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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2019를 돌아보는 사유적 사색에서)
후세백작 2020.01.23 00:53
저의 모든 글이 그러하듯 하리 청동기 유적에 관해서는 4~5년전 당시에 몇 편의 글에 의해 역사적인 사안을 소상하게 언급하였으며, 이 장에서는 이러한 하리 청동기 유적(예를 들어 역사에서는 미송리 토기라 하는식으로 모든 이름이 그 지역적 고유명사를 붙이기에 가칭 "하리유적"이라 명 합니다)에 관해 이 시대에서 시대적인 이해와 문화적 작용등에 예시를 들며 다루어 보겠습니다
2016년 평창읍 하리 240-4번지에서 단독주택 신축시 선사분묘 일부로 추정되는 석열유구와 적색 마연 토기편. 마제 석검편이 발견되자 강원고문화연구원이 조사하여 발표하였습니다(*2016, 허가번호 2016-0847호. 강원 고문화연구원 발표)
조사결과 청동기 시대의 무덤 유구가 14기 발견되었으며 특히 2호 무덤은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예는 매우 드문것으로 2018년 2월 문화재청의 발표 그간 2년 동안의 분석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 분묘는 곧게 편 형태로 매장된 인골이 발굴로 하나의 무덤에서 매장된 인골과 나란히 비파형동검(고조선식 청동검)이 출토됐다. 청동검은 청동기 무기 혹은 제기로 지배층의 부장품으로 알려진 비파형동검이 함께 묻힌 것으로 봐 2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지역사회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길이 26.3㎝, 최대폭 3.8㎝의 비파형동검은 동검을 구부려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석관에 매장됐다. 이것은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으로부터 퇴화된 세형동검으로 변해가는 과도기 유물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비파형 청동검은 마흔개 정도가 발굴되 있으며 지난 몇 년전 춘천 위도에서 수십개의 고인돌과 현재 발굴된 마흔개를 넘는 숫자의 고조선식 청동검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검을 반 뿌려뜨려 매장한것은 마산일대에서와 평창 하리의 유적 단 두 곳뿐이며, 출토 동검은 길이 26.3cm, 폭 3.8cm로 두 동강 난 채로 석관 동쪽 측면에 묻혀 있었으며, 양식은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의 특징을 지녀 이를 근거로 하여보면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경 인물로 추정된다 합니다. 이러한 고조선 시대의 시기인 2,500년전의 유골은 오직 하리유적 뿐입니다.
하리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은 무덤 조성시 사용한 석회암등으로 인해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이 특징으로 동아대 고고 미술학 고인골 하자 김재현 교수팀은 대퇴골 크기와 근육, 치아등으로 미루어 보아 인골의 성별은 여성인 것으로 판명하였으며, 나이는 20대 초반, 신장은 160.4cm으로 추정했다. 초기 철기시대 여성으로 알려진 경남 사천시 늑도 유골보다 10cm 이상 클 정도로 신체 조건이 좋았다.
발굴 당시에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은 이번 "하리 괴인골과 청동검 유적"을 통하여 향후 추가 연구를 통해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DNA 분석 또한 진행할 계획이다. (재)강원고고문화연구원은 유구 및 출토유물에 대한 고고학적인 검토를 통해 강원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양상을 파악하는 한편 고인골학과의 연계를 통해 피장자에 대한 의학적 검토를 병행할 것이며, 3차원 입체(3D)영상 기록을 통해 유구와 유물에 대한 디지털 자료를 구축할 계획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본 필자는 이 유적을 고조선 시대인이라 필하는 이유는 고조선의 국가적 구분은 역사적으로 명확치 못하여 윤내현 교수의 사관을 빌면 고조선은 중국에 있었다 하지만 동으로 이동하여 고조선 말기에는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범위로 형성한듯 하지만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 고조선 형성의 시기에 속하는 시간대에를 역사가들은 청동기 시대라 구분합니다만 이러한 청동기 시대는 고조선 시대임이기에 평창의 하리 유적은 고조선 국가의 범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기적으로는 고조선 말기 사회의 시기에 해당하므로 고조산 시대인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전 춘천 위도의 선사유적 발굴에서 고조선 것임이 밝혀진바 있다는 기사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청동단검과 선형동부(扇形銅斧), 옥착(玉鑿), 옥부(玉斧) 등의 발견은 이 유적이 고조선시대의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고고학 2015.03.26.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50326205509720
이 이야기를 다시한번 이해하자면 "하리 유적"의 古인골은 고조선이란 국가의 범주는 떠나서 동(고조선) 시대인으로 DNA의 분석검사를 하면 그의 식생활과 농경, 자연환경까지 유추 해석해 볼 수 있으며, 피장자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피부의 색깔, 얼굴의 특징적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 한다.
