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로 KIA에서 다시 만난 서재응과 김상훈. 중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인연이 깊은 우정으로 자리매김했다.(사진=이영미)>
2018시즌 KIA 타이거즈 1군 코칭스태프 중에는 새로운 얼굴이 눈에 띈다. 지도자로 첫 발을 내딛는 서재응 코치이다. 이대진 코치와 함께 1군 투수진들을 지도할 예정이다. 그동안 줄곧 2군에 머물렀던 김상훈 코치도 1군 배터리 코치로 보직을 옮겼다. 대신 나카무라 타케시 코치가 2군으로 이동했다.
서재응과 김상훈은 충장중-광주일고에서 함께 야구하며 동고동락했던 친구 사이다. 고교 졸업 후 김상훈은 고려대로, 서재응은 인하대에 입학했고, 김상훈이 해태 타이거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면 서재응은 인하대 재학 중 미국으로 향했다. 2007년 서재응이 KIA 타이거즈로 복귀하면서 비로소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해후했던 두 사람. 김상훈은 서재응의 전담 포수를 자처하며 서재응의 복귀를 도왔고, 서재응은 친구의 희생과 배려 덕분에 한국 프로야구에 적응해 나갔다. 은퇴 후 김상훈은 지도자로, 서재응은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가 올시즌 서재응이 현장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만난 두 사람. 광주에서 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현장에서 다시 만난 절친들의 소회
1군 지도자 생활이 처음인 김상훈 코치. 2군에서 젊은 포수들 육성에 힘을 쏟다가 ‘빅리그’ 복귀를 앞둔 그로선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KIA 타이거즈는 지난 시즌 통합 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내가 합류해서 행여 팀 성적이라도 떨어진다면 어떻게 하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2군과 1군의 지도 방법은 차이가 있다. 성적을 내야 하는 무대에서 내가 팀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기쁜 마음도 있지만 좀 더 철저히 준비해서 선수들을 만나야 한다는 숙제도 안고 있다.”
코치 경력 3년차도 이런 걱정을 하는데 이제 막 지도자 생활에 발을 들여 놓은 서재응 코치는 오죽할까. “당연히 부담스럽다”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이 커진다. 지도자 경험이 없는데 너무 큰 보직을 맡은 것 같다. 방송 해설도 처음에는 시스템을 잘 몰라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불펜 코치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처음에 코치직 제안을 받고 고민이 많았다. 상훈이가 결정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2년 전부터 꾸준히 얘기가 있었는데 결심을 굳힌 부분도 내가 돌아갈 곳이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대진 형님도 많이 반가워해주셨다.”
서재응 코치의 얘기를 듣던 김상훈 코치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재응이가 평소 야구나 선수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동안 방송 해설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현장을 그리워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긍정적인 사고와 야구 지식이 깊고 경험도 다양한 터라 선수들이 재응이를 통해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재응이랑 함께 생활했던 선수들로선 재응이를 다시 만난 게 큰 힘이 될 것이다.”
KIA 타이거즈는 지난 시즌 통합 우승 이후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뤘다. 허영택 단장이 구단 사장으로 승진했고 조계현 수석 코치가 단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코칭스태프의 움직임 폭이 컸다. 정회열 수석 코치와 홍세완(타격) 이대진(투수) 서재응, 김상훈, 김종국(주루) 코치는 해태-KIA 타이거즈 출신이다.
<2016년 서재응 은퇴식에 함께 했던 코치 김상훈.(사진=KIA 타이거즈)>
환상의 복식조였던 두 사람
김상훈 코치는 2014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했다. 2016년 1월 은퇴를 결정한 서재응 코치보다 빠른 은퇴였다. 서 코치는 김 코치의 은퇴를 미리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운함이 더 컸다고 하자 김 코치는 친구에게 미리 얘기하면 은퇴 결심을 굳힌 자신이 흔들릴 것 같아서 미리 말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서 코치는 김 코치와 배터리를 이루며 호흡을 맞췄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마운드에서 90% 정도는 상훈이의 꼭두각시였다. 상훈이가 원하는 대로 던졌기 때문이다. 상훈이랑 배터리를 이루면서 사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고개를 흔든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미국에서 복귀한 초반에는 서로 스타일이 달라 혼선을 빚긴 했지만 이후엔 상훈이의 리드대로 공을 던졌고, 또 그게 편했다. 한 번은 상훈이가 나한테 다가와선 ‘재응아, 오늘 사인이 막힌다. 네 하고 싶은 대로 던져봐’라고 말하더라. 그런 날을 제외하고는 상훈이한테 모든 걸 맡겼다.”
