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시간의 알갱이가 켜켜이 쌓인 부유물이 그 흔적이다 싶어서인지 세월은 그 단어 자체만으로는 어딘가 느낌이 션찮고 헙헙하다싶다. 담배 한대쯤 지그시 물고나 한숨을 한 번 내뱉고 말을 시작해야 제대로 임할 것 같은 그런 무게감... 그러기에 세월은 삶의 과정이 내포된 흐른다든지 간다든지 하는 여정내지 겪음이 들어서야 비로소 직수굿한 의미를 사려 갖는 게 아닐까. 숫한 인연과 사연을 보담은 그런 세월은 누구에게든 한때는 유심한 여정으로서 이겠지만 또 무심히 내처 흔적도 아련해지는 무정함도 서려 있다. 누구든 시간이 지난 연후에는 눈 지릅뜨고 뻗질러 나서며 부엿하다 싶었던 시절이 그 언제이던가 하며 소회를 말하곤 한다.
어름거리며 미루적거리다 어느 참 눈물지으며 애틋한 정서로 남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는 아쉬움에 미처 지우지 못한 여남은 것들을 추슬러 부황난 가슴 구석 후비며 스민 채독을 가시곤 한다. 이를 달리 감성적으로 표현해 그리움이라 하던가. 그런 점에서 글쟁이들은 행복도 하다. 언제든 거미줄에 드레드레 얽힌 것들을 설핏 상면하고 또 곱씹으니 말이다. 누가 얼마나 생동감 넘치게 지난 시간 묘사를 잘 하는가. 나도 그 재주를 탐하며 세월의 매듭을 잇고 있다. 아니 나는 곰팡이 피우며 그 겨울날을 여전히 알겨먹고 있다.
하지만 세월을 우두망절 서글픈 시절의 우수어린 동정 아니라면 간수에 그만 부얼부얼 엉기던 두부 솥의 구수한 내음이나 탐스런 뽀얀 자태 같은 여음의 논조로만 묘사하는 것은 글쟁이들의 그야말로 어설픈 낭설이다. 세월은 덩실하고 우아하다거나 싱글싱글한 그런 앳된 해설 핀 기억으로서 말할 것만이 아니다.
실상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보며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실상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대수롭지도 않았다. 당연 변하는 게 하도 많아서이기 때문이겠지만. 무엇이 왜 안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나로선 더 중요했다. 그게 현실을 사는 것이고 바로 세상사는 이치다. 이에는 꼭 결부된 것이 있다.
벌판에서 얼음지치던 바람이 신작로로 몰려 말달리기 시작하면서 눈자위가 맵고 두 볼이 남의 살이 되도록 그 모진 추위는 한결 같았고 그 시름을 저물리며 이날 이때 산 존재들이 무엇을 달리 말하겠는가. 가는 세월에 대해 보다 더 솔직해지자면 정도 사랑도 행복도 밑천이 들어간다는 엄연한 사실이고 각다분하다는 것의 여로로써 먹고 산다는 것은 씁쓸한 노릇이지만 다분히 경제 돈을 말하는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멍울졌던 회포나 구순한 삶의 여울이 그다지 할 일이 없는 이 나이쯤 더 어루만져지고 애틋해지는 것은 그만큼 삶의 존립이 허술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나이 큰돈은 벌릴 리도 없지만 벌 필요도 없다. 이미 내 인생의 의미가 싫든 좋든 사진 영상 투영되듯 거실 다 표출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어느 누구도 이를 거슬려 살수는 없다. 누가 현세에 달라지지 않는 것쯤의 하나로 순수함의 극치 전영택의 화수분을 곱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물론 살아보니 겪음 한 바가 적지 않았듯 길흉화복이건 일상의 범속한 일이었건 삶의 과정은 무슨 조짐이나 예측도 없이 우연으로 시작되기 예사이고 종말 역시 그렇게 맺던 것에 바탕 하여 거두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어느 날로 시작되는 지극한 우연성을 부인을 못하겠다. 하지만 그 우연을 그냥 두지 않는 기실 거반 차지하는 거나 다름없는 경제관념을 도외시하곤 태반 성립이 안 되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우연에서 필연으로 아니면 이미 정해진 귀결을 자처한 숙명이란 것을 뒤 미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세월은 변하여 달라진 것들을 사랑할 뿐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 인간의 정서, 목숨은 소중하기 때문에 가치가 1조를 넘어 무한대라고 부여하는 것의 무궁함으로써 의미 있지만 막상 현실에선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도 다 아는 상식이다. 사람 목숨에 대한 가치 측정은 늘 요구받는 사회시대 값이기도 하다. 사람 몸값이 개 값이란 말은 70년대 소설에서 줄곧 회자되었었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시 사람 목숨의 가치가 1조라면 이 사회는 어떻겠는가. 경제학 적 논조는 비정하고 아름답다 할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실생활에서는 꼭 필요한 본능적 학문이고 먹고 산다는 세월 속에는 늘 돈이 인류사와 더불어 수 천 년 째 심통을 췌지르는 부아덩어리로 웅크리고 앉아 버티고 있음이다. 일찍이 역대 글들은 사랑과 이별 권력과 명예 등등 격렬한 사회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군상등을 숫하게 그려왔다. 그 저변엔 굶주림이나 가난이 차지하는 것은 거의 예외가 아니다.
