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고모령”
비포장 먼지길을 달리든 버스는 도암학교을 조금 지나 정지가 되드니 꿈적도 앉는다.
기사 아저씨는 의자 밑에서 ㄴ자 같이 생긴 긴 쇠 작대기을 찿드니 요즘 지프차 같이 생긴 버스의 앞 쪽에서 작은 쥐구멍 같이 생긴 구멍에다 쇠 작대기을 집어 넣고 죽을 힘을 다해 돌리고 돌려도 “뿌걱 뿌걱 피꺽 피꺽” 소리만 나고 꽁무니에는 시커먼 연기만 날뿐 우당텅당 돌아가는 엔진 소리는 염원하고 안내양 누나는 한숨만 짖고 시꺼먼 조수는 버스 밑에서 나올줄 모르는데 기사 아저씨는 조수보고 “야 이세끼 어제 저녁에 뭐 했노” 하며 역경만 내는데 붉은 태양은 멀리 보이는 눂은 산을 넘어 가고 있었다.
시오리을 걷어서 한달만에 집에 오니 엄마의 반가움은 어디가고 정지간에서 나오는 모습에서는 온통 눈물이었으나 그래도 오래만에 보는 자식의 얼굴을 보고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알고보니 벌써 1주일째 아버지는 집에 오지을 않으니 할머니의 성화가 극성을 부리드니 이제는 며느리의 못남을 탓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도 도가 넘치는 아버지의 바람,이중 생활에 논을 수마지기 팔고 보니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든 것이였다.
이런 와중에 요지숙녀 중에 보수적인 우리 엄마는 아버지 원망도 단 한마디 못하고 할머니 성화에도 한소리 대꾸을 않고 매일 밀주을 만들어 할아버지 술 시중을 들다 밀주 단속반에 들켜 벌금을 하고 보니 할머니는 눈치도 없는냐고 단속에 들킨 한을 엄마에게 화풀이을 하고 보니 엄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어 다섯 동생들 때문에 정지간에서 남 모르게 울고만 있었든 것이라고 느낌을 받았을 뿐이며 그래도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한마디도 없이 지냈다.
우리 엄마는 그 때나 지금이나 ‘욱아’소리는 않고 ‘야야’라고만 하는데 집에 오는 길에 “해선장에 아버지 있는가 살펴 보고 오지”라고 하는 소리을 듣고 저녁도 먹지 않고 후레쉬도 없는 시절 가랑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길 십리길을 걷어 해선장터에 도착하여 이집 저집 누비고 또다시‘안동집’‘석술례’‘대성관’‘경주옥’을 찿아봐도 아버지 그림자는 간곳 없는데 도랑 건너 ‘대구집’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젓가락 장단 소리가 들리는데 지난번 아버지가 싸온 전축에서 듣은 노래 소리가 귀에 익어 듣어보니 낮익은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노래 소리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 설 때는 부엉새도 울어어 다오 나도 울었”하고 부르는 노래 소리가 하도 듣기가 좋아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가랑잎이 휘 날리는 산마루(당시는 바우고개) 턱을 언제 넘는냐”하는 노래 소리는 분명 아버지의 노래 소리 였다.
어려서라도 들리는 소리가 하도 애처롭고 가련하고 한이 싣은 노래 소리라서 “아버지 집에 갑시더”라고 말 한마디 못하고 다시 귀신이 넘나드는 바우고개을 넘어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고 다음날 부터는 아버지는 부산에 2년간 있었다는 소문만 듣었을 뿐 알수는 없고 벌써 40년이 넘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도 19년이 넘었는데 그 날 같이 가랑비만 내리는 날이면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아버님이 좋아하는 노래을 흥얼 거리게 되었으며 이제 세월의 뒤안길에서 나도 그 노래가 애창곡이 되었으며 어떤 장소 어디 노래방에 가드라도 처음곡은 반듯이 그 노래 아버님이 부르든 “비내리는 고모령”을 부르기에 나을 아는 친구들도 이제는 애창곡 1번으로 입력을 시켜 주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이 신청을 해도 나의 애창곡이라고 판단하여 마이크을 나에게 돌려 준다.