여기서 이 부분을 좀 더 확대해 본다면 현재 우리가 보는 단군상의 얼굴 모습은 그 어떤 기록에 의하지 못한 가상적 인물이지만, 만약 "하리 유적"의 인골의 DNA 자료에 의한다면 이는 동 시대인으로 자료로 단군상의 머리카락, 피부 눈동자의 색상등 얼굴 모습에 물증적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단군상을 물증적 자료를 참조해서 복원한다면 단군상의 기준은 평창의 하리유적의 인골에 의존하는 것으로 하리 출토의 고인골은 이러게 중요한 역사성을 담고 있다.
그러기에 본 필자는 출토 당시에도 이를 박물관을 만들자 제안하였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바 강원 고고문화연구원은 피장자에 대한 의학적 검토를 병행할 것이며, 3차원 입체(3D)영상 기록을 통해 유구와 유물에 대한 디지털 자료를 구축할 계획이다라 하였듯이 이러한 입체 영상 기록물을 보존하고 방영할 수 있는 공간의 박물관이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고조선 시대의 역사문화는 전국에 없는 유일한 것으로 평창은 이것을 알지도 못하며 방치해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평창에 역사단체로는 평창문화원은 그 취지에 첫째로 지역 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하며 산하 평창향토사 위원회를 두고 있는데 과연 평창군은 이 유적 발굴에 어떠한 관심이 있었습니까?? 이에 발굴 당시 강원 고고문화원의 담당 학예사의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여기서 일전에 주장하였지만 저의 주관적 견해로 두 가지를 평창인에게 주장하겠습니다.
1) 평창에 고조선문화권의 청동기 박물관 제안
하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 나아가 고조선 시대를 이야기하는 역사로 이에 3차원 입체(3D)영상을 제작한다면 맑은 하늘아래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공간속에 살아가는 선사시대인의 모습은 하리 노산아래 옹기종기 모여사는 선사인들은 평창인의 조상으로 남쪽의 삼방산, 동으론 저 멀리 송계산과 서쪽의 서산의 드넓은 개활지인 천헤의 자연이 평창땅입니다.
가령 이러한 영상매체가 제작되어 평창엔 박물관도 없어 춘천 박물관에서 상영된다면 평창사람들은 그때에 아쉬움의 발만 동동 굴릴 것입니까??
이에 보존과 기록 영상물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 건립 또한 좋치 않습니까?? 문명의 태동에서부터 살기좋은 고장 평창이란 점의, 청동기 시대인의 생활상을, 어쩌면 고조선인의 살아 숨쉬는 석기 역사의 테마가 깃든 박물관을 평창의 브렌드로 함이 좋치 않습니까?? 그러기에 평창인들은 이제라도 합심하여 이러한 고조선 시대 문화를 제 자리에 복원해야할 명제를 가지는 것이며 또한 이 역사문화는 전국 유일의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것 입니다.
평창 남부권은 이제라도 전국에 부상할 수 있는 렌드마크를 찍는 아이콘을 개발하여, 평창 남부권 개발 계획중에 휴식과 관광의 레져공간 형성이 가장 핵심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좀 길어져도 박물관의 이해를 위해 도내의 박물관을 살펴보면 양구에는 양구 박물관과 양구 인문학 박물관, 양구 백자 박물관, 양구 근 현대사 박물관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양구 선사 박물관이 있습니다.
