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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동굴 속에 갇힌 소궁주
두 사람은 다시 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들은 길에서 아무런 강호객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낮에는 농담을 해 가면서 길
을 걸었고 밤에는 함께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매초풍은 무시로 변홍의한테 소녀공을 써 쾌락을 한껏 맛보는 한편 진양을 빨아들여 정력이
왕성해졌다. 변홍의는 자신한테서 진기가 하체를 통하여 빠져 나가면서 이루 말 못할 쾌감
을 느꼈는데 그는 원래 남녀가 살을 섞으면 그런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매번 정사를 끝내고는 변홍의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런 뒤이면 매초풍은 가만히 몸
을 일으켜 객점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는 외딴집에 뛰어들어 점혈법으로 집 주인들을 제압
한 후 하나 하나 황야로 끌고 나가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닦곤 하였다. 그러고 나서 조용
히 객방에 돌아와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변홍의는 지난 밤에 있은 그녀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변홍의는 매초풍과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어 잔꾀를 부렸다. 그는 일부러 먼 길로 돌아 기일
을 연장해 가면서 남녀지간의 낙을 한껏 누리려 했다.
이렇게 한 달 남짓 길을 걷다 보니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의 공력은 대단히 많이 늘
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우람한 사나이의 머리라도 갈고리 손으로 대번에 끌어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최심장을 쓰기만 하면 오장이 휘딱 뒤집힐 정도가 되었다. 다만 살가죽에 거무스레
한 손바닥 자리가 약간 날 따름이었다.
어느 날 그들은 높은 산 밑에 이르게 되었다. 산세가 대단히 가파르고 구름이 산허리에 걸
려 산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산기슭에는 망망하게 수림이 펼쳐져 있었고, 푸른 숲
이 들어선 산기슭 위로 암홍색 나는 산허리의 일각이 약간 드러나 보였다.
변홍의가 한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곳이 오혈궁으로 드나드는 통로인데 본 궁의 제자들은 오혈문이라고 부른답니다."
산기슭에 몇 채의 농호들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그곳에서 묵기로 하였다.
한 농호에 들어서니 농부가 다가와서 변홍의와 문안 인사를 나누었다. 그 농부가 아낙에게
더운물을 떠오게 하였다.
매초풍과 변홍의는 세수를 하고 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안주 네 접시와 데운 술 한 주전
자가 들어왔다. 매초풍이 주인집 아낙을 바라보니 살결이 말쑥하고 두 손이 가느다란 것이
아무리 보아도 농부의 아낙 같지가 않았다.
변홍의가 매초풍을 끌어다가 자리에 앉힌 뒤 술 한 잔을 따르면서 입을 열었다.
"아씬, 사내도 아니면서 남의 아낙네는 왜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지요?"
매초풍은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웃으면서 안주만 집어먹었다. 변홍의가 다시 입을 열었
다.
"아씬 소문난 철시이시라 벌써 이상한 점을 발견했나 보군요. 이 몇 집의 농호에는 모두 오
혈궁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모두 산밑을 지키면서 이목(耳目) 노릇을 하고 있답니다."
매초풍이 눈치 빠르게 설명해 주는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두 사람은 한바탕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매초풍은 이날 밤에만은 마공을
연마하러 나가지 않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그것은 오혈궁 문하의 사람들을 해치게 되면 시
끄러운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행장을 꾸려 가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살펴보니 사방에서 꽃향기가 풍겨 오고 들토끼며 여우들이며 여러 가지 동물
들이 수시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딜 가나 그 풍경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삼림 속의
공기가 아주 맑고 햇빛이 잘 스며들어 썰렁한 감이 조금도 없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아주 감탄하면서 이런 곳에서 며칠 묵으며 노니는 것도 인간 선경(仙境)
같은 일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정오쯤 되었을 때 그들 두 사람은 다리쉼을 하면서 요기를 하였다.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오혈궁이 이처럼 은밀한 곳에 있으니까 숱한 사람들이 다 찾아내지 못하는 게로군요."
"찾아가려고 해도 산속에서 길을 잃기가 십상이죠. 내가 길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이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맬 겁니다."
"그렇겠어요. 산에 나무가 서 있는데도 진법(陣法)이라는 게 있지요. 유감스럽게도 난 도화
도에 있을 때 기문술(奇門術)을 열심히 배워 두지 않았지요.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별로 어
려울 것도 없었을 텐데."
매초풍이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만일 사부님께서 이곳에 있다면 아무리 복잡하고 괴상한 진법이라도 다 알아낼 거예요."
변홍의가 깜짝 놀라면서 속궁리를 하였다.
'오혈궁 주위는 몇백 년을 경과해서야 농군 산에 이런 대진(大陣)이 이루어졌는데 그 아무
리 총명한 황약사일지언정 어찌 그 진법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서야 변홍의가 말하던 '오혈문'에
당도하였다. 그것은 한 절간이었다. 녹색 기와 밑에 붉은 서까래를 대었고 붉은 문에 회색
담장을 한 아주 웅위로운 건물이었다.
변홍의와 매초풍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뜨락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 있었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 여러 해 동안 승려들이 거주하지 않은 빈 절 같았다. 변홍의가 절 옆에
있는 방문을 가리켰다.
"이리로 해서 들어갑시다."
그 방에 들어서자 변홍의는 왼쪽에 서 있는 신상(神象)이 틀어 쥔 패검을 절반쯤 잡아 뽑았
다. 그러자 우릉우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방바닥의 석판이 내려앉으면서 시꺼먼 동굴이 나타
났다.
변홍의가 먼저 뛰어들어가서 매초풍을 끌어들였다. 그러자 다시 석판이 제자리에 올라가 붙
는 것이었다. 변홍의가 어디에서 구했는지 횃불 한 자루를 켜들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똑똑
히 보였는데 동굴 양쪽에는 괴석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처에 또 다른 동굴들이 있었다.
변홍의가 앞에 서서 그중의 한 동굴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몇 굽이를 돌았는데 매번 길이
교차될 때마다 변홍의는 잠깐씩 어떻게 갈 것인가 하고 궁리를 하곤 하였다.
매초풍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오혈궁은 과연 신비한 곳이로구나. 길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 한평생 헤매어도 찾아가
지 못할 것이다.'
약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나서야 앞에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조금 더 가니 동굴 안이 넓
어져 마치 대청마루에 선 것 같았다.
드디어 출구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앞에 운무(雲霧)가 가득 차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다.
변홍의가 걸음을 멈추더니 매초풍에게 말하였다.
"아씬 이곳에서 하룻밤 기다리십시오. 제가 내일 사형 여혈의를 데리고 오지요."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 앞이 오혈궁인가요?"
"그렇죠. 이곳으로는 본 문의 제자들이 자주 드나드니 절대 굴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는 안
돼요. 이곳에는 크고 작은 동굴이 백 개는 될 테니까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괜찮지만 길을
잃지는 마십시오."
변홍의는 재삼 당부하고 나서 동굴 밖으로 나가더니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매초풍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괴석들만 서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양측에
있는 동굴에는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거미줄만 가득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해 동안 사람
이 다니지 않은 것 같았다.
오로지 출구 양옆의 암벽에만 수많은 횃불들이 걸려 있었는데 오혈궁의 제자들이 이 동굴로
드나들 때 조명용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 오고 굴 밖의 운무는 더욱 짙어졌
다.
굴 안은 이제 손을 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매초풍은 횃불 한 자루를 켜들고
천천히 굴 안을 거닐었다. 굴 안은 그녀의 가벼운 발자국 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시간이 길어지자 매초풍은 다소 초조해졌다. 어느 한곳을 찾아 조용히 무공을 닦을 생각도
해보았지만 오혈궁의 제자들이 갑자기 들이닥칠까 봐 걱정되어 한곳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할일이 없어 갑갑해진 그녀는 횃불을 들고 가까운 옆 동굴 어귀로 다가갔다. 그녀는
심심함을 달래려고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곧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그녀는 좀더 큰 다른 동굴을 찾아 들어갔다. 횃불의 화염에 거미줄이 타자 크고 작
은 거미들이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고 굼뜬 놈들은 타죽었다.
이 동굴에는 양벽에 곁가지를 친 다른 동굴들이 아주 많았는데 모두 거미줄로 덮여 있었다.
'표기를 해놓을 필요도 없겠구나. 돌아올 때 거미줄이 없는 곳을 따라가기만 하면 길을 잃
지는 않겠어.'
매초풍은 담이 커져서 사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괴석과 거미말고 그녀가 발견한 것은 아
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다가 동굴 천장에 불룩 튀어나온 암석에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하였
다. 불빛에 비쳐 천장을 살펴보니 그 암석에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오혈궁의 중요한 곳, 들어가는 자는 죽는다.(吳血官重地, 入者死)>
그 다음에는 오른쪽을 향하여 화살표가 나 있었다. 매초풍은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따
라 오른쪽으로 가 보았으나 오로지 암벽이 보일 따름이었다.