“나 역시 재응이를 존중했다. 내가 재응이 보다는 한국 프로야구 경험이 많지만 투수는 자기가 던지고 싶은 대로 투구해야 한다. 포수가 우겨서 리드하면 경기 후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처음엔 재응이가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지게 했다.”(김상훈)
“그래서 내가 박살이 났다(웃음).”(서재응)
싸움으로 시작된 인연
충장중학교 야구부에서 처음 만났던 두 사람. 인연은 싸움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목욕탕에서 싸움이 시작됐다. 서로 발가벗고 치고 박고 싸웠다. 선배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싸움 원인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기 싸움을 벌인 게 아닌가 싶다. 그 싸움 이후 부쩍 친해졌다. 재응이는 그때도 입담이 장난 아니었다. 거짓말하는 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둘 다 ‘꼴통’ 짓은 다 하고 돌아다녔다.”(김상훈)
“(조)윤채랑 나, 상훈이의 키가 엇비슷했다. 셋이서 서로 크다고 우기며 싸운 적도 있었다. 주로 셋이 잘 어울려 다녔다. 매점도 같이 다니면서. 상훈이는 줄곧 포수만 맡았고 난 중학교 때 내야수를 보다가 고등학교 올라가서 투수를 했다.”(서재응)
중학교 시절 실력은 김상훈 코치가 먼저 인정받았다. 포수 유망주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서재응 코치는 왜소한 체격으로 크게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광주일고 진학 후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허세환 감독님이 타격에 소질이 없으니까 공이라도 던져보라고 권유하셨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투구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공을 잡았다. 고2 올라가면서부터 조금씩 투구폼이 잡혔고 자신감도 생기는 듯 했다.”
서재응의 설명에 김상훈은 “재응이 투구폼이 아주 예뻤다”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준다.
“고1 때 재응이 공을 처음 받아봤다. 그때도 체구가 왜소했지만 볼을 채거나 공을 던지는 폼이 정말 예쁘더라.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혼란스러워 하다가 고2 때부터 자신의 공을 던지기 시작하더라. (서재응한테) ‘그때가 봉황대기였지?’ (서재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대회에서 서재응이 엄청난 성적을 거뒀다. 경동고와의 예선전에서 재응이가 완봉승을 거둔 것이다. 당시 내가 포수 마스크를 썼다. 그날 재응이가 완봉을 할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다. 그런데 볼 끝이 살아 움직이면서 굉장한 공들이 들어왔다.”
서재응은 당시 완봉승의 비밀을 이렇게 털어 놓는다.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는 바람에 통증을 참고 던졌는데 오히려 볼이 더 좋았고 완봉승을 거둔 것이다. 덕분에 투수에 대한 재미를 느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야구인생의 전환점을 이룬 대회였다.”
<중학교 시절의 서재응과 김상훈. 가운데 초록색 옷을 입은 이가 서재응. 오른쪽에 있는 이가 김상훈이다. 서재응의 왼쪽 편에 있는 선수가 조윤채.(사진제공=서재응)>
광주일고 시절, 야구부 탈출 사건
야구도 열심히 했지만 사춘기 시절 방황을 거듭했던 고교 시절이었다. 대학 진학이 중요했던 고3 시절, 서재응과 김상훈은 동기들과 야구부 탈출을 시도했다. 나름 사연이 있었다. 김상훈 코치의 얘기를 들어보자.