세월이 엮은 인생 소사로서 우리 집만 보아도 먹고살기 위해 각기 흩어져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돈은 생을 바꾸고 세월을 지배하기까지 한다. 나를 적자면 아마 돈 벌기 위해서가 전제가 되고 생도 그와 지독한 유관일 것인데 진솔한 글을 쓰자는 수필가란 작자가 한 번도 이 얘기를 제대로 꺼낸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지금까지의 내 글은 거의 위작이나 다름이 없지 싶다. 수필은 얼마만큼 발가벗겨질 수 있을 텐가가 관건이고 앞으로 나의 글 행보 또한 보다 청렴결백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이번 테마 글로 세월 속에 비추어진 부동산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70%를 쥐고 흔드는 부동산은 한국 특유의 빈부를 가르는 향배로써 지금도 불패신화를 낳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부동산은 모름지기 이 세상의 주인으로 군림하며 국가도 쩔쩔매고 허둥대기 일쑤다. 부동산은 그러면서 또한 사거나 팔거나 보유하거나 늘 발생하는 국가 재정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다하고도 있다. 진퇴양난의 부동산, 왜 이런 지경이 된 것일까. 불과 40년 만에 이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비결은 무엇이며 이에 기대어 사는 우리는 또 어느 환상을 믿고 있는 것인가.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다운계약서 작성, 위장전입과 논문표절이 말해주듯 법률을 위반하는 적극적 부패행위는 아닐지라도 거반 우리는 사회 적 공익성 의무를 다하지 않고 살고 있다. 이도 넓은 의미의 부패다. 환상을 쫓는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번 글에서 좀 더 솔직해지고자 한다. 낱낱이 고백하여 실태를 정확히 알고 깨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 수필로써 부동산을 글 주제로 잡는 데는 시사성은 어떨지언정 서정성이라는 일면에서는 큰 무리가 따른다. 일종에 모험을 자청하는 우격다짐으로서 두려움은 있다. 수필 운운 글은 자칫해서는 꼴값 난 난봉을 유발할 수도 위화감 내지 자화자찬으로 돌변하여 쉬이 식상할 수 있으며 재미가 반감될 소지가 다분하다고도 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경제관념이 동반된 사회성 글들은 어찌 돈을 남길 것인가가 주요 목적이고 그 비축 물들은 잘 유용되고 책도 잘 팔린다. 정녕 수필로서는 한계가 있다 말할 텐가. 나는 꼭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사실성과 친연성이라는 수필 장르의 개성을 한껏 누린다면 못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어쩌든 내 세월 속에서 아니 전 국민이 토끼 눈 부릅뜨고 쳐다보는 땅 조각에 대해 짐짓 모른 체 우리네 인생을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탕이고 거짓에 가까운 작위적 글 차림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해보면 문학 속에는 부동산에 대한 뼈아픈 흔적들이 많이 상재해 있다. 그것이 그 당시의 현재를 짓누르는 아프고 슬픈 삶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문학적으로 투영된 부동산의 옛 그림자를 상기하며 불과 40년 안팎에 불과한 부동산의 널뜀의 근본적 원형을 우선 살폈고 이어서 현 시대를 부동산의 일벌레로 산 장본인으로서의 그에 연계 된 내 삶을 가감 없이 들춰냈다. 물론 전형화 된 단면을 싹둑 잘라 전 국토에 퍼진 부동산 실상을 바로 알자는 것이고 이는 통렬한 자성 속에서 어느 획기적 전환점을 구축할 방도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기대와 미련 때문이다.