매초풍이 횃불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암벽에는 푸른 이끼들이 한 벌 덮여 있었다. 이처럼
건조한 곳에 이끼가 자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매초풍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손을 들어 그 이끼를 만져 보았다. 과연 위장물로 만들어 놓은 가짜 이끼였다. 그녀는 그것
을 들춰보았다. 그러자 네모난 석문이 보였고 그 위에 주홍빛 글자로 '오혈궁 중지, 입자사
(吳血官重地, 入者死)'라고 씌어 있었다.
매초풍이 비웃는 투로 중얼거렸다.
"오혈궁의 중요한 장소라니……? 어떤 보물들이 있나 한번 들어가 보자."
매초풍이 석문을 힘껏 떠밀자 문이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갑자기 안으로부터 독한 공기가 훅 몰려와 매초풍은 하마터면 구토를 할 뻔하였다. 그녀는
급히 횃불을 휘저어 독한 공기를 몰아 버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안은 평편하게 길
이 나 있었다. 그곳은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파고 깎아 낸 흔적이 역력했다.
삼사 장쯤 들어가니 양측에 석감(石龕)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열일
곱째 석감 속에서 매초풍은 앵두만큼 큰 진주 한 개를 주웠다. 그것은 매끌매끌하고 질이
아주 좋은 진주였다.
'이 석감은 아마도 오혈궁에서 보물을 감취 두는 곳일 텐데 보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모
양이군. 이 진주는 보물을 옮겨 갈 때 떨구고 간 것이 분명해.'
매초풍은 계속 안으로 들어가다가 양옆에 놓인 석실 두 개와 돌탁자 그리고 돌걸상을 발견
하였다. 그녀는 또 쇠난간이 가로막힌 한 동굴 입구를 발견하였다.
쇠난간은 그리 단단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쇠난간을 구부리고 그 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물건이 그녀의 발 밑으로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길이가 한 자도 넘는 큰 쥐였다. 그 놈은 한동안 달아나더니 돌아서서 흉한 눈길로 매초풍
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방금 주워 들었던 진주를 그 놈에게 던졌다. 그러자 그 쥐는 돌아서서
잽싸게 안으로 도망갔다. 매초풍은 진주를 다시 주워 들고는 그 놈을 바싹 뒤쫓았다. 그 늙
은 쥐는 바삐 도망가다가 제 굴을 찾자 쏙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쥐 굴속에 진주를 던져 넣으며 소리쳤다.
"네 놈이 어디 다시 나오는가 보자!"
갑자기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얏?"
매초풍은 깜짝 놀라 등줄기에 식은땀을 쭉 흘렸다. 그녀는 급히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
서 미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몸을 홱 돌렸다. 그녀는 왼손에 횃불을 쥔 채 오른쪽 장으
로 한 방 먹였다. 먼저 한 방 먹인 다음에 사람인지 귀신인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매초풍의 눈앞에는 사람은 고사하고 귀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찾고 있는데 앞에서 또 그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말해. 넌 누구냐?"
매초풍이 얼른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장 남짓한 거리에 있는 맞은편 석벽 아래
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봉두난발이었고 온 얼굴에 땟자국이 가득하였으며 죽
은 사람처럼 낯색이 창백하였다. 두 눈은 아주 크기는 하였지만 정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불빛에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늘게 뜨고 쉰 듯한 목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넌 누구냐? 대답하지 않다가는 용서 없을 줄 알아라!"
그 사람이 손에 무슨 암기를 들고 뿌리려 들었다.
매초풍은 경계 태세를 갖춘 뒤 대답했다.
"난 매초풍이라 부르고 강호에서는 날 철시라고 부른다."
"철시?"
그 사람은 한 번 되뇌이더니 머리를 가로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걸. 휴, 여러 해가 지났으니 그럴 법도 한 일이
지. 철시, 임잔 그래 오혈궁 궁주 묘상을 만나 본 적 있나?"
"본 적 있지요."
"그의 나이가 얼마라던가?"
"아마 쉰 살쯤 되었겠죠."
매초풍은 변홍의한테서 묘상의 나이를 알았던 것이다. 그 말을 듣더니 그 사람은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놈이 날 이곳에 십팔 년이나 가두었구나. 오 그렇지, 그 놈이 날 아홉 번 보러 왔
었지."
매초풍이 매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왜 당신을 가두었나요? 바깥 문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도망가지 못하는 거지
요?"
그 사람이 코방귀를 뀌더니 천천히 일어나는데 떨렁떨렁하는 쇳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
사람의 허리에는 세 치 두께는 됨직한 쇠고리가 채워져 있었고 그 쇠고리에는 다섯 개의 굵
다란 쇠사슬이 달려 있었다. 쇠사슬의 한쪽은 석벽에 있는 다섯 개의 동굴에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그 사람은 매초풍을 향하여 몇 발자국 걸어오다가 쇠사슬 때문에 더 오지 못하고
멈추었다.
"묘상이란 놈은 심보가 독사보다도 더 지독한 놈이어서 한 사람을 가두어 놓으면 날개가 돋
쳤다고 해도 도망가지 못해."
매초풍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십팔 년이나 갇혀 있었다는데 그동안에 쇠사슬을 땅바닥에 문질렀다면 벌써 끊어져
버렸을 것이고 이런 고생도 안 했을 게 아닌가요?"
그 사람이 괴상한 소리로 웃어대더니 허리를 굽혀 끊어진 쇠사슬 서너 오리를 집어들어 보
여주었다.
"아가씨, 임잔 날 바보로 아나? 난 이곳에 갇힌 날부터 잠자는 시간을 내놓고는 하루도 멈
추지 않고 이 쇠사슬을 갈았었네. 하지만 그 묘상이란 놈은 시간가지 미리 계산해 두었던지
내가 마지막 쇠사슬을 끊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날 보러 와서 다시 새 쇠사슬로 갈아채우곤
했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쇠사슬을 갈아 끊어 버렸는지 잘 모를 거네."
그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쇠사슬 토막을 획 던져 버렸다.
"십팔 년 동안에 그 놈이 당신을 아홉 번 찾아왔다니까 이 년마다 한 번씩 왔겠군요. 그 이
년 동안에……."
"묘상이란 놈이 아주 계산을 정확하게 하더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 쇠사슬은 원래 병
장기를 만들 쇠붙이라 아주 굳은 물건이라네. 이런 물건으로 날 대처한 것은 그 놈이 나의
공력으로는 이태 사이에 이 다섯 줄의 쇠사슬을 다 끊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자는 정말 지독한 놈이군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놈이지. 날 잡았으면 아예 시원히 죽여 버릴 일이지 빛도 들지 않는
동굴 속에 가두고 이처럼 고독에 시달리게 한단 말이야. 이 십팔 년 동안에 그 놈은 아홉
번밖에 오지 않았지만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네. 그래 나는 암벽에 대고 매일 혼잣말
로 중얼거리거나 미친 듯이 웃곤 하였네. 아가씨는 십팔 년 동안에 내게 말을 건 첫번째 사
람일세. 고맙네!"
그 사람이 손을 잡으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사람의 두 손은 닭의 발처럼 어지러웠고 손
톱이 반 자나 되게 자라 있었다.
매초풍은 진저리를 치며 뒷걸음질하여 암벽에 등을 기댔다.
그 사람은 두 눈을 감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아가씨, 내가 임자를 만지게 해주게나."
매초풍이 깜짝 놀라 횃불을 내밀며 소리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그러잖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그 사람이 흠칫 물러서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뜨거운가? 불이지? 어서…… 어서 치우게. 견디지 못하겠네."
매초풍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불꽃이 살에 닿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두려워하는
걸 보면 그가 십팔 년 동안이나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다 보니 광선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해진 것이라 여겨졌다. 그 사람이 낯을 돌리며 두 눈까지 꽉 감는 것을 보면 불빛을 눈
으로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게 틀림없었다.
매초풍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긴장이 약간 풀리면서 그녀는 그 사람이 쇠사슬에 매여 있어
처음부터 자기를 붙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자 은근히 부끄러웠다.
"아가씨, 죽지 않으려거든 어서 고분고분 그 횃불을 던져 버려!"
그렇게 소리치며 그 사람은 돌 두 개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매초풍의 양쪽 암벽에 깊숙이
날아와 박혔다. 매초풍은 깜짝 놀라 진기를 운행시키면서 뜻밖의 상황에 대처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돌멩이를 더는 던지지 않았다.
"아가씨, 난 임자를 볼 수는 없지만 능히 사경에 몰아넣을 수 있네. 그러니 내 말을 들어야
해."
매초풍은 눈알을 크게 굴리며 두려워하는 척 꾸며대었다.
"여보세요. 호한 나으리, 날…… 해치지 말아요!"
"호한이라구? 그래 내가 사내인가 여인인가 똑똑히 보라구."
"당신…… 당신은 사내가 아닌가요?"
"나도 임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야. 나도 젊었을 땐 이 오혈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어.
그땐 묘상이란 미친 놈이 개처럼 종일토록 나를 감싸고 돌았었지. 하지만 그 놈은 일단 자
기 손 안에 날 넣게 되자……."