“전국대회인 대통령배 대회를 앞두고 광주일고는 우승 후보로 손꼽혔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부터 마치 우승팀이라도 된 듯 들뜬 모습을 보였을 정도이다. 그런데 1차전에서 선린상고(선린인터넷고)를 만나 패하는 바람에 바로 탈락했다. 광주로 내려온 선수들은 전체 기합을 받았다. 그런데 정도가 너무 심했다. 고3 선수들만 따로 모여 논의 끝에 도망가자는 결론이 나왔고 다음날 아침 광주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막상 나가보니 고3 선수들 8명 중 3명밖에 안 나왔더라. 더욱이 재응이는 혼자도 아니고 아버지를 모시고 나와 깜짝 놀랐다.”
서재응 코치도 아침에 일련의 해프닝을 겪었다고 한다.
“터미널에 가려고 집을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내 방문 앞에 앉아 계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같이 학교에 가자고 앞장을 섰다. 우리의 계획을 눈치 채셨던 것이다. (조)윤채까지 걸리는 바람에 나랑 윤채가 아버지한테 이끌려 터미널에 나타났으니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나. 결국 아버지의 요구대로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향했고, 우리는 감독님한테 청룡기대회 우승으로 보답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청룡기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난 우수투수상을, (김)병현이는 대회 MVP를 수상했다. 병현이 덕분에 우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김 코치는 아주 재미있는 내용을 덧붙였다. 친구의 얘기에 서 코치도 폭소를 터트린다.
“사실 난 고2 때 이미 고려대로 진학 예정이 됐기 때문에 굳이 내가 그 탈출에 합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다 같이 가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동참한 것이다. 원래는 전날 도망치려 하다가 하루 숙박비라도 절약하자며 집에서 자고 다음날 터미널에서 모이기로 한 건데…. 만약 전날 도망쳤더라면 이후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야구는 같지만 둘이 걷는 길은 달랐다
고려대 인하대로 각각의 방향을 정한 두 사람. 대표팀에서 다시 만나 호흡을 이어나간다. 1997년, 대학생 신분으로 출전했던 한미야구선수권대회. 미국에서 펼쳐진 대회에서 서재응은 호투를 펼쳤고, 이 부분은 서재응의 미국 진출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1998년 뉴욕 메츠에 계약금 135만 달러를 받고 입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재응이 볼이 아주 좋았다. 150km의 구속에 제구까지 완벽했다. 미국팀 선수들이 재응이를 상대할 때 공이 들어온 다음에 스윙할 정도였다. 원래 김선우가 에이스였는데 발목 부상으로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다. 덕분에 재응이가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했고 빼어난 공을 던지면서 주목을 받았다. ‘아, 이 정도면 재응이도 미국에서 통하겠구나’ 싶었는데 진짜 미국 진출을 성공시키더라.”
<투수와 포수로 동고동락했던 친구들. 코치로 다시 만난 그들이 KIA 타이거즈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지 궁금하다.(사진=이영미)>
KIA 타이거즈에서 다시 만나다
김상훈 코치는 대학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에서, 서재응 코치는 대학 재학 중 뉴욕 메츠에 입단했고 이후 메츠에서 7년을 보낸 후 LA 다저스와 탬파베이 데블레이스로 팀을 옮겨 다니다 2007시즌 후 고향 팀인 KIA 타이거즈로 복귀하게 된다.김 코치는 친구와 한 팀에서 만나게 돼 설렘이 컸다고 회상한다.
“오랫동안 상상 속에 있었던 장면이 현실로 나타났다. 재응이랑 다시 한 팀에서 뛰고 싶었는데 국내 복귀를 결정한 것이다. 재응이가 2008시즌을 앞두고 스프링캠프에서 부상당하는 바람에 시범경기 때 처음으로 공을 잡기도 했었다. 부담이 많이 됐을 것이다. 모두가 ‘메이저리그 28승 투수’라는 화려한 간판을 달고 복귀한 서재응이 어떻게 투구하는지를 지켜봤으니까.”