삶의 가치 속에 숨 쉬는 공간의 재인식에 대해 미력하나마 말하고 싶었다. 알고 보면 서울 강남 불패는 안보라 하는 아주 단순한데서 촉발했다. 나로선 참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이다. 여러분들도 부동산에 예속화된 각자의 삶으로부터 벗어날 방도는 없는 것인지 진정한 삶의 질 그리고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차원에서 내 글을 바라보면 고맙겠다. 정말 이대로는 우리의 앞날은 없다. 어찌 이 지경까지 왔나 하는 나의 촉발은 앞만 바라보고 달린 결국 무계획화 된 당국과 무심한 세월 탓이라 여긴다. 내 꿈도 야망도 부동산이 모두 앗아 갔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 잃어버린 이 땅의 올바른 가치는 우리로부터 다시 생성된다는 본분을 더 이상 망각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차례
1부: 서울공화국 부동산 불패 서막은
1. 마당 깊은 집
2. 가난의 대명사 판자촌 그리고 달동네
-1. 연탄
-2. 전기 (110볼트 선풍기)
-3. 쌀 (고봉의 흰 쌀밥과 통일 벼 )
-4. 라면이야기
3. 서울은 만원이다.
4. 서울에는 서울 사람이 시골에는 시골사람이
5. 한강의 기적과 김현옥 서울 시장
6. 성남시 단대동
-1.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7. 나는 모래섬, 율도
8. 여의도 시범아파트
-1. 영등포의 밤 & 마포종점
9. 강남 불패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10. 정부가 전적으로 주도한 강남불패
11. 반포 압구정 그리고 잠실
12. 아날로그 추억은 이제 없다.
13. 개포동과 상계주공 아파트
14. 부동산 잡설 총론 1
2부: 진화의 땅 안양 30년
15. 내 고향 안양
16. 내 살던 곳, 주접동 547번지
17. 신작로
-1. 신작로는 문명이다.
-2. 신작로는 운명이다.
18. 시간 멈춰 선 영상 둘
-1. 소몰이꾼
-2. 마부
19. 오라이 버스 1
20. 오라이 버스 2
21. 고구마 밭이 전하는 것들
-1. 한민족의 순애보
-2. 계
-3. 크림빵
22. 안양 읍내
23. 안양유원지
24. 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25. 새 집 이사, 545-29번지
-1. 이 세상의 삽질
-2. 괘종시계
26. 그 시절의 아픔들
-1. 그 시절의 아픈 기억들
-2. 나는 그 시절 순진했다
27. 고구마 밭의 변신
-1. 취직 시험
-2. 고구마 밭은 우리 집의 로또였다
28. 평촌 신도시
29. 2740 숫자와 송암
30. 호암지구 재개발
31. 보상비
32. 현금 청산
3부: 구즉 마을의 송강동 별곡
33. 살림집 장만
34. 서울공화국의 의미
35. 근무처 사람들에게 서울 집 값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36. 나의 인생 길 소사는
-1.날 보러 와요.
-2. 점심 값 오백 원의 차이
37. 송강동이라는 동네
-1. 송강동 1톤 트럭
38. 구즉 마을 사람들
39. 홍가네 생태집 큰 아들
40. 송강동을 한 달 새 수십 번 찾으며
41. 장조카와 삼촌 관계
42. 건물 관리 그리고 세입자
43. 부동산의 양도와 세금
44. 부가세와 취득세
45. 건물관리와 수도꼭지
46. 부동산 잡설 총론 2
37. 송강동이라는 동네
연구단지 한 복판 어은동에서 22년을 살다 내가 이사를 온 곳은 용산동이란 곳으로 이곳은 대덕 테크노밸리라는 칭호를 부여한 특구가 있는 관평동과 이웃하고 또 그 옆에는 내가 즐겨 찾는 송강동이란 동네가 존재한다. 아파트와 좁은 골목이 뒤섞여 정연하지 못한 어수룩한 송강동이란 이웃동네. 나는 관평동을 건너 띄고 이 동네를 자주 간다. 계획화된 관평동이나 우리 동네는 걷는 사람도 보기 힘들고 올망졸망한 떡볶이나 오뎅, 만두집 통닭집 같은 옹색한 먹거리 풍경을 볼 수가 없다.