그 사람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원래 당신은 묘상의 부인이었군요. 그런데 그 놈이 왜 이리도 당신한테 무정한가요?"
"그때 묘상은 아직 궁주가 아니었고 무예도 나보다 못했었네. 그래서 그 놈이 날 무척 좋아
하였다네. 난 그자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놈한테 하가(下嫁) 하고 말았지."
매초풍이 속으로 비웃었다.
'하가라니? 공주도 아닌 주제에 하가가 뭐야?'
그 사람은 마치 매초풍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전임 오혈궁 궁주 도천룡(屠天龍)의 외동딸 도소정(屠素貞)이고, 묘상은 오혈궁의 사
형이었을 따름이야."
도소정은 마치 오랜 원한을 털어놓듯 그녀가 갇히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오혈궁 궁주의 외동딸 도소정이 묘상에게 시집간 지 석 달이 채 못 되어 궁주인 도천룡은
병환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궁주는 그 지위를 절대 남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오
혈궁의 규칙에 따르면 무공이 가장 높은 제자가 궁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도소정은 무공을 놓고 말해도 궁에서 첫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궁주는 마땅
히 그녀의 차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묘상은 자기가 궁주 노릇을 하고 싶어 그녀더러 도와달
라고 사정을 했고 그녀는 물론 그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소정이 궁주로 취임하기 전날 뜻밖의 일이 생겼다.
아침에 도소정은 대전(大典)에 쓸 물품들을 준비하라고 분부하고 있는데 한 제자가 와서 어
떤 여인이 뛰어들어 왔다고 보고를 올렸다. 오혈궁은 아주 신비한 곳이어서 오혈궁의 제자
를 내놓고는 감히 찾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긴 도소정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 보니 스무 살도 안 된 노랑머리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눈이 서글서글하고 눈썹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살결이 백옥 같은 절
제 미인이었다. 도소정도 오혈궁의 여자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그 여자애
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주빛 나는 옷을 입고 있는 그 여자애는 수심이 비낀 얼굴
이 아니었으면 하늘의 선녀가 내려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여자는 적수공권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오혈궁의 제자를 여섯이나 때려눕혔다. 여자
애는 힘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혈궁의 한 제자가 그 여자애에게 한 장을 얻어맞고 두
장도 넘는 곳으로 날아갈 정도였다. 그 여자의 힘에 내심 놀란 도소정은 세 사형 가운데서
가장 나이 어린 노로의에게 맞서 싸우라고 시켰다.
노로의는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오혈궁의 제자들 가운데서 무예가 열 번째 안에 들었다. 그
래서 노로의가 나이가 어린 그 여자애 정도는 거뜬히 막아내리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생
각 외로 노로의는 그 여자애와 거푸 열 합도 채 싸우지 못했는데 벌써 맥을 못 추었고 열
합쯤 더 지나자 여자애의 '군리퇴(裙里腿)'라는 초수에 걸려 나뒹굴고 말았다. 그제야 도소
정과 오혈궁의 제자들은 대단한 적수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도소정이 그 여자애와 맞붙었다. 여자애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았고 오혈장과 오
혈도의 무공도 괜찮았던 도소정은 그 어떤 일류가는 고수들 못지않다고 스스로 자신하고 있
었다.
여자애는 도소정의 무공이 고강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병장기를 번쩍거리면서 달려들었다.
그 여자애의 병장기는 두 자 남짓한 길이를 가진 자줏빛의 반투명한 몽둥이로 금강석처럼
굳은 자정신침(紫晶神針)이라는 병장기였다. 여자애는 그 자정신침을 마구 휘둘렀는데 얼핏
보면 무질서하게 휘두르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검술이나 도술처럼 초수가 있었고 무시로 상
대의 혈도를 찔러댔다. 오혈궁의 무공도 아주 괴이한 편인데 그 여자애의 무공은 괴이하면
서도 아주 복잡했다. 그 여자애가 쓰는 초수는 갈수록 괴이했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겸한 공
격의 기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소정은 오혈궁의 궁주가 전문으로 쓰는 오혈도를 빼들고 온갖 초수와 절기를 다 써 가지
고서야 겨우 그 여자애와 비길 수 있었다.
여자애는 오랫동안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자 도소정에게 소리쳐 물었다.
"당신은 누구길래 함부로 날 막는 거요?"
도소정 역시 화가 치밀었지만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봐, 임잔 원래 벙어리가 아니었구만. 나는 임자가 벙어리인줄 알고 잡아다가 기생집에 팔
아넘기려 했네."
그 여자애는 도소정의 말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좋아, 내가 먼저 네 년을 죽인 다음 묘상까지 죽여 버릴테다!"
도소정은 그 여자애의 입에서 묘상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넌 왜 그 사람을 죽이려고 그러느냐?"
그러자 여자애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하였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난 그 박정한 인간을 죽여 버릴테에요!"
도소정은 그 여자애의 말속에 무슨 까닭 모를 사연이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는 손을 멈추었
다.
"묘상은 내 남편이야. 할말이 있으면 툭 털어넣고 시원히 얘기해 봐."
그러자 여자애의 낯빛이 확 달라지며 이를 악무는 것이었다.
"하긴 잘하는구나. 묘상 그 놈이 감히 장가를 들다니? 내 그놈을 육장을 만들어 버릴테다!"
"여봐, 아가씨, 왜 그 사람을 그렇게 미워하나? 그가 장가를 가든말든 임자가 무슨 상관이
지?"
그러자 여자애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자는 나한테 청혼하면서 감언이설을 다 늘어놓고 또 우리 가문의 무공까지 배웠는데 무
엇 때문에 당신한테 장가든단 말이오? 그 놈은 날 속였어요!"
순간 도소정은 벼락을 맞은 듯이 정신이 아찔했고 뒤미처 화가 버럭 치밀어 올랐다.
"아씨, 그렇다면 임자가 손쓸 것도 없이 내가 죽여 버리겠네."
그때 묘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묘상은 그 여자애를 보더니 낯색이 새파래져 가지고 안절부
절못했다.
"첩비, 당신이구만……. 어떻게 여길 다 찾아왔소?"
여자애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무조건 자정신침으로 묘상을 들이찔렀다. 급한 김에 도소정이
오혈도로 그걸 막으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난 오혈궁 궁주 도소정이다. 오혈궁은 무림의 금지 구역으로서 외인이 이곳에서 방종하게
구는 걸 허락지 않는다!"
여자애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묘상이 앞질러 도소정에게 말하였다.
"부인, 저 사람은 엽첩비(葉牒飛)라고 부르는데 노마(老魔) 엽삼살(葉三殺)의 딸로서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노마 엽삼살은 전문적인 사공(邪功)을 닦는 흑도의 인물로서 오 년 전에 이미 무림의 군웅
들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난 자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딸이 그곳에 다시 나타났으니 모두들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도소정은 남편이 그녀가 사연도 말하기 전에 엽첩비와 아무런 관계가 없노라고 딱 잡아떼는
건 뒤가 켕겨서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도리에 어긋나는 건 도저히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
미를 가진 도소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묘상, 난 당신이 저 여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왜 하필 그 말부터 하는
거예요?"
그러자 묘상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엽첩비는 얼굴이 온통 눈물 범벅이 된 채 울부짖었다.
"묘상아, 네 놈은 지독하구나. 난 뱃속에 너의 어린애까지 임신한 터인데 네가…… 감히 날
배반한단 말이냐!"
그 여자애는 몸을 훌쩍 날려 도소정의 머리 위를 넘어서며 자정신침으로 묘상의 정수리를
갈겼다. 묘상이 황급히 도소정의 뒤로 몸을 숨기며 애걸했다.
"부인, 저 년이 미쳤군요. 어서 쫓아버리시오!"
웬일인지 도소정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져 그 여자가 임신까지 했다는 말을 들었
는데도 분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서 도소정은 말없이 제자들과 함께 엽
첩비를 오혈궁에서 몰아냈다. 처음에는 엽첩비가 애를 낳지 못하도록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
데 그녀의 무공이 실로 괴상하고 초수가 많아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오혈궁의
제자가 둘이나 엽첩비에게 맞아죽었다. 그들은 겨우 그녀를 산에서 쫓아냈다.
엽첩비를 물리친 도소정은 묘상에 대한 심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그녀는 묘상을 일단
가두어 놓고 곰곰이 궁리를 했다.
하지만 묘상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내
색을 하지 않고 도소정을 안심시킨 다음 틈을 보아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다.
묘상은 자기가 미안한 일을 하였다면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차갑게 굳어 버린 도소정의 마음을 다시 돌려 세울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묘상을 살려 두
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묘상은 다음날이 그녀가 궁주 자리를 물려받는 기쁜 날이니 자
기는 그녀가 궁주가 된 다음에 죽을 생각이며 더욱이 그 스스로 목숨을 끊겠노라고 말하였
다.
그러자 노로의 등 오혈궁의 제자들도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권고하였다. 도
소정 역시 기쁜 날에 피를 보기가 싫어서 잠시 그를 살려 두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묘상이 갑자기 도소정의 침실로 뛰어들었다.