이제 님의 친구분 면전에서 님의 삶을 더듬어 보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업었든 한 순간들을 이해 하면서 멀리 계시므로 아쉬워 하며 당시의 노래을 불러보고 그리워 하렵니다.
세월의 뒷안길에서 아버님의 반사 이익으로 받은 ‘효자상’이 부끄럽게 생각되었으나 이제부터 바라보면서 그리워 하렵니다.
님은!!
고경초등학교 16회 해방후 2회
그 날과 같이 열여덟분이 모이고 만나는 날
이제는 팔순이 되셨고 되어 가지만
한국전쟁, 보리고개, 좋은세상도 격으면서
한생각 변지 않고 한 마음 변지 않으며
매년 정초에 만나니
그렇게 보기 좋고 즐겁기만 합니다.
살아셔도 이 자리에 계실 것이며
하늘나라에서도 오늘 만은 ‘태욱’아제랑
먼길을 달려 왔을 것입니다.
먼 나라로 가실 때에 여비라도 드려야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기에
드리지 못하는 마음을 모아
님의 친구,
동기생분 만나는자리에
기꺼이 소준 한잔을 대접 하여야
님을 만나는 듯 하고
그해 1년은 마음이 펀안 합니다.
열여덟 분의 굴고 굵은 주름살의 웃는 모습을 봄으로
잊었든 님의 얼굴을 세겨 봅니다.
그래도 아직 열 여덟분의 친구분이 계시기에
되세겨 볼수 있고
다하지 못한 자식의도리을 할수 있다는게
그래도 다행이고 덧없는 행복이라 느낍니다.
이제 생각을 하니
계시지 않음으로 더더욱 뵙고 싶고
아니 계시기에 친구분 그림자만 봐도
처다보고 싶은 님의 그리운 모습입니다.
한세상 살다가 운명으로 떠나셔도
아직까지는 덧없는 세월과 씨름을 하여
살았어도 될수 있는 정다운 모습은
친구분들만 보아도 떠오르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님이 떠난자리에 19년을
님들이 계시고 만나는 날이 오면
언제나 소주 한병들고 님을 대신하여
약주 한잔 올리고 큰 절 한번 하며
그 때 그노래을 불러 보았습니다
두 아이을 키워도 힘이 든다면
우리 님께서는 8남매을 낳으시고 키웠는데
저 보다 10배,100배 더 힘이 들었겠지만
그것도 모르는 이 자식은
님을 원망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모이는 만나는 자리가 오늘과 같이
계속 이어지길 학수 고대 하며
언제까지나 모이고 만나고 즐거운 자리가 되어
백년 해로 하시길 두손 모아 빌겠습니다.
내년까지
건강 하옵길 빌겠음니다.
2008. 12. 31. 밤
김 진 욱 배상
비네리는 고모령님들의 동기회(2회동기회)16회회~선배님...
지난 2009년 1월 4일 본교 최고령 선배님 들의 동기회가 한 동문의 후원으로 1992년 부터 36회 김진욱님이 지금까지 매년 식사대금을 지원하여 지금까지 선배님들을 도와온 훈훈한 미담을 전 동창회원에게 아름다운 사연을 전하고자 합니다
비내리느 고모령 "님들의 동기회 모임"으로 하고 모든 준비는 동문 진욱님이부담을 했는데 이는 일 이년이 아니고 계속 하였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김진욱 씨는 92년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친이 2회 졸업생)부모님의 동기이신 선배님들의 동기회에 아버님을 대신하여 매년 참가하여 회비 또는 잔치 형태로 부모님 모시듯 매년 한차례식 대접하여 왔다 이제는 몇번이나 더 할수있겠는냐고, 말끝을 흐리고 이 미담을 본회 까페 올리려고 하자 극구 반대 하는것을 카메라를 빌려 몰래 사진을 이렇게 이글과 함꼐 올립니다.
@김진욱님이 저희에게 한 말을 그대로 옮김니다 천수을 할수도 있었는데도 운명으로 자기 삶을 마무리 했기에 더욱 애닯구나!나는 두아이만 키워도 어렵고 힘겨운데 8남매을 키우신 아버님 마음 같이
그것이 부모 마음 아닌가!
