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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그런 경험을 했었습니다. 비행기가 뉴욕공항에 거의 도착할 때쯤 심하게 폭우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쳤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비행기 유리창에 얼음 알갱이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박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심하게 움직였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그 비행기를 탄 모든 승객들이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쌓여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렸습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뉴욕의 밤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승객 여러분들에게 곧 도착한 뉴욕의 아름다운 밤을 보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뉴욕공항까지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 방송을 듣고 저는 물론이고 모든 승객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무사히 비행기는 공항에 도착했고 그 공항을 나오는데 참으로 뉴욕의 밤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뉴욕의 아름다운 많은 불빛보다도 승객의 마음속에 안심을 준 그 기장의 말이야말로 더욱 더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또 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과 위기 앞에 지혜롭게 대처한 기장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특별히 큰 위기 앞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려운 문제의 해결은 그 문제를 해결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문제를 당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위기가 아니라 그 문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생각해 봅시다. 엘리야는 450명 바알의 선지자 앞에서의 문제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시면, 엘리야는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이 그의 생명을 찾는 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큰 위기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 앞에서는 담대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칼날 앞에서는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까지 도망을 가서 죽기를 원하는 자리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위기 앞에 섰을 때 큰 문제 앞에 섰을 때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냐? 불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냐?를 결정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지금 유다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이였던 산헤립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 당시에 20만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는 것은 이미 결정 난 일입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할 수밖에 없고 유다도 이제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랍사게를 통하여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36장 8절을 읽어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네게 말 2000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준비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말 2000필을 너에게 주어도 그 말을 탈 수 있는 군사 한 사람 없지 않느냐?
무슨 말씀이지요?
이스라엘 군사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소리입니다.
결국 이 말은 히스기야 왕의 아무런 능력 없음을 비난하고 조소하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36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져내겠느냐?"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까지 욕되게 합니다.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너의 신앙이야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헛된 것이다.' 그런 조롱과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위기를 당한 히스기야 왕은 어떤 열왕보다도 믿음으로 정치를 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혼신이 힘을 다했고, 우상을 제거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여호와 앞에 제사를 회복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정치를 하는 히스기야 왕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온 나라가 이방인의 손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 앞에 섰습니다.
20만 대군과 싸워서 이길 군사적인 힘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 이때 히스기야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본문의 말씀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때 그는 젊은이들을 모아서 군사의 힘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애굽으로 원병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그 옷을 찢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갔다고 오늘 본문 말씀 1절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베옷을 입고 옷을 찢고 여호와 전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재난을 당했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죄를 회개할 때에 하는 행위가 그런 행동이였습니다.
그리고 2절 말씀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 상황을 말하면서 민족의 운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다"
오늘이야말로 환난의 날이요 견책의 날이요 이방민족에게 조소와 멸시를 당하는 날이라는 상황을 이사야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3절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산모가 어린 생명을 이 세상에 탄생하기 위해서는 아마 가장 큰 힘이 있어야 그 생명을 이 세상에 탄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제 곧 아이를 탄생해야 되는데 해산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민족이 더 이상 한 걸음도 앞에 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기가 막힌 어려움과 고통의 자리에 있다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좀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산모가 어린 생명을 탄생할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그 힘이 없으면 산모도 생명을 잃게 되고 뱃속에 있는 아이도 생명을 잃게되는 그러한 상황으로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산헤립의 협박 편지를 펴 놓고 이 고백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이 기도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나는 아이를 해산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해산 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달라"는 이러한 부르짖음입니다.
그것을 바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이제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지 않았습니다만은 14절에서 20절 사이의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 그러한 내용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위기가 있다면 어떤 자세를 취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기가 막히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입니까?
신앙인에게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다고 말합니다. 무한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실제적인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외형적인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불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 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립니다.
"문제를 해결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 해 주십시오."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좋은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신앙이 있습니다.
더 좋은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에 나의 운명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다가 나의 능력을 완전히 의지하고 맡기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히스기야의 고통스러운 기도의 말씀 속에서 발견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계속해서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히스기야는 민족의 모든 운명을 자기의 모든 운명을 온전히 맡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어린 생명을 탄생시켜야 하는 데 그 해산할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이 민족의 운명을 다 맡기고 있는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히스기야의 자세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제자들에게 고치지 못했던 이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어떤 부탁을 합니까?
"할 수 있거든 이 아이를 고쳐주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믿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나의 모든 운명과 환경을 거기에 모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자입니다.
가룟 유다의 죄가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의 죄는 여러 가지로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마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가룟 유다는 그 능력 속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능력 속에 빠졌습니다. 결국 자기의 힘에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가 예수님을 배신했고,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드린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지요.