"널 이미 가두었는데 누가 널 내놓았느냐?"
도소정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자 묘상은 음흉한 웃음을 띄우면서 대답하였다.
"임잔 알 필요가 없어."
도소정은 대로하여 일어나 그를 제압하려 했지만 웬일인지 조금도 맥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녀에게로 다가온 묘상은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오늘 저녁 임자가 마신 술에 마약을 넣었으니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도소정은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반항하려 했으나 그건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묘상
에게 속수무책으로 한바탕 짓밟히고 말았다. 그녀는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기도 하고 화
가 나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묘상, 이 놈아. 네 놈이 감히 나의 제자들과 짜고 나를 해치다니……. 넌 기필코 제 명에
죽지 못하게 될 거다!"
묘상은 그녀의 욕설에 냉소하더니 일어나서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
혈을 찔러 놓았다. 그런 다음 도소정을 이곳에 업어다 놓았던 것이다. 도소정은 그곳에 감추
어 두었던 오혈궁의 보물들이 이미 그림자도 없이 몽땅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믿었
던 노로의가 그와 한패가 되어 쇠사슬과 쇠고리를 준비한 것도 알게 되었다. 묘상의 무리들
이 그녀를 쇠사슬에 얽매어 놓자 도소정은 그만 너무 화가 나서 까무라치고 말았다.
도소정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동굴 안에서는 횃불이 타는 소리만 들
릴 뿐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도소정이 갑자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서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렸다.
졸졸졸―.
미약한 물소리가 들려 왔다. 실날 같은 물줄기가 천장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입
을 벌리고 그 물을 받아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줄기는 이내 그치고 말았다.
매초풍은 이 늙은 여인의 귀가 그처럼 밝은 데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소정은 감
칠 맛 나게 목을 축이고 나서 흐뭇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거 물맛 참 좋구나!"
"도 궁주, 당신은 매일 이렇게 물을 먹나요?"
"낮인지 밤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정한 시간이 되면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러면
얼른 물을 마셔야 하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십팔 년 사이에 아마 목이 말라 죽었을 거
네."
그때 갑자기 살찐 쥐 한 마리가 도소정의 발 밑으로 기어왔다. 매초풍은 그녀의 발 밑에 피
묻은 자그마한 고깃덩이 한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쥐가 고깃덩어리를 덥석 물었
다.
도소정이 재빠르게 손으로 그 쥐를 붙잡자 늙은 쥐는 찍찍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냉소를 머
금은 도소정이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벌리고 늙은 쥐의 대가리를 물어 끊어서는 아
작아작 씹어 삼키는 것이었다.
순간 매초풍은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고 말았다. 매초풍이 토하자 그 냄새를 맡고
십여 마리의 쥐가 모여들었다.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독룡은편을 꺼내 그 쥐들을 단박
에 때려잡았다.
도소정은 늙은 쥐 한 마리를 먹고 나서 또 매초풍이 때려잡은 쥐들을 한데 모아 놓고는 히
히거리고 웃었다.
"거 참 묘한 방법인걸. 난 그같은 방법은 생각도 못했었네. 이젠 오랫동안 굶지 않게 됐군."
도소정은 이렇게 말하더니 연거푸 쥐를 두 마리나 삼켜 버렸다.
매초풍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긴 하였으나 쥐를 뜯어먹는 도소정을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
어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당……당신은 그래 쥐…… 쥐를 잡아먹는단 말이에요?"
"묘상은 날 기갈에 시달려 죽게 하려 하지만 난 죽지 않았네. 그 놈이 먹을 걸 보내 주지
않으니 난 쥐를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네. 그 놈이 매번 쇠사슬을 바꾸러 올 때마다 내
가 살아있는 걸 발견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란 기색을 지어 나로 하여금 너털웃음
을 웃게 하곤 했지. 지금까지도 그 놈은 내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모르고 있네. 흥, 내
가 살아 있는 한 그 놈의 궁주 자리는 안전하지가 못하지!"
"유감스럽게도 그 놈이 이젠 오혈궁의 궁주가 되었고 당신은 이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군요.
당신이 그 놈을 죽이겠다고 하지만 결국 죽게 될 사람은 당신인걸요."
도소정은 매초풍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지 음침한 낯빛으로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매초풍
이 조금 미안한 감을 느끼며 말문을 돌렸다.
"그 뒤는 어떻게 됐나요?"
"그 뒤로 그자가 나를 아홉 번 찾아왔고 지금 이렇게 임자를 만났을 따름이야. 이게 나의
지난날의 일이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매초풍은 횃불의 기름이 거의 다 되어가는
것을 보자 급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불이 꺼지기만 하면 이 동굴 속에 갇혀 버리기 십상이
기 때문이었다.
"여봐, 아가씨, 어딜 가는 거야? 이리로 돌아와!"
도소정은 큰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매초풍은 이미 두 장 남짓
도망하였고 민첩하게 몸을 피해 가며 쇠난간을 빠져 나왔다. 돌 몇 개가 쇠난간에 부딪쳐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매초풍은 도소정이 미친 듯이 부르짖든 말든 오던 길을 따라 제자리를 향해 갔다. 몇 개의
동굴을 지났지만 도소정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 왔다. 그것을 통하여 매초풍은 도소정의
내공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매초풍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섰다. 도소정의 목소리가 아주 가느다랗게 들려 왔다.
"아가씨……, 임자가…… 만일 날…… 구해 준다면 좋은 점이 아주 많아……."
매초풍은 그 말에 마음이 동하였다.
그녀는 동굴 어귀에 와서 새 횃불 한 자루를 켜들고 또 몇 자루를 예비로 가지고 오혈궁의
금지 구역으로 다시 도소정을 찾아갔다.
다시 돌아온 매초풍을 보자 도소정은 생기를 띤 얼굴로 반겨주었다. 그녀는 이미 입술이 새
빨갛지 못하고 이빨도 희지 못했으며, 두 눈에 정기도 없었지만 젊었을 땐 확실히 미인이었
으리라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가씨, 임잔 이 고독한 여인을 버리지 않았어. 임잔 정말 맘씨가 좋아. 임……임자 이름이
뭐지? ……오, 임자가 이미 말했었지, 철시 매초풍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악독한 별호가
임자한테 어울리지 않아."
"도소정, 당신은 나가서 오혈궁 궁주의 보좌를 되찾으려는 거지요?"
"그래 맞았어. 오혈궁의 궁주는 원래 나야. 매초풍, 임자가 날 풀어 주고 내가 다시 궁주가
되는 걸 도와만 준다면 난 임자의 그 어떤 요구라도 들어줄테야."
"오혈장과 오혈도의 초수가 아주 무시무시하던데 난 그걸 이기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도소정의 낯빛이 확 달라졌다.
"난 오혈장과 오혈도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걸 이기는 방법은 없네."
그러자 매초풍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듣자니 초혈궁 무공을 이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대대로 그것은 궁주만이 알고 있다
고 하더군요. 묘상은 권력을 찬탈한 궁주이기 때문에 그 방법을 모르고 있는 거지요. 하지만
당신은 전임 궁주의 딸이기 때문에 분명 당신은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게 날 풀어 주는 조건인가? 나의 아버지는 확실히 오혈궁 무공을 이기는 방법을 나한테
전수해 주었었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가 궁주가 되기를 희망하였던 까닭이네. 좋아, 내가
임자의 요구대로 하지. 그런데 먼저 날 풀어 주어야겠네."
"당신은 심장이 돌보다도 더 굳은 여자예요. 만일 내가 당신을 풀어 놓으면 당신은 날 먼저
죽여 버릴텐데 그렇게 되면 내 발등을 찍는 격 아니겠어요?"
"하지만 나도 임잘 믿을 수 없네. 만일 내가 본 문의 무공을 이기는 방법을 전수해 준 다음
자네가 그대로 가 버리면 나도 공연한 헛수고가 아닌가!"
"도소정, 당신은 좀 똑똑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당신이 나한테 청을 드는 건가요, 아니면
내가 당신한테 청을 드는 건가요?"
매초풍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되돌아 나오려 했다.
"잠깐만!"
도소정이 급하게 부르자 매초풍은 멈추어 선 채 돌아보지는 않았다.
"임자가 그렇게 맵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내가 임자의 요구대로 대답해 주겠네."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은 속으로는 매우 기뻤으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려 세
웠다.
"어서 말씀하세요."
"하지만 나도 타산이 있네. 내가 먼저 자네한테 오혈궁 장법을 이기는 법을 전수하면 자네
가 날 풀어 주어야 하네. 그러고 나서 다시 오혈궁 도법을 이기는 법을 전수해 주도록 하
지."
매초풍이 속궁리를 해보고 나서 대답했다.
"공평하고 합리적인 생각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다른 수작을 부려서는 안 돼요."
도소정은 하는 수 없이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하나하나 자세히 전수하여 주었다. 매초
풍은 원래 총명한 여인이어서 두어 번 되풀이해 주자 그것을 완전히 기억하였다.
"매초풍, 이젠 자네의 낙언을 실천해야지."