내 아들 영호,영민이가 사랑스럽듯 당신 규덕이 아이들이 귀엽듯 우리들 아버지도 그렇게 우리들을 키웠다고 생각하여 아버지 동기님을 부모같이 생각하여 잔치을 하고 매년 동기회 모임에 참여을 했지
한번이 두번되고 하고 또하고 하다보니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네.
처음 참가 할때는 경제력이 좀 나아 시작하였지만 요~ 6 칠년은 그것도 마음 같지 아니하다네.
지금 살아계신다면 1년에 수백만원이상 용돈 들것 인데도 손이 오글려 풍족하지 못하여 마음이 아푸다~!또 차를 몰고 다녀야 하고 다방에 드나들며 차을 마시고 고스톱도 쳐야 하니까 자식된 도리로 하지 말라는 소리는 못 하는것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판단을 한것 같으니 애달푼 것이 형의 마음이네
그래도 목슴이고 생명인데....
아버지 삶과 바꾼 나의 행복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고 언젠가는 또다시 그날처럼 쥐구멍에도 햇볕이 들겠지.......그날에는 종일 이 노래만 불러야지 ....
<<비내리는 고모령>>....
2009. 1. 4.
동창회사무국장~신규덕,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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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고모령님은?
비 내리는 고모령의 '님들의 동기회 모임'에는 우리 고경초등학교 총 동창회의 초대 회장님 유병득씨가 계시고 2대 회장
님 박용수 전 고경면장장님을 비롯하여 80~90년대 고경면 행사시 마다 타향 객지에서 후원하여 주신 포항의 사업가
이윤로선배님들로써 90년대에는 많은 지원금으로 우리 모교의 여러 운동에 도움을 주신 분이다.
당시의 비예산 사업으로 현재의 모교 식당을 만들었을시 기꺼이 수백만원 들어 식탁과 의자을 기증하여 주신 유병득 선배님은 고경면 지역에 크고 적은 각종 행사시에도 아낌 없는 지원을 하셨으며 지역에 자금이 모자라면 대구의 한남건축 설계 사무소을 찿으라는 본인의 말씀과 같이 우리 고경지역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그러기에 총 동창회가 구성 할 당시 만장일치로 초대회장님으로 모셨으며 이후에도 물심양면으로 재정 지원을 하여 2대 박용수 회장님 임기을 마칠 때 까지 우리 고경초등학교의 실질적인 후원자 였읍니다.
당시 졸업생 중에는 현재의 임고면에 계시는 분들도 여럿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분인 이윤로 선배님은 포항에서 사업에 성공을 하여 모교의 여러 지원을 하였는데 1993년경 고경초등학교에 고적대(풍악놀이 기구)등을 지원 하여 당시의 후배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경북 교육위원회
풍악놀이 대회시 장려상 수상 성적을 거두는데 일조하신 분 입니다.
이러한 선배님들이 현재는 현직을 은퇴 하시고 일선에 물러나 여생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 후배들은 어려울 당시 모교의 사정, 지역의 어려움을 도움을 주셨기에 못잊어 하며,
지금도 만나 뵈오면 "니는 3대에 걸처 학교에 단니는 집안의 아들이니 최선을 다해"라는
격려을 하여 주시며 '돈을 벌어 어떻게 써야 되는지'을 알으켜 주신 분들 이다.
이제 연세가 들어 세상의 뒷안길에서 멀어져 가지만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그래도 현재와 같은 우리 모교가 존재하고 우리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저런 모임의 참여는 지극히 당연한 우리 후배들의 바램이 아닐까!!
또 고인이 되셨지만 우리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손병희 선생님도 이 모임에 참석 하시다 이제 못 오시는 자리에 계신다 .....
우리 후배들이 선배님을 뫼시는 자리가 이어지고 선배님이 오래 계실때 우리 모교의 발전은......
탕갓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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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글이네.
추억은 바로 눈앞에서 흔들리는 푸른 나뭇잎처럼
아직도 싱싱한 내음을 풍기는 있네.
특히 이윤로 선생님은 풍류에서
몇 번 술잔을 나누기도 했던
호인이시면, 대인의 풍모를 가지셨던 분이었네.