땅값이 비싸 적은 돈 푼을 만지작거려선 이문이 남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은 딱 짚어 말하기는 그렇지만 어딘가 안양의 옛 냄새가 난다. 아니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소설이야기와 똑같다. 1987년에 초판이 발행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쇄를 바꿔가며 꾸준히 사랑받아온 『원미동 사람들』이 오랜 세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격이 다른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 양귀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 치욕적인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애환을 섬세한 손길로 복원시켜 놓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지지리도 못난 삶을 살면서도, 수많은 절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틀어쥐고 있다. 그렇기에 슬프지만, 또 그 때문에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살아남기 위해, 뒤쳐지지 않기 위해 우리들이 발버둥 치면서 슬그머니 놓아버린 그 어떤 소중한 가치들을 작품의 주인공들은 보석처럼 간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하생활자는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한다. 또 서울서 밀려난 인생들은 다시는 서울로 진입하지 못한다. 그들이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가는 그들의 처지를 바꾸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송강동도 흡사 닮았다. 아낙네의 웅성거림, 아이들 칭얼거림이나 구부정한 노인들이 북적이는 흔한 풍경은 송강동에서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으며 사람 사는 고유의 향취가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나는 그러니까 사람구경에 덧붙여 재래시장도 껴 있는 비교적 싼 물가를 찾아 이곳에 오는 폭도 된다.
내가 즐겨 찾는 통닭집 또한 이 동네에 있다. 친근한 냄새와 시시콜콜한 동네 풍경이 종전 살던 동네와 닮아 늘 하는 수작처럼 익숙해서 찾게도 된다. 길 편에는 통닭집이 무려 다섯이 넘고 피자집 또한 다섯은 족히 된다. 고만고만한 영세 상인들이 오토바이 두세대 놓고 동네를 누비며 먹고 산다. 그런 요즘 통닭집 부부는 풀이 많이 죽어 있다. 신세타령을 들어봤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처음 동네가 들어설 무렵엔 무척 신이 난 그들이었다. 개발지구라고 동네 땅 값이 오르자 통닭도 덩달아 잘 팔렸었다. 나도 그때쯤 그들을 처음 만났었다. 그의 아내는 잘 나가는 그때 점포를 팔았어야 한다고 남편을 늘 몰아 부친다.
그런 그들에게 암운이 드리운 것은 관평동과 송강동 사이에 롯데마트라는 유통매장이 들어서고부터다. 어디고 요즘은 신시가지에는 노란색 칠한 눈길 끄는 큰 유통매장이 꼭 생겨난다. 온 동네사람들이 어느 참 그곳으로 몰려든다. 실은 나 역시도 가끔 들르는 편리한 최신식의 장소다. 큰 매장만큼 통도 남다르다. 어느 날 통 큰 치킨이 나오더니 통 큰 피자가 등장했다.
10년 터득한 바싹 튀기는 기술이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통 큰 가격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일본만 해도 큰 매장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동네주변은 작은 슈퍼나 재래시장이 나름 먹고들 사는데 마냥 아쉬운 노릇이다. 다수의 자존과 자립 문제는 사회구조의 큰 취약성이 아닐 수 없다.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노름 마냥 밑돈 두둑한 치들에겐 별 수가 없다. 돈은 손이 큰 한 곳에 몰려들기 마련이고 꼴등은커녕 2등이나 3등에게도 차지가 안 돌아간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현실, 1%의 특권층에 맞춰져 있는 정치·경제적 지배구조는 심한 우려를 낳는다.
통닭을 튀기던 아줌마가 갑자기 고개를 밖으로 내민다. 왜 그런지 나는 익히 잘 안다. 오토바이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그 소리는 폐색 짙은 여음이다. 그래봐야 고작 몇 마리 차이 일 것인데 경쟁이 아니라 장사를 그만 두어야 할 단정으로 지금은 받아들인다. 배달을 마친 그녀 남편이 들어왔다. 황금 시간 때 밀린 주문이 그를 늘 기다렸는데 요즘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그렇지만 세상구조가 그러한 것을 그 누구를 탓할 것인가. 이제는 큰 유통매장을 나무랄 수도 없다. FTA 무역협정통과는 동질의 보다 큰 현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 매장이 들어오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쓰나미가 일어날지 모른다. 이제는 그들과 잘 싸워 달라 부탁을 해야 할 처지이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싶은데 알고 보면 돈이면 다 되는 아주 단순 명료함이 있다. 예전엔 열심히만 하면 먹고는 살았는데 요즘은 그러하지 않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돈을 버는 이치는 같지가 않다. 참다웠던 인류의 역사는 제각기 땅을 일구고 소출을 얻은 기쁨이 충만하던 성실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긴 지 10년을 겨우 넘긴 송강 마을이 어느 새 구닥다리가 되어 버린 요즘. 밀려나는 세상풍경 속에 선 나 역시도 어쩔 수 없이 무참하게 헐벗다 이내 사라질 것이란 두려움을 같이 느낀다. 아니 이미 밀려나 허름한 동네 어귀에서 같이 맴돌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날로그 타입 소박한 인심은 규격화 된 대형 포장지에 밀려 이제 모두 사라질 모양이다
-1. 송강동 1톤 트럭
좁다란 골목길에 못 보던 1톤 소형트럭이 하나 늘었다. 후미진 동네 끝 낡은 청승이 햇수를 실감나게 하고 혹여 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고물차를 닮은 허룩한 한 사내를 이후 자주 보았다.