"그런데 당신을 어떻게 풀어 주지요?"
"임자가 갖고 있는 단도나 단검을 나한테 주게. 그러면 나의 공력으로 얼마든지 이 다섯 개
의 쇠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네."
매초풍은 머리를 끄덕이며 허리춤을 만지는 척하다가 당황해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어떡하나? 내 단도가 없어졌네."
그러다가 도소정을 보며 말했다.
"이러면 어때요? 당신이 나한테 오혈도법을 이기는 초수를 마저 전수해 주세요. 그러면 내
가 단도를 찾아와서 당신을 구해 드리겠어요."
도소정은 매초풍의 잔꾀를 눈치채고 노발대발하였다.
"매초풍, 그래 나를 놀릴 셈이냐? 흥, 날 풀어 주지 않고서는 오혈도를 이기는 초수를 배울
생각을 마라!"
매초풍은 자기의 잔꾀가 드러난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도소정과 함께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
단했다. 그리하여 도소정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후닥닥 도망치면서 그녀를 비웃었다.
"도 궁주, 내가 단도를 찾아 가지고 당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도소정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으며 연거푸 돌을 집어 던졌으나 매초풍은 벌써 옆에 난 동
굴 속으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매초풍이 동굴 어귀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도소정한테서 오혈
장을 이기는 초수를 배운 것이 매우 기뻤다. 그녀는 몇 번이고 거듭 연습해 보면서 잘 기억
해 둔 뒤 암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새벽 안개가 동굴 속으로 스며들 때 매초풍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동굴 어귀 밖으로부
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듣고 급히 암석 뒤에 숨었다.
두 사람이 굴속으로 들어왔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아씨, 아씨! 어서 나오세요."
변홍의의 목소리였다. 매초풍이 암석 뒤에서 나가 보니 변홍의와 여혈의가 서 있었다.
"여 공자, 과연 당신이 오셨군요. 전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여혈의는 붉은 비단으로 지은 새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차가운 눈길로 매초풍을 쏘아보며
물었다.
"철시, 이 여 모를 찾아와 뭘 하려우?"
"왜요, 일없이 찾아와선 안 되나요? 만일 제가 당신을 그리고 있었다면 안 기쁘신가요?"
"철시, 임잔 똑똑히 알아두어야 해. 본 궁의 제자가 아니고서는 제멋대로 오혈궁에 들어오면
죽어야 하는 거야! 흥, 임잔 이제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변홍의가 매초풍의 곁에 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씨, 절대 이 여 사형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분은 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성미랍
니다."
매초풍이 깔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알고 있어요. 여혈의, 당신은 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사나이인데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낙
언한 일이 있지 않아요. 당신이 날 어떻게 하는가 두고 보겠어요."
변홍의가 급히 여혈의의 곁으로 가 변명을 하였다.
"사형, 저 아씨는 농담을 좋아하니까 달리 생각지 마시우."
그리곤 변홍의는 여혈의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여혈의가 매초풍은 노려보더니 갑자기 칼을 뽑아 들고 매초풍의 가슴을 겨누면서 소리 질렀
다.
"매초풍, 내가 낙언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로 핍박할 셈이냐!"
매초풍은 태연자약한 자태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희고 긴 중지로 칼끝을 가
볍게 밀어내고는 변홍의한테 말했다.
"변 공자, 밖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세요."
변흥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굴 밖으로 나갔다.
"여혈의, 난 당신한테 한 가지 일을 알려 드리려 해요. 해검계의 무예시합 때 당신들의 묘
궁주는 안전하게 도망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뜻밖의 일이 생겼던 거예요. 눈에 보이는 창은
쉽게 피할 수 있지만 암전은 막아내기 힘들거든요. 가장 긴요한 대목에 유엽표창 한 대가
날아와 하마터면 묘 궁주의 생명이 위험할 뻔했어요."
"그 당시 나는 그 장소에 없었소. 그 뒤 사제들이 그 일을 얘기하더군. 그래서 지금까지 속
으로 잔뜩 벼르고 있는 판이오. 만일 내가 그 장소에 있었더라면 궁주께서는 절대 독약을
바른 표창에 맞지 않았을 거요. 그런데 임잔 이 일을 왜 끄집어내는 거지?"
매초풍이 품속에서 무슨 물건을 꺼내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었다.
"여 공자,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알 만한가요?"
그것을 본 여혈의는 금세 낯색이 변하였다.
"이 유엽표창은 궁주님을 맞힌 것과 꼭 같은 것이로구만. 그래 암전을 쏜 자가 임자란 말인
가?"
여혈의가 그 표창을 빼앗으려 하자 매초풍이 냉큼 물러나면서 말하였다.
"여 공자, 급하게 서두를 것 뭐 있어요? 그 표창은 해검계의 맞은편 기슭의 난석 속에서 날
아왔고 그때 사람들은 격전을 치르느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지요. 오혈궁의 제자들은 전진
파들이거나 개방 사람들이 매목한 줄로 알고 있지만 전진파와 개방 사람들은 전혀 내막을
모른단 말이에요. 여 공자, 이 유엽표창의 임자가 누군지 알고 있나요?"
여혈의가 눈을 희번득거리면서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나?"
"남이 모르는 줄 알고 수염을 쓰다듬을 작정이군요. 표창을 던진 자는 귀신도 모르는 줄 알
고 있을 테지만 그때 또 한 사람이 난석 속에 숨어서 그것을 똑똑히 보았단 말이에요."
여혈의가 칼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도대체…… 그가 누구요? 표창을 던지는 걸 본 사람이 누군가 말이야?"
"여 공자, 긴장할 게 뭐 있어요? 묘상을 해친 사람이 당신은 아닐 텐데요."
여혈의가 슬그머니 이마의 땀을 훔쳤다. 매초풍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오므리고 웃었
다. 그녀는 웃음 끝에 말을 이었다.
"표창을 던진 사람도 너무 긴장했던 탓으로 자기 왼쪽 켠에 있는 괴석 뒤에 한 여인이 엎드
려 있는 것을 보지 못했지요."
"그것도 여자란 말인가?"
매초풍이 웃는 얼굴로 자기 가슴을 쳐보이며 말하였다.
"그 여인이 바로 이 매초풍이에요."
여혈의는 하마터면 놀라서 훌쩍 뛸 뻔하였다. 그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심하게 도리질을 해
댔다.
"난 믿어지지 않아!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임잔 나를 속이고 있어!"
"당신은 원래 표창 두 개를 던지려 했어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두 번째 표창을 던지려 했
을 때는 손이 너무 떨려서 그만 난석 사이에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그러고서는 자신이 들키
지 않은 줄 알고 급급히 도망쳤어요. 그러기에 내가 이 유엽표창을 주울 수 있었던 거예요."
여혈의는 놀란 눈길로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점점 커지는 여혈의는 마치 낮도깨비
같았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생각에도 확실히 표창 두 대를 던지려 했던 것 같소. 그런데 내가 너무도 긴장했던 탓
에 두 번째 표창을 던지지 못했던 거요."
"묘상은 내상을 입은데다가 당신의 독이 발린 표창까지 맞았으니 활사인(活死人)과 마찬가
지의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목적을 달성한 셈이지요."
"하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고 게다가 능히 호통을 칠 수 있소. 난 아직도 그 사람 앞에서
개처럼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오. 더군다나 화가 나는 일은 노로의나 초천
의마저 나한테 선배로 자처하는 것이오!"
"만일 내가 추측하는 게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당신은 묘상을 암살하고 스스로 궁주 노릇
을 하려 한 것일테죠."
여혈의가 얼떠름한 기색으로 서 있더니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막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냉혹한 낯빛이 되어 매초풍을 쏘아보더니 불쑥 칼을 들
고 달려들었다.
"네 년이 모든 걸 알고 있으니 내 어찌 네 년을 살려 둘쏘냐?"
개가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고 여혈의의 이런 꼴을 미리 짐작했던 매초풍은 독룡은편을
뽑아 들고 칼을 막았다. 채찍 끝이 여질의의 오른쪽 눈으로 날아들자 여혈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매초풍도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혈의, 내가 당신을 이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도 오십 합 안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
할 거예요. 내가 소리를 치기만 하면 변흥의가 노로의와 초천의를 데리고 올 거예요!"
"그럼 내가 먼저 변홍의를 죽여 버리고 나서 네 년을 대처할 테다!"
그러나 매초풍이 여혈의보다 앞질러 동굴 어귀로 달려가 그를 가로막았다.
"운명이 점지하는 대로 따르란 말이에요. 여혈의, 소요관에서 당신이 내가 조종하는 대로 말
을 들었다면 이 오혈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를 이겨낼 수는 없을 거예요."
여혈의가 두 눈을 부릅떴으나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임자가 변홍의더러 이 여 모를 데려오게 한 건 꼭 나의 내막만을 파헤치기 위한 건 아닐
거야. 무슨 요구 조건인지 어디 말해 봐."
"조건은 단 한 가지에요.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날 오혈궁의 제자로 받아 주세요."
순간 여혈의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다시 한 번 말해 봐!"