양구 선사박물관은 공립 박물관으로 양구 무룡리의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이를 북한강 선사 유적 박물관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로서 양구 선사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또한 태백의 고생대 자연사 박물관을 검색해 보신다면 평창으로서는 그러한 문제에도 기화리 쌍굴의 6만년전의 구석기인들의 모습을 그려 낼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과거 연대 박물관은 미탄 기화리의 쌍굴과 연당의 피난동굴, 제천, 단양의 두 곳의 석회암 동굴에서 꼬뿔소, 원숭이 등까지의많은 뼈를 시굴채집하였으며 돌도끼. 찍게돌등도 채집한바 그 중에 기화리 동굴의 특이성은 동굴 50m 아래에 용천수가 솟아 여름철에는 시원한 물을 구하며 겨울철에도 물을 구하기 쉬웠던 구석기 인들에겐 가히 명당동굴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여타 영월에서라도 이를 태백 고생대 자연사 박물관처럼 박물관화 한다면 평창으로서는 그 소재를 하나 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잠깐 영월의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지난 여름 영월은 필자 본인의 10여년전 글을 연구하여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닉을 그대로 전문 보도하며 고씨동굴에 의병장 탑을 세웠는데 이것은 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간 하루에 최고로는 일만 오천명이 찾아오던 동강에 김삿갓 유적지라며 개발하고 30여개의 사립 박물관으로 전국에 가장 찾아가고픈 문화 상품을 계발하였지만 언젠가부터 박물관 군수이후로는 좀 시들어지고 김삿갓 약발도 효력이 다해가는듯하자 역사 전문가인 석정여교 교장이 퇴임후 영월문화원장으로 추대되어 새로운 영월 상품에 고심으로 충효의 고장으로 거듭나길 희망한바. 영월에서 을미의병을 창의한 유인석 창의비를 세우고 또한 그간 고씨굴이 기천록에서 의병을 하였다 하지만 이하 역사를 모르다 본인 글에서 호구록을 접하며 고씨 동굴에 의병탑을 건립하고 또한 2차 동학 봉기.. 홍천에서 700여명, 평창 후평리에서 100여명 사살되고 동학이 끝나는데 이에 영월 직동이 2차 동학의 배후지이고 하는 이러한 역사속에 충, 효를 알리는 역사 상품으로 영월이 거듭나길 고대하는바 보름 전쯤엔 영월에서 박물관 건립을 발표하였습니다.
여기에 평창의 향토사학자 한 분은 영월 문화원장님은 후세백작의 글을 벤치마킹 하는것이 아닌가 우스며 말씀하셨는데 영월 문화원장님은 취임사에서 영월의 향토사학적 자료를 나열하였는데 영월에는 조선 임금이나 학자들의 친필이나 편액이 여러 점이 있는데 이에 탁본작업등을 하겠다 하였건만 박물관이란 지적은 없었다. 그러기에 영월에서 어떠한 소재로 역사박물관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본인은 에전 하리유적 출토당시 태백산맥을 축으로 영서의 기조를 살리는 박물관을 주창한바 있는데 영월의 박물관과는 차별성을 가지는 평창의 청동기 박물관은 필요한 것입니다.
엇그제 평창 귀성길에 평창의 정치에 관심이 많은 어느 친구왈 남산의 소나무는 왜정때 송진을 채취하기위해 톱질을 당했는데 이를 관광상품화 건의 이야기에..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는 관광상품의 메인은 될 수 없으며 하위의 부수적 이야깃 거리로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아직 평창의 관광 자원은 빈약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글을 읽어 보신다면 백일홍 축제는 지역적 축제를 벗어나길 힘들지만 평창은 전국적 모토의 역사 상품이 서너개 산재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리 유적이 춘천의 중도에서 발굴한 고조선식 청동검의 문화와의 차별성은 중도 발굴엔 이러한 인골이 없기에 DNA 분석을 통한 3D 영상은 오직 평창의 하리 유적에서만 가능하기에 이 박물관의 중요성은 인골의 출토에 따른 영상매체를 만들수 있는 점 입니다.
