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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첫째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1) (마 6:33)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황궁에서 황태자로 태어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로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황금침대에 누워 황금이불을 덮으시고 나라의 모든 문무백관들과 정관계 거물들이 모여서 슬퍼하는 것을 보는 앞에서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라면서요?
인간적인 왕으로서 인간적인 권세를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지 않으셨습니다. 살기 좋은 복지국가를 만드신 것도 아니십니다. 정치적으로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하신 것도 아니십니다. 배고픈 것을 모두 해결해주신 것도 아니고 병든 것을 모두 해결해주신 것도 아니십니다. 간혹 배고픔을 기적을 통해 면해주시기도 하고 병도 고쳐주시기도 하셨지만 이 세상을 완벽하게 해결해주신 것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왕이 아니십니다. 왕은 왕이신데 그런 왕이 아니십니다.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온 세상을 완벽하게 통치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땅은 언제나 불완전한 곳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있습니다. 배고픈 것과 아픈 것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만한 권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아직 때가 안 되었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셔서 새롭게 하시는 그 날 이후에는 완벽한 세상과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이미 그런 것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심으로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로부터 곧바로 완벽하게 실현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근거를 완벽하게 마련해주신 것을 말합니다. 실현되는 것은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세상 마지막 날에 최후 심판과 구원이 있고 난 이후에 완벽하게 실현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말 못할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때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인 먹고사는 문제마저 해결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보면 “그게 무슨 그리스도인의 삶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예수님께서 최후 심판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날까지 끝없이 괴롭히는 것이 있습니다. 죄와 마귀가 있습니다. 이것이 청산되지 않는 이상 완벽한 세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새 하늘 새 땅에는 이것이 완벽하게 처리가 되었기에 완벽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도 잘못된 곳이 없고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한숨과 저주와 악과 눈물과 안타까움과 미움과 시기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좋은 것만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과 사랑과 같은 영육 간에 그럴 수 없이 좋은 것만 있습니다. 죄와 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정이 다릅니다. 배고프고 슬프고 밉고 아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셨지만 이 세상이 완벽해 지도록 만드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궁극적인 관심은 죄를 청산하시고 마귀를 멸해 버리시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진리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목이 터져라 외치신 것은 무엇입니까? “얘들아, 제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과연 그렇습니까? 그런 말씀을 얼마나 자주 가시는 곳곳마다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신 말씀이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를 믿으라. 구원을 받으라. 복음을 전파하라. 영혼을 구원하라. 제자 삼아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주로 이러한 방식의 말씀이 더 많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주로 영적인 일에 더 많은 힘을 쏟으신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선악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입니다. 그것 하나 빼고는 온 세상의 그 모든 좋은 것이 아담과 하와의 것이었습니다.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하기야 남도 없었지만. 이 딱 두 사람이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즐겁고 신이 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 세상 모든 것을 풍족하게 다 가지고 있었지만 그 달랑 한 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나무의 열매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좋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나무 앞에 가보았습니다. 그 나무를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습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만 따 먹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디에 가느냐? 무엇을 보느냐? 죄가 끌어당기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죄를 지게 하는 것을 보면 안 됩니다. 가는 순간, 보는 순간 유혹에 넘어갑니다. 아예 안 가면 됩니다. 안 보면 됩니다.
어떤 청년이 술집에 들어가서는 옆에서 예쁜 아가씨가 자꾸 술 한 잔 하라고 하기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발 유혹에 넘어가 술을 마시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자기가 자리를 뜨면 됩니다. 그것보다 아예 그런 장소에 가지 않으면 되고 바라보지 않으면 됩니다. 하와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마귀의 속삭임에 어느 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동산 중앙에 갔습니다. 가더라도 ‘이게 아니야’라고 하면서 되돌아왔으면 됐는데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보니까 먹음직스럽게 보였고 보기에도 좋아보였고 탐스럽게도 보였던 것입니다.
탐내는 것을 원어로 보면 ‘탐내다(하마드,dm'j)’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뜻도 있는데 ‘몹시 바라다. 기뻐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몸이 안달이 날 정도로 몹시 바라고 그것을 기뻐할 정도로 탐이 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와는 이 탐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탐을 내도 영적인 것을 탐내야 합니다.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 시편 19편 10절에 보면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사모하다’라는 단어가 ‘하마드’입니다. 영적인 상태가 되면 성경 말씀을 순금보다 더 바라고 더 탐내고 더 기뻐하게 됩니다.
육신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있어야 됩니다. 가져야 합니다. 안 먹고 안 다니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음식도 있어야 하고 돈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것에 집중하다보면 신앙이 병듭니다. 세속화가 가속됩니다. 마귀의 유혹과 덫에 손쉽게 잘 걸려듭니다. 쥐덫에 조그만 먹이를 달아놓으면 쥐가 냄새를 맡고 들어가 덥석 뭅니다. 그 순간 철커덕하면서 문이 닫히고 잡힙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입니다. 필요한 것은 맞지만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은 배부름과 돈을 추구합니다. 어떤 세속화된 그리스도인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추구합니다. 번영신학, 번영신앙에 구미가 당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영적인 일보다 육적인 일에 우선해야 해결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다시 말해 영적인 일을 먼저 구하면 뒤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직접 철썩 같이 약속하신 말씀이기에 더욱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과 같은 영적인 것을 구하게 되면 반드시 뒤따라야 와야만 한다는 방식입니다. 자칫하면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귀가 쳐 놓은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그 뒤에 먹고 사는 것이 반드시 주어진다고 성경 말씀에 철썩 같이 약속되어 있는 말씀이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 지금 당장 반드시 뒤따라와야 한다는 방식. 이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음성이 아닙니다.