매초풍이 방금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매초풍, 임잔 그처럼 큰 명성을 갖고 있는데 비굴하게 오혈궁의 제자가 되련다구? 임
잔……."
"난 동시와 싸우고 나서 헤어졌어요. 이젠 강호에 더는 흑풍쌍살이 없게 되었어요. 이 일은
즉시 온 강호에 널리 퍼질 거예요. 당신 말씀이 맞아요. 이 철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
을 거예요. 하지만 난 신공을 닦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요. 이제 난 고독한
몸이 되었으니 온 세상을 돌아다닐 때 오혈궁의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여혈의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기는 하였으나 반신반의 하였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철시라는 년은 궤계가 많은 여인이라 오혈궁에 받아들이면 뒤에 무
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그럭저럭 놔두고 일후 기회를 보아 죽여 버려 후
환을 없애도록 해야지.'
"좋아, 이 여 모가 최선을 다해 보지."
"최선을 다하는 문제가 아니라 꼭 되게 해야 해요. 내가 오혈궁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당
신도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게 될 거에요."
'이 년은 참 지독한 여인이로구나!'
여혈의는 다시금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매초풍이 변홍의를 불러들인 다음 여혈의에게 말하였다.
"여 공자, 우린 이곳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어요. 조금이라도 허튼 동정이 있으면 내가
더욱 무서운 수단으로 당신을 대처할 거예요. 당신이 담력이 있다면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요."
여혈의가 약속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굴을 빠져 나갔다. 평소에 오만하기로 소문난 사형
여혈의가 매초풍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을 보고 변흥의는 속으로 참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혈의가 동굴 밖의 운무 속으로 사라지자 변홍의는 매초풍의 곁에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고
재미를 보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매몰차게 변홍의를
와락 떼밀었다. 변홍의는 그녀를 몹시 사랑하고 있지만 한편 두려운 마음도 있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동굴 속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럭저럭 점심때가 되어 두 사람은 몹시
배가 고팠다. 매초풍은 아침식사도 못한데다가 어젯밤에 한바탕 토하기까지 했던지라 더더
욱 속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변홍의한테 요기할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짜증을
부렸다.
변홍의는 여러모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혈궁의 제자들은 바깥 세상에 나가서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지만 궁내에서는 규율이 엄격해서 식사시간이 되기 전에는 누
구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궁주님이나 세 사형의 허락없이는 아예
주방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후쯤 되었을 때야 여혈의가 돌아왔다.
"매초풍, 날 따라와!"
매초풍은 매우 기뻐하며 변홍의와 함께 동굴에서 나왔다.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서너 발자국 밖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혈의가 앞에서 길
을 안내하였다. 변흥의는 매초풍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이리저리 돌고 걷다가는 멈추어 서
기를 몇 번 하다가 갑자기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층계는 때로는 비탈을 지나고 때로는
수림을 뚫기도 하고 때로는 시내를 지나기도 했다.
드디어 큰 돌을 쌓아 만든 방대(方坮) 앞에 이르렀다. 매초풍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려 하자
변홍의가 얼른 붙잡았다.
"조심해요. 그 아랜 십칠팔 장도 넘는 벼랑입니다!"
매초풍은 그제야 이 방대 밖은 운무가 피어 오르고 있을 따름이지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
다. 그녀는 큰일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변홍의에게 교태 어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변홍의가
황홀하여 가만히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여혈의가 한옆에 다섯 사람이 둘러서야 안을 수 있을 만큼 큰 측백나무 위에 매어 있는 밧
줄을 풀었다. 살펴보니 길이와 너비가 일곱 자나 됨 직한 큰 나무상자가 아래위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상자는 방대의 변두리에 매달려 있었다. 여혈의가 그 상자에 올라
타자 변홍의도 매초풍을 부축하여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손목만큼 굵은 또 하나의 밧줄을 풀자 큰 상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주위는 온통 운
무로 꽉 차 있어서 구름을 타고 날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매초풍이 흥이 나서 말하였다.
"오혈궁에는 참 재미있는 물건이 많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서 제자가 될 걸 그랬어
요."
"매초풍, 묘 궁주를 만나거든 임잔 묘 궁주를 가만히 기습한 자가 운남 대리국 사람의 옷차
림새를 한 걸 보았다고 말하게. 그리고 더 알아보았더니 그자가 개방에서 청해온 대리국의
고수라고 말하게."
"왜 꼭 대리국의 고수라고 말해야 하나요? 개방 사람이더라고 하면 안 되나요?"
"본 궁에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개방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다 익숙히 알고 있지. 만일 남제
단황 나으리 수하의 사람이라고 하면 내막을 잘 모를 수 있거든."
진상을 전혀 모르는 변흥의가 물었다.
"아씨, 참말로 대리국의 고수가 묘 궁주를 암해하려 했나요?"
매초풍이 여혈의한테 힐끔 눈짓을 하였다.
"그런 것 같아요."
변홍의가 눈알을 굴리더니 웃었다.
"알 만해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본 궁의 제자가 되지 못할까 봐 그러는군요. 하지만 묘
궁주가 진상을 알게 되면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변흥의가 매초풍의 안위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자 여혈의가 말을 받았다.
"자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씬 아주 안전할 거야."
"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겠소."
이렇게 대답하는 변홍의의 어조는 아주 견결해 보였다. 매초풍도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난 변 공자를 믿어요."
큰 나무상자가 계속 하강하자 운무가 점점 옅어져 울창한 수풀 속에 수많은 집들이 들어선
것이 보였다. 상자가 풀밭에 내려져 위를 쳐다보니 짙은 운무가 꽉 덮여 있었다. 주위를 살
펴보니 높은 산이 둘러섰고 그 위에 운무가 자욱이 서려 있어 해를 볼 수가 없었다. 산꼭대
기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는 운무 아래에 이처럼 신비한 오혈궁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사람이 나무상자에서 나오자 여혈의는 또다시 한 가닥의 밧줄을 풀고 또 상자 양쪽으로
밧줄을 맸다. 그러자 큰 나무상자는 다시 천천히 올라가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매초풍은 옆에 똑같이 생긴 큰 나무상자들이 세 개나 있고 십여 가닥의 밧줄이 연결되어 있
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이 나무상자들도 아마 오혈궁으로 드나드는 공구일 거다.'
나무 뒤에서 오혈궁 제자 네 사람이 나와 여혈의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혈의가 손을 저어
그들더러 흩어져 가라고 명했다.
길에는 옻칠을 한 주홍색의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모두 시체를 넣는 관(棺) 같아 보였다.
'정말 오혈궁이란 이름과 꼭 같구나. 집마저 피처럼 새빨간 색깔이라니……!'
그들은 왼쪽에 있는 암벽 앞에 와 멈추었다.
여혈의가 한번 매초풍을 흘겨보고 나서 암벽을 향해 소리쳤다.
"여혈의가 궁주님을 알현하렵니다!"
그러자 밋밋한 암벽이 갑자기 우릉우릉 소리를 내면서 안쪽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원래 그것은 석문이었는데 문이 닫힐 때는 틈이 조금도 없이 꼭 맞물렸다. 그것은 너무도
정교하게 제작된 것이어서 매초풍은 속으로 탄복을 하였다.
석문 안에서 붉은 옷을 입은 오혈궁 제자 네 사람이 나와 인사를 하였다.
"사형님께 아룁니다. 궁주님께서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자, 들어 가시지요."
여혈의, 매초풍과 변홍의가 석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들은 변홍의는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변홍의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당부를 했다.
"아씨, 조심하십시오!"
여혈의가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매초풍, 나의 변 사제가 임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네 그려. 허 참, 동시가 곁에 있지
않으니 독수공방을 하게 되었겠군. 그러니 바싹 끌어당기라구."
매초풍은 양옆에 귀신불 같은 홍사 등롱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침상 위에서 보는 재미는 이미 한껏 누려 보았지요. 당신은 이런 일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일 텐데 날 가르치기에는 일러요."
"이 여 모는 풍채가 늠름한데다가 재간도 대단하여 입만 열면 숱한 계집애들이 시집오겠다
고 달려들걸! 하지만 이 여 모는 눈이 높아 웬간한 계집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내가 알기에는 엽청청만 하더라도 당신의 얼을 빼는 데는 충분할 듯싶은데요. 하지만 엽청
청은 소요공자 악처후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악처후란 놈은 건달기가 심한 자여서 엽청청은 벌써 그자를 싫어하고 있어. 그녀가 그 놈
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걸 내가 직접 봤다니까!"
"문제는 엽청청이 철산서생 하종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 말씀이에요. 하종이 협의를 행하
고 금나라에 항격하는데다가 그 애를 위험에서 구해 주기까지 했거든요. 청청은 그런 사내
를 좋아해요."
매초풍은 이렇게 말하면서 재미있는지 깔깔거렸다. 여혈의는 평소에 아주 참을성이 있었으
나 웬일인지 엽청청의 이야기를 꺼내자 무척 격분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매초풍의 신랄한
비아냥거림에 화가 나서 당장 칼로 찍어 죽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
매초풍이 옆으로 몇 발자국 물러나면서 또 비아냥거렸다.
