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의 북정가(北征歌)란 시로써 조선 세조 시절 남이 장군이 북관(北關, 함경도) 이 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 비문에 새긴 시로써 남아의 기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남이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태종의 외손(外孫)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 때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속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1818년(순조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이시애
길주 출생. 지방의 호족으로 조선 초 북방민 회유정책으로 중용되어 1451년(문종 1) 호군(護軍)이 되고, 1458년(세조 4) 경흥진(慶興鎭) 병마절제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판회령(判會寧)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왕권을 확립한 세조가 차차 북방민 등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직접 중앙에서 파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자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끼고 반란을 꾀하였다.
1467년 모친상으로 휴직중인 기회를 이용, 북도의 민심을 선동하고 같은 해 12월 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살해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는 강효문을 역모죄로 처형하였다고 허위보고하고 스스로 절도사를 사칭, 북도민의 환심을 사 차차 세력을 확보한 뒤 단천(端川) ·북청(北靑) ·홍원(洪原)을 공략하고 함흥(咸興)을 점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사도(四道)병마도통사로 삼고 조석문(曺錫文) ·허종(許琮)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을 대장으로 하여 3만의 관군을 출동시켜 투항을 종용하였으나 반란이 아님을 상계하고 항복에 불응, 북도민의 중용을 거듭 요구하였다.
관군의 공격을 받아 북청에서 두 차례 격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한편 왕의 유서(諭書)로 반란임을 알게 된 백성들이 협력하지 않고 조정에서 논상절목(論賞節目)이 반포되어 부하 장수들의 동요가 심하던 중, 조정에서 밀파된 허유례(許惟禮)의 계교로 부하인 이주(李珠) ·이운로(李雲露)에 의하여 체포되고 참형(斬刑)에 처하여 각도에 효시되었다. |
첫댓글 남이 장군 시로 하기로 결정했나???좋으네...'산석'부분과 '이십미'부분이 조금 약한 듯하니 잘 조절해서 써봐요, 묵계선생...
아직 정하진 못 했습니다...선생님께 여쭤보고 결정하려고 합니다...그리고 선생이라뇨...ㅡㅁㅡ;;전 그냥 현호가 좋습니다~선배님~!!
알았어~~~~~~~~!글구 뭐 필요한 것 없나???있으면 말해..보내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