고조선 청동검을 높이 쳐드는 고조선 시대인의 하리유적의 박물관, 이러한 고조선 시대의 3D의 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을 건립한다면 그것은 전국에 유일한 문화 박물관으로 각광받을 것이며 도한 이를 키 위드로 이하 백일홍 축제도 이러한 태고의 자연환경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으로 이미지를 부각하여 더욱 폭넓고 다양한 문화를 이룩하여 관광자원화 하여야 하는 바램입니다.
2) 평창의 시원에서,, 가칭 우오 능을 만들자
위의 하리 유적인 2,500여년전 고 인골에 대하여 역사적이 아닌 저의 생각의 이야기를 씁니다.
하늘이 열리고 산과 물이 어우러지는 천혜의 자연속의 이땅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이고 이 마을의 수호자는 번득이는 청동검을 높이 들고 평창을 열어가는 평창의 조상 선인들,,
일전 게시글에서 이러한 평창의 선인은 이제 2,500여년 후대의 후손들에 의해 멀리 공ㄴ골 학자의 창고 속이나 춘천박물관에 셋방살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먼 후대의 우리 평창인들은 역사의 정기를 찾는다고 가을 노산 페스티벌의 郡 축에의 장에 맨 처음 행사로 노산에 올라 임진란 노산 전적비에 충의제를 올리고 군의 행사를 열어간다.
이 점에 참으로 안타까운것은 2장에서 논고했듯이 임란당시 노산성 전투는 없었으며 당시군수이하 모든 병사들은 천인요새의 응암굴로 대피하여 항전하였기에 임란당시 노산성 전투라는 것은 픽션의 허위인데 여기에 충의제를 드리고 군수는 앞으로나가서 작헌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자행되는 것은 어쩌면 향토사가들의 직무유기 아니가라고 게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장에서 야기에 더 붙여 쓰고져 하는 이야기는 평창의 페스티벌 노산제의 시작에 왜 충의제를 먼져 드려야 하는 점입니다. 물론 외세의 침입등에 국가의 존립에 목숨을 걸고 국난 국복을 하고자하는 충정의 기상은 시대를 떠나서 언제라도 칭송하여야 하는 것으로 시대 정신으로 부각하여야 함은 옳은 일이지만 태고의 하늘이 열리고 이 땅의 역사의 시작에 이땅에 선인들에 대한 제를 지냄이 옳치 않을까 함입니다.
일본은 에도 막부시대의 전성기는 무인국가 였습니다. 이러한 무인국가의 설명에 우리 역사의 자랑인 탑으로 설명한다면 일본 교토의 청수사라는 절 앞뜰에 조그만 3층 석탑이 두기 있는데 이 탑의 기단은 두부모처럼 각진 석재가 반듯하게 3층으로 올려 이에 아무런 이론적 이야기도 없지만 우리네 1,200여기의 석탑은 모두들 기단석도 갖은 이론을 내포하며 문치의 문화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 골의의 축제의 서전에 무인형의 임난 전적비에 충의제가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의 큰 문제로 이순신장군의 내일을 준비한 자의 호국정신은 우리의 귀감으로 영원히 칭송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유교론에 더불어 문치국가로 무인보다 문인인 이이, 이황, 정약용등의 대 학자가 으뜸으로 존경받아야 하지만 그렇치 못한점은 과거에 일등학생은 고시패스하여 검사가 되었지만 역사과는 정원미달사태 되는 등 역사과 학생이 선생되는 2류적인 모습이 문제는 아니었슬까??