마귀는 성경구절을 잘 인용합니다. 아예 뿔이 난 모습으로 접근한다면 이단에 잘 속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명의 천사로 둔갑해서 다가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들고 다가옵니다. 하와를 유혹할 때부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입맛에 알맞도록 그럴 듯하게 살짝 바꾸거나 문맥을 무시하고 한 구절만 쏙 빼내서 적용하도록 해서 걸려 넘어오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해도 속으면 안 됩니다. 성경구절을 그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 얼핏 보면 맞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영적인 일을 구하면 육적인 일도 뒤따라온다는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뒤따라온다는 말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반드시 뒤따라온다는 약속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는 적용은 어떤 것입니까? 마귀는 늘 현실적 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와에게도 현실적인 것을 눈에 보여주었습니다. 마귀는 당장에 뿌리를 뽑아야 맞는 것처럼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얻으려면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뒤따라온다는 말씀을 적용할 때 곧바로 현실 속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과 성령님의 해석은 다릅니다. 마귀는 세상에 모든 것을 쌓아두고 지금 당장 승부를 걸도록 만듭니다. 성령님은 하늘에 쌓아놓도록 하시고 끝까지 참게 하십니다. 누가 맞는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입맛에는 마귀 쪽의 말이 훨씬 더 입맛이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감정에 맞고 우리 마음이 끌린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 해석, 성령님의 해석을 따라야 합니다.
약치고 대부분 쓰지 않은 약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달콤한 약도 알고 보면 매우 쓴 약입니다. 입맛에 달도록 단맛을 더 냈을 뿐입니다. 약은 약입니다.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이라.”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좋습니다. 신약 구약도 매우 씁니다. 먹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마귀가 주는 말이 편해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님의 해석은 힘들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주시는 쓴 성경 말씀이 우리 인생을 치료하는 양약이 됩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치료해주고 우리가 잃어버린 말씀의 입맛을 되살려 줍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는 방식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땅만 바라보는 방식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사는 동안에’라는 방식은 육적인 판단입니다.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보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다 취해야 하고 다 누려야 한다. 다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맞지 않느냐?” 마귀는 현실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이 세상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완벽하게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영적인 일을 구하면 육적인 일도 반드시 뒤따라온다고 했는데 성경이 잘못 됐습니까? 먼저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내가 보는 눈앞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과 상을 주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6).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우리가 행한 대로 공정하게 상을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고 있어야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마귀의 유혹에 걸려들지 않게 됩니다.
이 땅의 사상은 현실적인 것이 기준입니다.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나의 현실에 뒤따라와야 한다는 생각보다 신앙을 까먹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다가 떠났습니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을 눈으로 못보고 죽었습니다. 자손과 땅을 현실 속에서 구경도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으나 약속대로 성취된 것은 그가 죽은 난 이후입니다. 사는 동안 다 가지려면 믿음의 사람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도 약속을 받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곧바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지금 당장, 일주일 안에, 한 달 안에, 일 년 안에 응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꼭 그렇게 되어야 성경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 믿을 수 있습니까? 다 이루어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우리의 믿음에 수정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어떠합니까? 성경에서 내놓으라고 자랑하는 인물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문제를 잘 해결 받고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이더라. 진실로 잘 살았더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약속을 받았으나 현실적으로 받지는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핍박당하고 욕을 얻어먹고 심지어 처참하게 순교까지 당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런 바보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산 사람들을 믿음의 영웅으로 자랑스럽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요? 우리는 육적인 문제에 매달려 있지 않는지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삶, 하나님의 말씀 기준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1-24).
자기 멋대로 산 사람, 자기 법을 만들어 놓고, 이른바 ‘내가 복음’을 만들어놓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임의로 만든 법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쓴 것은 빼고 단 맛만 나는 말씀을 골라먹는 행위입니다. 부담되고 지키기 힘든 영적인 일은 쏙 빼고 그저 현실적으로 잘 먹고 잘사는 육적인 일은 신이 나서 골라내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가져도 만족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부요와 번성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이루어집니다. 새 하늘 새 땅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불만족함이라고는 없는 곳입니다. 좋은 것만 있고 행복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과 같으면 큰 일입니다. 천국의 엄청난 좋은 것을 다 가졌지만 그 어떤 조그마한 한 가지 때문에 안달이 나고 탐을 내면 불행해집니다. 더 이상 천국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의 위험성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다 가져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탐심입니다. 다 갖춘 천국에 가도 탐심이 있으면 그곳은 결국 천국이 되지 못합니다. 에덴동산이 아무리 좋고 딱 두 사람만이 온 세상의 그 좋은 것을 다 가져도 마음에 탐하는 것이 한 개 있으므로 인해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마찬가지로 아무리 천국이 좋더라도 탐심이 있으면 그 좋은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 무언가 하나만 빠져도 그것 때문에 만족함이 없어집니다. 좋다가도 그 하나만 생각하면 금방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하늘 새 땅에는 이 탐심이 없습니다. 욕심이 있으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가져옵니다(약 1:15). 그런데 탐욕이 없으니 탐하지 않으므로 죄를 짓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지만 먼지만한 탐심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영원히 좋은 천국의 환경을 잘 마련해 놓아도 내 마음에 조그마한 탐심이 하나라도 자리를 잡고 있으면 더 이상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조그마한 것이 결국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아무리 외적인 것을 완벽하게 갖춘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그러한 것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욕심이 사라지면 그곳이 심령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다 가져도 욕심이 있으면 지옥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자이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부정부패합니까? 좀 더 출세하고 좀 더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육적인 것이 해결책이 못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해결 받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추구해야 그때에 비로소 물질적인 것, 현실적인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그것을 증명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요함은 멀리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 있는 나의 새로워진 피조물이요 나의 실체인 새사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