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鏡虛) 1849(헌종 15) ~ 1912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하고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이자 서예가이다. 법명은 성우(惺牛), 법호는 경허(鏡虛), 성은 송씨(宋氏)이다. 속명은 동욱(東旭)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부친은 송두옥(宋斗玉)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여 계허(桂虛)에게 계를 받았다. 1862년 마을의 선비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삼경과 기초적인 불교경론(佛敎經論)을 익혔다.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 뿐아니라 『논어』, 『맹자』, 『시경』, 『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1년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으며, 문하에서 공부하는 학인은 항상 70, 80명을 넘었다. 1879년에 옛 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마침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어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앉아 밤새도록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인식했던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가 문자 속에 얽매어 있었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지를 놓아 졸음과 싸우며 '나귀의 일이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가지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 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0년 천장암에서 설법하면서 자신이 법통을 이어받은 전등연원(傳燈淵源)을밝혔다. 이때 "용암(龍巖)의 법통을 이었으며, 청허(淸虛)의 11대손이요, 환성(喚惺)의 7대손"이라고 하였다. 1884년 천장암에서 만공(滿空) · 혜월(慧月) · 수월(水月) 등의 삼대제자를 지도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지팡이 등을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이때부터 충청남도 일대의 개심사(開心寺)와 부석사(浮石寺)를 왕래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교화활동을 하면서크게 선풍을 떨쳤다. 1894년에는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임금의 뜻에 따른 인경불사(印經佛事)와 신설하는수선사(修禪社) 등의 불사에 법주(法主)가 되어 「해인사 수선사 방함인(海印寺修禪社蒡啣印)」과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수선사 창건기」를 집필하였다.
금릉군 청암사(靑巖寺)에서 방한암(方漢巖)을 만나서 설법하여 한암을 대오(大悟)하게 하였으며, 1900년에는 지리산 천은사(天隱寺)에서 여름을 지낸 뒤 화엄사(華嚴寺)로 옮겼으며, 1902년에는 범어사 금강암(金剛庵)과 마하사(摩訶寺) 나한상(羅漢像)의 개분불사(改粉佛事)에 증사(證師)가 되었다. 1904년에는 오대산 · 금강산 등을 두루 돌아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의 개금불사(改金佛事)에 증사로 참여하였다.
그 해 천장암에서 다시 만공을 만나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 · 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다음과 같이 임종게(臨終偈)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마음달이 외로워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이 게송의 끝에다 일원상을 그리고 붓을 던지고 나서 오른쪽으로 누워 천화(遷化)하였다. 세수 67세이며, 법랍 58년이었다.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로, 승려들이 선(禪)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다.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근대 선의 물결을 다시 일어나게 하고 진작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 수월(水月) · 만공(滿空) 선사가 있다. 세 제자를 향하여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글씨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행초서는 노장(露藏)의 합도(合度)가 잘 어우러져 자가풍을 이루었으며, 청정무구(淸淨無垢)의 선기(禪氣)를 대하는 것 같은 일품(逸品)이다. 주로 가는 필획을 많이 구사하였으나 간혹 굵은 획과 글자의 크고 작은 조화를 극대화하였다. 결구와 장법, 필획의 자유자재한 구사에서 나름대로 한 경지를 이루었다. 이러한 서풍과 품격은 제자 만공(滿空) 등에게 전승되었다. 저서로는 『경허집鏡虛集』 · 『선문촬요禪門撮要』가 있다.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만공(滿空)1871 ~ 1946
근 · 현대기의 승려이자 서예가이다. 법호는 만공(滿空), 법명은 월면(月面)이다.만공 월면은 1871년(고종 8년)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본관은 여산으로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에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 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다. 그 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다. 그 뒤 경허를 따라 서산 부석사(浮石寺)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鷄鳴庵)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깨달은 것을 더욱 갈고닦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다. 그 뒤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짓고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니 나이 75세, 법랍(法臘) 62세였다.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 · 견성암(見性庵) ·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당시의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각도 지사가 동석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의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일본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27년에 지은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의 끝에 자신을 '임제32대 사문만공(臨濟三十二代沙門滿空)'이라 하여 그의 지도방법이 임제종풍을 계승한 것임을 밝혔다.
제자로는 비구 보월(寶月) · 용음(龍吟) · 고봉(古峰) · 서경(西耕) · 혜암(惠庵) · 전강(田岡) · 금오(金烏) · 춘성(春城) 등과 비구니 법희(法喜) · 만성(萬性) · 일엽(一葉) 등이 있다.
게송을 적은 필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내금강마하연(內金剛摩訶衍)>의 해행(楷行)에서는 가는 필획을 구사하였는데 강철 같은 강인함이 엿보이며, 결구에서 관서와 조밀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비범한 경지를 발휘하였다. 경허선사의 유풍이 엿보인다. <백초시불(百草是佛)>과 <세계일화(世界一花)>의 대자(大字)에서 대소(大小)와 조세(粗細), 소밀(疎密)을 마음껏 발휘한 자가풍의 면모를 보이며, 특히 <심우송(尋牛頌)>에서는 안진경(顔眞卿) 필법을 활용한 변체로 썼는데 그 품격이 속됨이 전혀 없는 선필(禪筆)이다.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첫댓글 좋은 미담입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생존해계시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유능한 승려 한분도 계십니다.
군산 성흥사 주지스님 송월당(족보명,송창섭)스님입니다. 이분도 지신공파 27세손입니다.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찾아뵙고 인사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