서재응 코치는 KIA로의 복귀 후 김상훈 코치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내가 스피드가 있었던 선수가 아니지 않나. 제구력으로 승부했기 때문에 상훈이의 리드가 아주 중요했다. 상훈이는 날 차분하게 만들어주면서 리드했다. 상훈이가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김 코치도 서 코치과의 절묘한 호흡을 떠올렸다.
“강속구 투수라고 해도 볼만 빠르고 제구가 안 되면 포수로선 제일 난감하다. 내가 원하는 곳에 정확히 던질 수 있는 투수라야 포수도 안심이 된다. 재응이는 그런 점에서 나랑 정말 잘 맞았다. 내가 공 하나를 빼면 이걸 왜 빼는지, 다음에는 어떤 사인을 내려하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투수도 본인이 이해를 하고 던지는 것과 그냥 포수 리드대로 던지는 것과는 다르다. 본인이 이해하고 던지니까. 재응이는 팀을 위해 희생도 많이 했지만 승운이 없는 케이스였다. 선발뿐만 아니라 불펜, 마무리도 하며 팀이 원하는 곳에 있으려 했다. 승수가 9승에서 멈춘 건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서 코치는 2008년 복귀 후 첫 승을 거뒀던 잠실 두산전(4월 29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당시 KIA는 3연패의 늪에 빠져 있던 상황. 서재응은 시즌 개막 후 6경기 만에 첫 승의 감격을 누렸다.
“두산 1번 타자가 이종욱이었다. 상훈이가 몸쪽 사인을 내더라. 스트라이크였다. 두 번째 공도 몸쪽 사인이었다. 또 스트라이크였다. 설마 했는데 또 몸쪽이더라. 이종욱을 3구 삼진으로 끝냈다.”(서재응)
“재응이 볼에 이종욱이 적응 못하는 듯 했다. 괜히 다른 쪽으로 빼다가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험을 해봤는데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그때는 진짜 짜릿하더라.”(김상훈)
선동열 감독과 서재응의 무실점 기록
서재응은 가장 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12년 목동 넥센전(9월 23일)에서 완봉승을 이뤘을 때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완봉승이라 더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44이닝 무실점 뒷얘기.
“한 번은 선동열 감독님이 더그아웃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신 후 날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응아, 한 번 깨봐. 깨볼 수 있으면’. 당시 감독님은 37이닝 무실점 기록을 갖고 계셨고, 그 기록은 25년 동안 누구도 깨지 못했던 숫자였다. 기자들이 무실점 기록에 관심을 갖자, 나를 자극해서 오기를 갖게 하시려 했는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감독님 말씀을 듣는 순간, ‘아, 이건 정말 깨야겠다. 내가 기록 경신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승부욕이 생기더라. 결국 군산구장에서 열렸던 롯데전(2012년 9월 30일)에서 1-0 완봉승을 거두며 44이닝 무실점 신기록을 세웠다. 더그아웃에서 감독님의 축하를 받을 때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코치로 가는 길, 서로의 다짐
인터뷰 말미에 서재응, 김상훈 코치는 다음과 같은 다짐을 전했다. 다짐은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인연이 선수 생활을 거쳐 은퇴 후 코치로 이어지는 관계 속에 깊은 우정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방송 해설하면서 야구를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생겼다. 그게 코치 생활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오랜만에 현장으로 돌아가는 터라 긴장과 설렘이 공존한다. 선수들과 소통하고 도움이 되는 코치가 되고 싶다. 상훈이가 잘 이끌어 주리라 믿는다.”(서재응)
“코치와 선수는 상하관계도 수직관계도 아닌 상호관계이다. 인기있는 코치보다는 도움이 되는 코치가 되고 싶다. 타이거즈의 명성을 이어가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재응이는 멋지게 해낼 것이다.”(김상훈)
<서재응, 김상훈 코치를 만난 날은 광주에 눈이 많이 내렸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라면 든든할 것만 같다. 두 사람의 우정이 팀에 녹아 들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란다.(사진=이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