평창 정체성이 서려있는 문화의 장, 노산 페스티벌에서 임란당시의 항전의 충의제가 페스티벌의 서막을 장식한다면 그보다 차라리 평창의 시원에서 고조선식 청동검을 찬 고인골을 부산 동아대 김재현 고인골학자의 창고에서 찾아서 그간의 먼지를 털고 2천년 넘게 잠들어 있던 장소로 다시 모셔와 커다란 능을 만들고 능에 이름은 과거 원삼국시대에 이땅이 이름인 우오에서 본따 우오능(가칭)으로 하며 우리 먼 평창의 후손들은 이곳에 모여 하늘의 제를 드리고 평창의 축제를 열어감이 더욱 멋지고 당연하리란 생각입니다, 이것 또한 이 시대인이 먼 후손에게까지 전해줄 문화 창달인 것입니다.
* 우오(于烏)란?
평창의 고구려시대 옛 지명의 하나로 烏에 대한 해석에 태양 흑점까지 거론되고 세발달린 까마귀의 전설의새 그림도 출토되엇는데, 고구려 시대에 군현제에 지방 부락들의 표시에 새의 군집상으로 비유하여 烏자를 쓰고 이에 한문은 이두음 표기로 읽어야 하기에 그 뜻이 아닌 음을 발음하기에 근자에 우오에 대한 한문적 설들의 이해는 어쩜 의미없슬지도 모르지만 아직 정확치는 못하지만 이러한 전설의 새는 고구려가 아닌 고조선의 상고시대부터 상징화 되었으며 아래에는 우오에 대한 엄기종님의 詩를 한 수 인용합니다.
『아! 태양』
우오(于!烏, 三足烏) 태양을 이름이여
이보다 더 멋들어진 이름이 또 어디 있으랴.
역사는 언제나 바르게 존재해야 합니다. 역사가 없다는 우리의 기상은 무엇으로 나타낼 것입니까?? 역사는 현재의 잣대이고 거울이기에 거울을 바르게 닥아야 우리의 모습이 바르게 보이듯이 현재 우리가 바르게 살자면 그간 오류적 역사도 새로운 역사도출에 힘입어 바른 정의 역사로 찾아가야 함이 옳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리 유적의 인골을 다시 모셔와 크나큰 능(陵)을 만들고 그 이름을 우오(于烏)능이라 칭하며 노산제의 출정에 우리의 선인을 부르고 하늘에 고하는 제를 드리고 이땅 평창으로서는 새해의 기원이나 축제의 시작을 알림이 지금 노산에 올라 있었지도 않은 가공의 노산 전투의 전적비를 만들고 허상의 제를 드림보다는 더 바른 자세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
감사합니다.
* 5부 이하에서 육백마지기의 보고에 대화여 그렇게 어원적 설명을 하여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듯 한 육백마지기 어원에 대하여 역사적이지 않은 이야기로 이해를 해 보겠습니다.
또하나는 시들어가는 와석이릐 김삿갓묘,, 아예 이에 허상의 문제중, 82년 11월에 묵밭 언덕아래에서 허름한 묘 하나 발견으로 이를 난고 김병연(김삿갓)묘라 지칭하는 영월,,, 당시 문화원장은 농협 조합장 출신으로 정통 사하가자가 아니엇기에 발생되는 문제를 파헤쳐 놓겠습니다.
죽어서도 천동리 도마치골에 은둔하는 김삿갓의 인생은 죽어서도 기구한듯 합니다만 이 지역 인들은 이러한 시성의 모습을 보고만 잇슬 것입니까?? 이것을 문학계. 문단, 역사계에 뭍겠습니다.
그리고 평창아리랑의 문제. 판관대의 오류적 모습등 역사의 논고에서 쓰지 못했던 주관의 생각까지 모두 이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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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고는 다음 혹 책으로 출간한다면 그때 하겠습니다.
글을 쓰는것은 취미에서 출발하였습니다만 제목만 쓰고 그 내용은 글을 다 쓰고난 후에야 저도 알게 됩니다.
모든 글을 쓰기에는 마자에 앞을 모르고 쓰는 호기심이 잇지만 다시 보고 탈, 오자등 탈고와 수정은 지옥같기에 생략합니다.
아마추어의 이점들이 노출에 양해를 바랍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