그를 보자 "큰돈이 안 들어가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언젠가 본 기사 한 대목이 불쑥 떠올랐다. 1톤 트럭은 '서민 트럭'이라 불린다. 사람들이 몰리는 길목에 세우기만 하면 바로 가게가 된다.
거리에서 과일 채소를 팔거나 , 택배 식자재 등 배달 일을 하는 서민 자영업자들의 손발 역할을 한다. 1톤 트럭의 주인은 생계형 자영업자들이 대부분이다. 임대료가 버거운 영세업자들에게 1천만원대 1톤 트럭은 든든한 생계 수단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1톤 트럭은 서민경제 온도와 직결된다. 요즘 1톤 트럭이 시중에 동이 났다고 한다. 트럭 판매가 늘어나는 건 경기부진과 고용불안의 결과이기도 하다.
1톤 트럭이 세워진 동네가 허접한 변두리이듯 영세한 삶은 차량도 중고시장 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마땅히 재취업할 곳이 없어 식당 분식점 프랜차이즈 같은 자영업을 택하는 요즈음이다.
중고차 매매가 많다는 건 사려는 쪽 뿐만 아니라 팔려는 쪽도 많다는 사실인데, 이 역시 위태로운 자영업의 현실을 반영하는 단면이다. 경기부진으로 물동량이 줄어 트럭 자체를 처분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실직자들은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자영업을 택하지만 워낙 생존이 낮은 업종이라, 결국 자영업을 하던 이들이 소유하던 소형트럭을 내놓고 다시 자영업을 하려는 이들이 이를 되사는 상황이 악순환처럼 반복되고 있기도 한 셈이다.
그의 차가 시동이 잘 안 걸린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다가갔다. “좀 밀어드릴까요.” 겨우 시동을 건 그가 아무 도움도 안 주었는데도 연실 고맙다고 한다. 얇은 옷 츄리링 차림이 가난을 말하는듯 하다. 야채시장이라도 향하는 길일까. 배추 시래기 잔무리가 축 늘어져 걸쳐 있었다.
그의 한숨과 꿈을 싣고 달리는 1톤 소형 트럭. “차 아직 씩씩한데요.” 그에게 힘주어 말을 건넸다. 다니는 트럭보다 서있는 트럭이 많다는 현실에 그의 애마는 씩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운명이다 싶었다.
경기가 안 좋은데도 없어서 못 파는 1톤 트럭의 이례적인 인기는 그나마 이것도 아니면 생계 꾸릴 방법이 없는 서민들의 우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콜록콜록 감기라도 걸린 양 덜덜거리며 떠나는 골골한 몰골이 수상하여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런 차는 그날 이후 내 기대와는 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주인도 같이. 잠시 병원에 간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주 떠나 버린 것은 아닐까. “눈 내리고 추워지면 아마 더는 못 버틸거야.” 나도 모르게 나오는 헛말이다. 잿빛 하늘이 잔뜩 찌푸린 것이 예보대로 오늘은 눈을 뿌릴 험한 기세이다. 아! 세상은 겨울처럼 너무 춥다. 개인 소득이 2만불이 넘는다는데 돈은 누가 다 지니고 산단 말인가. 알다가도 모를 세상사다.
첫댓글 주접동 547번지였어? 난 비산동 547번지였는데.......<세월, 시간의 알갱이~~~~험험하다싶다> 이 표현! 기막히다~~난 느끼기는 하는데 옮겨지지가 않아.....요즘은 말도 하기싫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