"여 공자께서는 대장부인데 한낱 소견머리 없는 여인이 한 말에 이처럼 화를 내시다니오?
이곳은 묘 궁주의 거처이므로 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석문에서부터 동굴을 통해 이십여 장쯤 걸어오니 앞에 좌중우 세 곳으로 세 동굴이 나타났
다. 각 동굴 어귀에는 각각 파수꾼이 네 사람씩 서 있었다. 여혈의가 매초풍을 데리고 좌측
에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양쪽 벽에는 사등(紗燈)들이 켜져 있어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앞에서 물 흐르는 소리
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돌다리에 들어섰는데 다리 아래로도 물이 흐르고 있어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앞으로 몇 장쯤 걸어가니 눈앞에 공문(拱門)이 나타났고 그 위에 금빛 나는 '오혈궁주(烏血
宮主)'라는 네 글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 앞에는 두 여제자가 지키고 서 있었다.
'이 오혈궁 궁주는 거세를 한 폐인이라고들 하던데……? 여인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는 주
제에 자신의 양기를 시위하려 들다니 우스운 일이구나.'
매초풍은 속으로 묘 궁주를 비웃었다.
동굴 안은 왕후들의 집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주 화려하고도 으
리으리한 문 안에도 네 여제자가 양쪽에 둘씩 갈라 서 있었다.
여혈의와 매초풍은 내실로 들어갔다. 맞은켠에 있는 화려한 큰 침대에 병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혈궁 궁주 묘상이었다. 안색이 누렇게 뜬 그는 비단 이불을 덮고 있
었고 딸 엽청청이 곁에서 국을 떠먹이고 있었다.
그 앞에는 또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노로의와 초천의였다. 침대 양옆에는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묘상의 셋째 부인과 다섯째 부인이었다. 그 두 여인들은 머리
를 숙이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엽청청이 매초풍을 바라보더니 아주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언니, 진짜로 언니였군요!"
엽청청은 국그릇을 내려놓더니 매초풍에게로 달려와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매
초풍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엽청청이 너무나 천진하고 조금도 사악함이 없어 매초풍은 자기가 그녀에게 행한 소행들을
돌이켜보면서 부끄러워했다.
"귀여운 동생, 그래, 바로 나야."
매초풍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데 여혈의는 그녀가 엽청청을 해칠까 봐 두려워 급히 두
사람 사이에 들어서며 말했다
"엽 사매…… 아니 소궁주님, 어서 물러 가십시오."
엽청청은 원래 사형 여혈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자기가 귀한 소궁주 대접을
받는 처지이지만 그 두려운 마음이 없어지지 않은 탓에 침대 곁으로 물러가면서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저 언니를 적으로 치부하지만 언닌 저에게 아주 잘 대해 주었어요."
궁주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말했다.
"청청아, 사형의 말을 듣거라."
엽청청은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엽청청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엽청청의 어머니인 엽첩비가 어린애를 묘상에게
보내 왔던 것이다. 그때는 묘상이 도소정을 가두어 놓은 지 일년도 안 되는 때였다. 신임 궁
주인 그는 제자들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고아를 데려다 기르는 것처럼 꾸며댔다. 묘상
이 백방으로 사랑하고 아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엽청청은 자기가 보통 여제자인 줄로만 알
았다. 묘상은 엽청청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면서도 엽청청이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일
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고 자기 딸이 장차 훌륭한 가문에 시집가서 강호를 떠나 안온하게
한평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엽청청이 어른이 되자 묘상은 일부러 딸을 바깥 세상에 내보내어 마음에 드는 낭군을 찾도
록 하였으나 소요공자에게 걸려들 줄 어찌 알았으랴. 소요공자 악처후는 감언이설로 순진한
엽청청을 속였던 것이다. 대로한 묘상은 엽청청을 잡아들인 뒤 오혈궁 밖을 아예 나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엽청청은 첫사랑에 빠져 온종일 악처후 생각만 하였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가
만히 오혈궁을 빠져 나갔다. 그래서 여혈의가 엽청청의 종적을 찾아 태호를 가게 되었던 것
이다.
소요관에서의 변고를 겪고 나서 엽청청은 악처후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믿을 수 없는 놈들이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이젠 묘상
이 다시 그녀더러 바깥 세상에 나가 신랑감을 찾으라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응할 것이었다.
여혈의가 그 틈을 타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그녀는 근본적으로 여혈의를 좋아하
지 않았다. 하지만 엽청청은 여혈의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감히 거절하
지도 못하였다.
엽청청은 여혈의의 눈길이 온통 자기한테만 쏠리고 있는 것을 느끼자 급히 머리를 숙이고
묘상에게로 몸을 돌렸다.
여혈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나서 묘상한테 절을 올렸다.
"궁주님께 보고를 올립니다. 철시 매초풍을 데려왔나이다……."
매초풍이 읍을 하였다.
"소녀 매초풍이 묘 궁주를 알현하나이다."
매초풍은 묘상의 목에 백포가 여러 벌 감겨져 있고 백포에 거무스레한 피가 배어 나온 것을
보고는 유엽표창의 독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매초풍은 여혈의를 흘끔 바라보고 나서 속으로 궁리를 했다.
'표창에 어떤 독약을 발랐기에 오혈궁 궁주마저 방법이 없는 것일까? 음, 십중팔구 그 천산
의 마귀할멈한테서 얻은 독약일 게야.'
묘상이 매초풍을 내려보면서 힘겹게 말했다.
"여혈의의 말에 의하면 임자는 본 궁의 제자로 들어올 생각이 있다면서? 그리고 인사 예물
도 갖고 왔다고 하던데 그게 뭔가?"
매초풍이 유엽표창을 꺼내 들고 여혈의가 당부한 대로 말하고 나서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단황은 남제라고도 하는데 당세의 으뜸가는 사대 고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개방의
방주 홍칠공과 나란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서로 존경하고 추어주는 사이입니다. 그들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오혈궁을 대적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묘상이 눈을 감은 채로 탄식하였다.
"남제의 일양지신공(一陽指神功)은 세상에 으뜸가는 것인데 나도 겪은 적이 있네. 휴, 만일
그가 오혈궁 사람들한테 애를 먹이려 든다면 그건 참 야단인 거야."
노로의가 입을 열었다.
"궁주님께서는 남의 위풍을 지나치게 높여 우리 자신의 예기를 꺾고 계십니다. 우리 오혈궁
사람들이 언제 누구를 두려워한 적이 있습니까? 궁주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삼백 명 제자
들이 대리국을 짓부숴 놓겠습니다."
묘상이 도리질을 하였다.
"남제는 일국의 군주인지라 그 어떤 강호의 문파들도 감히 황실과는 맞서지 못해. 세력간의
차이가 현저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 꼴이야. 그러니 그런 말은 다시 꺼내지도 마라."
노로의와 초천의는 서로 마주 쳐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전 같으면 묘 궁주가 이런 약
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런 말을 들으면 대번에 책상을 탕 내리치면서 큰소리를
질렀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묘상을 바라보았다.
묘상이 그들의 심사를 짐작한 듯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임자들한테 말해 두거니와 지금 우리 오혈궁의 대적은 남제가 아니고 개방과 전진교도 아
닌 거야."
노로의와 초천의는 더더욱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개방은 여전히 천하에서 가장 큰
무리이고 전진교는 강호에서 무서운 풍파를 일으키고 있으며 남제는 더군다나 세력이 큰 놈
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내놓고도 더 무서운 적들이 있단 말인가?
묘상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사흘 전에 본 궁주는 편지 한 통을 받았네."
초천의가 생각을 더듬다가 내뱉었다.
"궁주님한테 오가는 편지들은 모두 저의 손을 거치는데 저는 사흘 전에 밖에서 제자가 보내
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없고 궁주님께 편지를 올려 보낸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 편지가 본 궁주의 서재에 있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는 말이네."
그러자 노로의가 놀란 어조로 끼여들었다.
"본 궁의 방무(防務)는 제가 관할합니다. 본 궁은 철벽 같아 사처에 보초를 세웠고, 더욱이
궁주님의 의사(議事堂), 용선방(用膳房), 서재, 침실 등 중요한 곳에는 심복들이 불철주야로
파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주님의 서재에 누가 편지를 갖다 놓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
이십니까?"
"그래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아니옵니다. 만일 참말로 그런 일이 생겼다면 진정 본 궁 제자들이 계율을 범한 행위이니
소인이 꼭 조사하겠소이다."
묘상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노의, 본 궁주는 임자를 나무라는 말이 아닐세. 이 편지는 어느 고인이 남겨두고 간 것일
세. 이 고인이 본 궁 내부를 제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으니 그 무공이 실로 가늠키 어려울
정도란 말일세!"
묘상의 눈에 공포에 질린 빛이 떠돌았다.
노로의, 초천의, 여혈의, 매초풍 그리고 엽청청, 셋째 부인, 다섯째 부인 모두 겁을 먹었다.