이사야서 40장 3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소년이라도 피곤해진다고 했습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진다. 소년과 장정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 자기의 능력에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힘, 자기의 능력에 의지하는 사람은 넘어지고 자빠진다는 거예요.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40장 29절에 보면,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그리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여 주신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이 전혀 없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는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여기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이 누구냐하면, 자기의 능력을 다 부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골에 살던 사람은 아마 그런 경험을 가끔 해 보았을 것입니다. 전기 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이 굉장히 무섭고 두렵습니다. 산허리를 끼고 있는 산길을 가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아버님, 어머님이 "얘야 그 산길을 갈 때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거라" 그 말을 듣고 가도 두렵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손을 잡고 그 길을 같이 가 주시면, 아버지가 아니면 어른이나 나이가 많은 형님과 같이 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로 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자기의 영적인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전혀 상관없이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시지요. 우리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 기가 막히는 어려움의 문제까지도, 정말 어찌해야 될 지 모르는 문제까지도 히스기야 왕처럼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될 때에 해산할 힘을 주시어서 어린 생명을 탄생케 하시는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에 나오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능력자입니다. 해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나의 운명을 맡길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고통의 문제가 있습니까?
교회 공동체에 문제가 있습니까?
이 민족 속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때 나의 어려움의 운명을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맡김으로 말미암아 해산할 힘을 공급받아 어린 생명을 탄생시키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처절한 기도, 하나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기는 히스기야 왕에게 하나님은 어떤 음성을 들려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다시 말씀 드리면, 어떤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6절에 보면, 이사야의 대답을 통하여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대답을 히스기야 왕에게 해 줍니다.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말한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본문의 말씀에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어려운 환경, 이 고난의 환경, 어찌해야 될 지 모르는 기가 막힌 어려운 환경 속에서 "두려워 말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설명을 드리면, 하나님의 능력에 나의 모든 운명을 맡기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실패가 있고, 어떤 위기가 있고, 어떤 결정적인 병마의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의 말씀에서 좀더 자세히 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물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를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4절에서 20절까지의 히스기야의 기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 히스기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20만 대군이 쳐들어와서 민족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 큰 위기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이 히스기야입니다.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사건을 영적인 눈을 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될 때에 우리 진정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왜 40년이라는 광야의 생활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어보면,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목자로서 살았다. 여러분들 그것은 기가 막힌 환경입니다. 궁중에서 40년 동안 살았던 사람이 광야로 가서 40년동안 거기서 미디안의 목자로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어려운 환경입니다. 위기의 환경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환경입니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40년입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아닙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사건이 아닙니까? 그런데 모세가 40년 동안의 미디안 광야의 생활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지 못합니다. 모세의 광야의 40년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 강 앞까지 인도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의 광야의 목자로서의 어려운 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의 구별된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그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이 모세를 지극히 사랑한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에게 왜 육체의 가시가 있어야 됩니까?
바울이 죄를 지었습니까?
바울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잘못했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몸에 결정적인 육체의 병이 있었습니다. 아마 설교하다가 쓰러진 일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어야 됩니까?
바울은 그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3번 금식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 음성을 듣고 바울은 순교할 때까지 그 육체의 가시를 짊어지고 갔습니다. 여러분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만큼 어려운 환경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결정적인 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가 있습니까?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기 때문에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주님이 쓰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야말로 구별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좋은 환경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건강함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성공하고 잘 되는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나타난 사건처럼 기가 막히는 어려움 역경, 어찌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 문제의 답이 나오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눈을 열어 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에서 18절 사이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실패의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병마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항상, 쉬지 말고, 언제나, 범사에, 모든 일에 이 말씀은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의 환경 속에 하나님의 구별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시간에 개인이나 교회나 이 민족이나 국가나 역사나 모든 환경에서 주어지는 일들 속에 하나님의 구별되고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 맥락에 나타난 결과는 어떻게 되어졌습니까?
이제 이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마지막 부분에 가면, 20만 대군 중에 18만 5천을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서 직접 다 죽이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건과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서 18만 5천의 앗수르의 군사를 하룻밤에 다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도망을 간 산헤립은 자기의 신인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하다가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아들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무엇을 볼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가 해산할 힘이 없었는데 해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승리의 기쁨의 어린 생명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을 이곳에서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폭풍우를 헤치고 항해한 인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안다고 말 할 수 없다. 폭풍우를 헤치고 향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인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닥친 모든 환경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선하신 뜻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내 모든 것을 맡김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기쁨을 체험하고 오늘과 내일의 믿음올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은혜목회정보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