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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양 일백 마리 비유’를 말씀하시다
마태복음 18:10-14 /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없음) *어떤 사본에는 11절이 빠져 있다. 반면에 어떤 사본에는 11절이 있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예수께서 말씀하신‘양 일백 마리 비유’
1-1. 예수께서 말씀하신‘양 일백 마리 비유’의 적용은 본의에 따른 올바른 것인가?
본문은‘양 일백 마리 비유’(또는‘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대체적으로는‘구령 전도 사업’으로 설명해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다며, 양 일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놔둔 채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찾으신 것처럼 하신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신다며 우리가 이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 모두를 다 찾으십니다.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림이 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충만수를 채우십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을 가지고 문제 삼으며 시시비비 할 것은 아닙니다. 전도에 있고자 하는 분들을 주의 위로로 위로하며 격려하여야 할 일입니다.
1-2. 예수께서 말씀하신‘양 일백 마리 비유’의 본의
그런데 말입니다. 본문에서 이‘양 일백 마리 비유’를 그러한 것을 설명해 나가기 위해 적용하는 것으로 삼아 나갑니다만, 본문의 내용이 의도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여기의‘양 일백 마리 비유’는 앞서에서 하신 말씀인 18:1-9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에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 - 위대한 사람 - 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어린아이와 같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면서 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소자 - 작은 사람들 -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곁에 있는 소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 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 하는 일로 비방하고 멸시하여 실족하게 하는 악한 죄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비방하고 멸시하여 실족하게 한 그 죄는 지옥에 들어가는 악한 죄에 해당하는 성격의 것이니, 차라리 그들의 손이나 발 등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어 한 손이나 한 발로 있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어서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본문에서 예수님은‘양 일백 마리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뵘에 있을 자들입니다.“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에서 보게 되는 대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2)이 하늘에 계신 주님의 아버지를 항상 뵙고 있으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겨 따르는 제자들은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가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면 그 천사들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천사이기도 할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과도 함께 하여 그 곁에 있어 그들이 하나님을 항상 뵙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의 뜻을 받듦에 있을 것이니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항상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뵘에 있을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삼가’라는 말로‘양 일백 마리 비유’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은‘만일’이라는 말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깨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의도가 무엇이겠는지를 알겠는지를 물으시는“너희 생각에는 어떠냐?”라고 묻는 수사의문문으로 예수께서 말씀을 꺼내고 계시는 것입니다.3) 예수님의 제자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업신여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업신여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뵘에 있을 자들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그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뵘에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읽는 한글개역(개정)성경에는 11절이‘(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몇 몇 사본에는“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란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 사본에서 어떤 사본에는 있는 단어나 구절이 어떤 사본에는 빠져 있을 경우에는 성경 필사의 특성상 성경을 옮겨 적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없는 것을 집어넣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으며, 필사자들이 실수하여 빠뜨리며 옮겨 적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 사본에 구절이 있는 경우를 더 신뢰하게 됩니다. 해서, 지금 우리가 읽는 한글개역(개정)성경에는 11절 구절이 빠져있습니다만, 이 구절이 있는 성경 사본도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비록 우리가 읽는 한글개역(개정)성경에는 없지만 이 구절이 있는 성경사본을 참조하여 함께 그 내용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뵘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단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그들 모두를 다 자신의 보호와 살핌에 두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함께 하는 제자들이며, 이를 통해서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뵐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 중 그 누구도 업신여길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하여 비유를 든 것이‘양 일백 마리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해 주시고 있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에 의해서 드러나 지고 있습니다.‘소자’(작은 자)라고 말해지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비롯하여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에 있는 자들은“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셨다.”에 있는 예수님의 구원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이들의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은‘소자’(작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관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소자’들인 동료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심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자신에게 정해진 뜻인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후 제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에 제자들의 믿음이 있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행에 있고자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동료를 누르고 그들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들 위에 군림함에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생각에 있는 것은‘소자’로 말해지고 있는 자신들의 동료를 실족케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있음은 그들의 마음과 관심을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에게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그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악한 죄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 소자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오직 자신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것에 욕망이 있기에 하늘에서 하나님을 볼 자들인 소자들에게 마음과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래서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거역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 소자를 구원하고자 예루실렘에 올라가시는 것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음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순종함에 있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는 소자들 중 그 누구도 잃어버려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께서 양 일백 마리로 비유되고 있는 이‘소자’들을 모두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 창세 전에 정하신 뜻이기 때문에 이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 소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그들이 잃어버려지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양 일백 마리 비유’는 이렇게‘소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잃어버려지지 않을 것임을, 그렇게‘양 일백 마리’로 비유되고 있는‘소자’모두가 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심에 있어 하나님의 보호와 살핌에 그 생명이 안전히 지켜질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에서‘소자’중에서 그 누구라도, 단 한 사람도 자신보다 낮게 업신여기지 말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업신여기고 업신여김에 있고 하는 상하 관계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보살핌에 있는 자인 하나님의 한 자녀입니다. 그러니 이들 중에서 그 누구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높은 자에 있거나 더 낮은 자에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라고 하는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그‘기쁨’에 있는 자들입니다. 양 일백 마리에서 아흔 아홉 마리와 함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으로 비유되어지고 있는‘소자’단 한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단 한 사람의‘소자’도 예수께서 찾아 구원하심으로써 다른 아흔 아홉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으로 큰(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어떠해야겠는지요. 예수님의 기쁨에 있는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에 있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받들어 그분의 뜻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것에 그들의 마음이 가고 생각이 있어 예수님과 함께 하며 섬겨 가는 제자의 길에 있어야 했습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양 일백 마리 비유’에서‘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대하는 신앙적 자세를 생각함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고 있는 교회를 이루고 있음은‘하나 된 생명의 몸’, 곧‘한 몸’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인 각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체가 손은 손의 모양이 있고 발은 발의 모양이 있는 것으로 해서 어느 것이 더 낫거나 못하고의 차이가 있고 차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얼굴에서 윗부분에 있고 코나 입은 얼굴에서 눈 아랫부분에 있다고 해서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2:12-27).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서 그 누구도‘큰 자’와‘작은 자’로 있으면서 멸시하며 업신여기거나 비난받으며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이 천상의 모습을 지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믿음의 형제들을 제치고 자신이 보다 나은 자이며 보다 높은 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에서 실족케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은 신체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행위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극단에 있는 참으로 큰 죄입니다.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 하나를 잘라내고 발 하나를 잘라내어 한 손과 한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니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이러한 죄에 있는 것은 지옥에 들어갈 자에게서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추호라도“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자입니까?”라는 생각에서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에 있어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자신보다 낮게 여겨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이며, 혹여나 멸시하고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때로는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으로, 때로는 나보다 나이가 너무 많아 아무런 분별력이 없다는 것으로, 때로는 나보다 어리다는 것으로, 때로는 나보다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때로는 나보다 하는 일이 없다는 것으로, 때로는 나보다 일을 못한다는 것으로, 때로는....하는 것으로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젊은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유대인과 이방인, 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연합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한 자녀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각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섬김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주님)로 계신‘믿음의 공동체’인‘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