이곳에 편지를 갖다 놓았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매초풍이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만일 사부님 황약사가 들키지 않고도 이곳에 편지를 갖다 놓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있는 일이다. 그분이라면 이런 일쯤은 식은죽 먹기로 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분 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서독, 남제 그리고 북개다. 하지만 이 네 분의 고수는 절대로
이따위 시시한 일을 할 위인들은 아니야.'
묘상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오혈궁에 대하여 아주 익숙하게 알고 있고, 그러려면 기필코 본 궁의
어느 제자와 연줄을 달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본적으로 본 궁의 출입구조차 찾아
내지 못할 거다. 매초풍, 임자 생각엔 그렇지 않은가?"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였다.
'여 공자께서 길안내를 서지 않았던들 소녀는 한평생 공력을 들였어도 오혈궁이 이곳에 있
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설사 오혈궁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그 복
잡한 길을 제대로 찾아서 오지 못했을 겁니다."
노로의는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즉시 조사하여 보렵니다."
노로의가 이렇게 말하고 나가려는데 여혈의가 한마디했다.
"큰사형님, 이 일은 이 여 모에게 맡기십시오. 제가 가서 조사하겠습니다."
"사태가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조사할 필요도 없네. 어쨌든 그 고인은 편지에서 본 궁주를
위협하고 욕설도 퍼부으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하였네. 하지만 그 고인은 편지만 남겨 놓고
나를 시끄럽게 굴지도 않은 채 그냥 갔단 말이네."
여혈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편지를 남긴 자가 궁주님이 상
한 줄을 모르는 자로 처음부터 궁주님의 적수가 못 되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히 얼굴도 드러내지 못한 것이지요. 둘째는 이른바 고인이라는 자의 소행이란 건 처음부
터 없었고 단지 본 궁의 어느 제자가 남겨두고 갔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묘상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였다.
"그 고인은 편지에서 자기는 내가 중상을 입은 기회를 이용하여 죽이고 싶지는 않노라고 똑
똑히 밝혔단 말일세. 자네는 본 궁제자들의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있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야. 청청이가 서재에서 그 편지를 발견했을 때 필적의 먹물조차 마르지 않았네. 그러니
그 고인이 서재에 잠입해 들어와서 써놓은 게 분명하네. 필체를 보아도 본 궁 제자의 것이
아니란 말일세."
모두들 그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고인의 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기
때문이었다.
여혈의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이름은 써놓지 않았습니까?"
"편지에다 '천산마모(天山魔母)'라고 써놓았네."
묘상은 세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임자들은 강호에서 천산의 마귀할멈이란 인물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나?"
모두들 서로 얼굴을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매초풍이 슬그머니 여혈의를 쳐다보았더니 여
혈의는 망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 흔들고 있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이 사나이가 아주 태
연하고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엽청청이 귓속말을 했다.
"아버님, 그건 가짜 이름인지도 모르지요. 우릴 놀리느라고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어요."
묘상이 엽청청의 말을 일축하였다.
"너희 세 사형의 말을 들어 보자꾸나."
갑자기 노로의가 넓적다리를 철썩 쳤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요. 이태 전에 천산 기슭에서 강남으로 장사꾼 행렬이 왔었는데 그들
한테서 천산 부근에 마귀할멈이라고 부르는 여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여
인은 젊고 건장한 사나이들을 붙잡아서 농탕치고 나서는 그 사나이의 뇌수를 빨아먹는다고
합니다."
여혈의가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그래 그 년이 정말로 사람의 뇌수를 빨아먹는답니까?"
"그렇다네. 천산의 마귀할멈이란 참말 그 별호와 마찬가지로 에누리 없는 여마귀란 말일세.
만일 정말로 그 여인이 우리와 맞선다면 아주 시끄러운 일이네."
하지만 노로의는 곧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여혈의를 안심시켰다.
"여 사제, 하지만 근심할 필요는 없네. 오혈궁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으니까 우리 제자들
이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그까짓 천산의 마귀할멈쯤이야 두렵겠나?"
묘상이 노로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노로의의 말이 사리에 맞네. 본 궁은 수백 년이나 되는 근기(根基)를 갖고 있거늘 천산의
마귀할멈이 어찌 혼자 힘으로 대처할 수 있겠는가? 우린 이후부터 더욱 경계를 강화하여 그
년한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네. 그러면 그 년이 어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물러갈 걸세."
간사하고 꾀가 많은 초천의가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제가 보건대 이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천산의 마귀할멈이 무공이 아무
리 대단하기로서니 길안내를 서는 사람도 없이 곧바로 오혈궁까지, 그것도 서재까지 들어올
수 있을까요?"
묘상이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는 말일세. 그렇다면 오혈궁 안에 과연 천산 마귀할멈의 밀정이 있단 말인가?
여혈의, 임자가 본 궁에 박아넣은 밀정들을 잡아들이게. 의심스러운 제자이기만 하면 즉시
나한테로 끌고 오도록 하게."
"예, 제자가 즉시 알아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매초풍을 한번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궁주님, 이 매초풍은……."
초천의가 말을 가로챘다.
"궁주님, 철시는 본 궁의 대적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당장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여혈의가 큰소리로 반박했다.
"궁주님께서 중상을 입으시어 지금은 믿음직한 조수들이 필요할 때입니다. 마침 아씨가 우
리한테 몸을 의탁하러 찾아왔는데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성세가 커질 게 아닙니까? 궁주님께
서도 현능한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름이 높지 않습니까?"
초천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 사제, 철시는 심보가 지독하여 육친도 알아보지 않는 년이다. 저 년이 도화도 도주 황약
사도 배반한 터인데 어찌 궁주님께 충성할 수 있겠나?"
여혈의가 이에 맞서 냉소하였다.
"형님은 매초풍이 무공이 고명하니까 질투를 하는군요!"
"버릇없이 굴지 마라. 궁주님께서 성을 내시기 전에 싸움을 그치지 못할까!"
노로의가 준엄하게 꾸짖자 여혈의와 초천의는 서로 쏘아보기만 할 뿐 더 말을 하지 못하였
다.
"천의와 혈의, 두 사람 모두 나를 위하는 그 충성스런 마음은 치하할 만하네."
두 제자에게 느릿느릿한 어조로 힘겹게 한마디한 묘상은 이번엔 매초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철시, 임자는 굴욕을 참아 가면서 본 궁의 제자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매초풍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였다.
"소녀는 원수들의 추격을 받아 살길이 없어 이곳 오혈궁으로 도망해 왔으니 궁주님께서 보
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소녀가 이 오혈궁의 제자 노릇을 하는 데는 하나의 작은 소
청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어디 한번 얘기해 보게."
"소녀는 태호오교들과 척을 지었다가 하마터면 그 놈들의 손에 목숨을 끊을 뻔하였습니다.
때문에 묘 궁주께서 이 원수를 갚아 주시면 소녀는 결사적으로 묘 궁주님을 따르겠나이다."
그러자 초천의가 대뜸 면박을 주었다.
"매초풍, 네 년이 감히 궁주님한테 조건을 들이대다니 죽고 싶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오혈
궁은 종래로 외인들과 어떤 흥정도 하지 않는단 말이다!"
매초풍은 입귀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일 뿐 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묘상만 올려
다보았다. 그녀는 일부러 이렇게 꾸며대고 있는 것이었다. 묘상과 무슨 흥정이라도 하는 척
해야만 자신이 오혈궁에 들어오려고 하는 목적에 대하여 오혈궁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거
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묘상 역시 매초풍이 무조건 굴종하려 했다면 기필코 딴 음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즉시 끌어내다가 목을 자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매초풍이 이처럼 흥정을 하는 바람에 묘상
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매초풍, 임자가 본 궁주한테 의탁하려 하니 이건 오혈궁으로서는 길한 일이로다. 본 궁주가
담보한건대 조만간에 태호오교를 없애 그대의 원수를 갚아 주겠노라!"
매초풍은 아주 기쁜 척하면서 연거푸 절을 올렸다.
"묘 궁주님, 감사합니다. 이 소녀는 궁주님에 효성을 다하며 간뇌도지(肝腦塗地)하는 것도
마다않겠사옵니다."
아주 흐뭇한 듯 묘상의 얼굴에 불그레한 기운이 감돌았다.
"청청아, 어서 저 아씨를 부축하여 일으켜 드려라."
엽청청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매초풍을 부축하였다.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묘상
은 딸이 매초풍을 좋아하는 것을 보자 더욱 믿게 되었다.
"아가씨가 강호를 질타하며 다닌다는 이야기를 본 궁주는 벌써부터 듣고 있었네. 오늘 이렇
게 본 궁주에게 의탁하러 왔으니 절대 소홀히 대하지 않겠네. 임자는 오늘부터 오혈궁의 사
제가 되어 이십 명의 여 제자들을 통솔하도록 하게."
매초풍은 또 절을 하면서 감사를 드렸다. 초천의가 옆에서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편 여혈의는 매초풍이 자기한테 당부하던 일이 성사된지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매초풍이 오혈궁에 있는 건 그로서는 큰 우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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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봅니다..^^
즐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