그대의 행동이 다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고 말일세.
건강 늘 조심하시게.
2008년말 위암 진단을 받고 8개항의 당뇨합병증으로 삼성병원에서 수술이 불가하다 하고
불안하기도 하면서 이제 이런 어른들을 다시 못 뵈올것 같은 심정에서 글을 올리면서 말은 않았지만
마지막라고 참석라고 인사을 하였지~~~
그 어른들이 지역에서 자식같이 돌봐 주었기에 당시와 같은 성장을 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가 자리을 지키지 못함으로 반비례하여 모이는 자리마다 칭찬을 받았네....
사실 그분들 자식 중에는 아무도 시골에 머물지 않았으며 일찍 차을 운전 람으로 영천에 오가며
모셔 드렸고 집까지 모시다 보니 "우리들 자식"라고 하였지.
이윤로, 유병득씨는 우리 지역 사랑이 대단하신 분이며~~
@탕갓방구
사실 그분들이 우리학교 정식 6년 과정의 졸업생이지.
그 전에는 소학교라 하여 3년으로 마치든지 아니면 임고학교에 갔어 6년 과정을 좋업 했지.
졸업생 중에는 육군대령이 2분이나 계셨고 5.16에 참여하지 않아 예편하신 분도 있고
어느분의 형님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시어 남로당 책임자오 입북한 사람도 있네.
당시는 18분 였으나 이제는 ~~~
방구님!지난 먼 방구님의 발좌치를 드러내는구려 사진속의
울 아버지를 보니 욱님의 정성을 솥아부은 자욱들이 아런거리는구려
욱님 울 아버지 이야기도 많이 한것 같고 어르신들을 보살핀
그욱님을 생각하니 나란 존재의 값어치가 보잘것 없이 느켜진다오
울 아버지 친구님들 살아생전에 한번도 음식 접대 를 못하고
울 아버지는 6개월 암투병 생활하다 저 하늘나라로 가셨다오
오늘따라 너무나 울 아버지가 그립네요 방구님께 고마웠다고 말을 전하고 싶네요
방구님 늘 건강지키며 우리 만날때 즐거운 모습으로 반겨주시길 고맙소
어버이 날을 맞으니 그분들이 생각나고 이제 올 봄부터 만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었지.
수십년 총무을 하신 동도의 김복조님이 가시고 친구의 어른이 떠나시며 다른 서너분이 않계시니
모임을 연락 할 사람도 없고 노쇠하시어 만남을 종료 하였다네.
2009년 초에 방구가 위암 수술하여 어렵다는 소식을 듣으신 님들이 2010년 행사에 갔어 인사을 드리니
거금 오십만원(500,000)을 주시며 치료비에 보태어 쓰라고 봉투을 주셨는데 눈물이 났지~~
그리고
우리보다 오래 오래 살아야 하시며 건강을 빌어 주셨기에 지금까지 머물고........
또 옥산어른은 "욱아 아프면 않된데~ 나중 큰아(제규)하고 우리같이 잘 지내야 된다"라고 ...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끄러운 글이었네.
이제 나이가 되고 힘든 많큼 님들이 생각나기에~~
아버지 많한 자식이 없다 했네.
방구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람피고 집 지키지 않는 아버지 보다 못함을 느낄 때는 ....
한평생 듣는 말이 "아부지는 닮지 마래" 였고 않 닮기을 노력 했는데
결국에는 목소리, 걷는 모습, 모든 행동이 닮았다고 하여 반항을 했는데
어느날 고모님을 뵈오니 "느그 아부지 인줄 알았다"라고 하드라~~~
두 자식도 힘들고 힘드는데 ~~~
그날밤 노래을 부르고는 부터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고
3년 후 어느날 동생 둘을 데리고~~~
"님들이 없어지고 사라지듯"
우리 또한 그길을 걷고 있고 가고 있으리.
귀찮고 힘든 일이라도 지나고 보면 아쉽고 그립듯
내일의 모임에 시간이 없고 바쁘드라도 많이 모이고 참석 하시더.
누가 내 행복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듯
참가하여 즐기면 행복이 아니오.
우리들도 언젠가 "비네리는 고모령"이 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