사가 크게 성공했다더라 하는 건 전혀 부럽지 않다. 부러운 회사는 오랫동안 지속 가능한 회사를 만들고,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꾸준하게 나아가는 곳이다. 그런 회사를 존경한다. 수천억원 벌었다는 사람도 부럽지 않다. 많은 직원이 함께 잘 살고 꿈을 공유하는 그런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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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열린 준오헤어 42기 주니어 스타일리스트 컬렉션 행사 때 강윤선 대표가 새내기 스타일리스트를 안아주고 있다. /준오헤어 제공
―요즘엔 어떤 때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나.
“내 스스로 멋있다고 생각하는 날이 일년에 딱 두 번 있다. 준오아카데미 졸업식 날이다. 그들이 나를 떠나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미용 기술을 가르쳤다는 생각에 내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그 손기술 말이다. 그 손만 있으면 세계 어딜 가도 살 수 있다는 것, 그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