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4-7,하나님의 의를 상속받은 자
오늘 말씀은 믿음의 선진들을 예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 이전의 선진들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아벨의 제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홍수 심판을 예비하고 방주를 지은 두 번째 시조 노아,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 하십니다.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으니 이 부분은 창4장으로 가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농부여서 그 땅에서 나는 열매로 일부를 드렸습니다. 얼마를 드렸는지, 어떻게 드렸는지 언급은 없습니다.
또한 아벨도 양의 첫 새끼를 기름과 함께 드렸다고 하십니다. ‘기름’의 히‘헬레브’인데 ‘살찐’‘가장 맛있는 부분’이란 의미가 있어 하나님께 가장 기뻐하실 것을 염두에 두고 최상의 것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나름대로 각자의 것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 답이 본절에서 답하시길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제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양의 첫 새끼 중 좋은 것을 골라 최상의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손에 잡힌 곡식을 믿음도 정성도 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요한은 요일3:12절에서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1)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1)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그렇다면 악한 자가 누구일까요? 우리를 죄짓게 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게 하는 마귀에게 속하여 형식적으로 정성 없이 드리는 예배, 하나님은 그 사람과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정성을 들이고 최상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인의 제사처럼 우리도 헛 예배가 될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번역되지 않은 단어 ‘디 헤스’를 번역하여 다시 살펴보면 ‘더 나은 제사로 말미암아 그는 의로운 자라 증거를 얻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받으셨음을 ‘에마르튀레데’에서 찾아보면 이 단어는 신적인 수동태로 쓰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에 불을 내리심으로 그 예물을 받으셨음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마23:35절 ‘예수님을 통하여 의인이라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 예배를 통하여 의인이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4절에서 ‘저가...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 즉 ‘믿음을 통하여 그가 아직도 말하고 있다’ ‘말’은 ‘레고’인데 본문에서는 ‘랄레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벨은 죽었어도 그 믿음의 의는 죽지 않고 있음과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는 있어도 그들이 가진 믿음의 효력은 어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10장에서 ‘예수님은 육과 영혼을 지옥불에 넣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랄레이’는 성경 기록으로 인해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에녹은 죽음의 문을 통하지 않고 하늘로 산채로 옮기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룰을 파기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신데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신데(약1:17)에녹이 죽음을 건너 뛰어 하늘로 올리워 간 것은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라고(히9:27)절에 말씀하셨고 창3:19절에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며 롬6: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에녹이 땅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갔을까? 하늘에 속한 형체와 땅에 속한 형체가 다르다고 하셨는데(고전15:40)그런데 전혀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15: 51절에는 휴거시 살아 있는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 하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옮기실 때 그는 변화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모델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성도들은 휴거되어 주님을 맞을 것입니다. 그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그 뒤를 따라 공중에서 주를 맞을 것입니다. (살전4:13-17)이때 성도들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다시보이지 아니하니라, 다시 번역을 하면 ‘그는 계속해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을 본 사람이 없었고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후에는 사람들이 계속 찾았는데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엘리야 승천때에도 그의 제자들이 엘리야 시신을 찾아 다니던 것과 같을 것입니다.(왕하2:11-18) ‘다시 보이지’‘에휘리스케토’는 ‘발견하다’‘찾다’의 의미가 있는 휴리스코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인데 이는 과거의 진행 중에 있던 동작을 나타냅니다. 미완료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갑자기 보이던 사람이 안보이면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것입니다. 훗날에 주님 오셔서 맞이할때에 휴거 된자와 남은자간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에녹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할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고 주님과 의논했으며 주님편에 섰고 주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아니고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어떤 것도 없음을 말씀합니다. ‘기쁘시게’‘유아레스테사이’의 원형‘유아레스테오’는 ‘기쁘게 하다’‘만족시키다’라는 의미이며 ‘못하나니’의 형용사 ‘아뒤나톤’의 원형 ‘아뒤나토스’의 의미는 ‘선천적으로, 내재적으로 능력이 부족하여 무기력하고 불가능한 것’ 예를 들면 앉은뱅이가 혼자 걷거나 뛰는 일은 기대할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 자체가 무기력하고 턱없이 모자라는 상태라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반드시는 필연성이나 강제를 의미합니다.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계신 것과’‘에스틴 호티’는 영어의 be동상에 해당하는 ‘에이미’의 현재 시제이므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지속적임을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되 지속적이다, 존재하시되 언제나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톨스토이는 하나님 없는 삶은 짐승의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짐승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인간 다움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경외심이 무엇일가요? 하나님의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것을 잠언에는 지혜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의 의인이라 하는 욥은 생일 잔치를 하고 난 다음에는 혹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을까 하고 아들 딸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다고(욥1:5)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하나님을 믿고 찾아오면 반드시 보답을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이는 되지 않는 한 부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상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11장에서 소개되는 우리의 선진들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합니다.
찾는 자들에게란 ‘계속해서 찾는 이들에게’라는 의미입니다. 이단어의 히브리어는 ‘따라쉬’동사로서 ‘주의하여 찾다’‘혹은 구하다’‘문의하다’‘요구하다’라는 의미로 말씀을 통해서 주의해서 찾고 또 성령님께 구하고 그렇게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상주시는 이’ 이는 보상자로 ‘미스다포도테스’‘보상자’‘임금을 지불하는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외칩니다. ‘보라 그에게 상급이 있고’(사40:10)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에게 지극히 큰 상급인라’(창15:1) 하나님 자신이 최상의 상급이라 하셨습니다.
7절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노아입니다. 노아는 보지 못한 일에 경고하심을 받고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노아가 물 심판의 경고를 받았을 때 언제 어떤 징조인지 모르는 가운데 그는 순종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세 종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마24장을 비롯해서 곳곳에 종말에 대한 낌새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낌새도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말합니다. ‘경외함으로’‘율라베데이스’의 원형‘율라베오마이’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두려워 하다’‘존경하다’의 히‘야레’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다’ '하나님을 신뢰하다'를 의미하는 '하싸'의 역어로 쓰인 것으로 볼 때 ‘소망’과 ‘신뢰’를 함께 지닌 ‘경건’이라는 의미라고 볼수 있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실까요?
노아가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또한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에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방주를 짓는 데에 자신 생각이나 방법을 쓰지 않고 시키시는 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자기집 식구들을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벧전3:20절에서 말씀합니다. 물에서 구원받은 수가 여덟이라고 그의 자녀들도 방주를 짓는 동안에 불평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림으로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으나 비가 올 때까지 비방하고 불순종하던 자들은 다 물속에 장사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당시에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노아 때 환경과 다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믿음을 좇는 ‘카타 피스틴’‘믿음을 따라서’‘믿음에 대응하여’‘믿음을 기초로 하여’의미입니다. 노아는 믿음에 기초하여 의인이라 인정을 받은 최초의 사람입니다. 또한 노아는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보입니다. 창6:9절에 보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완전한 자’‘이쉬 타밈’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겔14:14,20절에서 하나님은 노아 욥, 다니엘을 대표적인 의인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의를 상속받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유일한 길은 믿음뿐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상급으로 받는 길이 믿음이며 이 상급을 받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아벨처럼 올바른 예배,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리고 노아처럼 의심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신앙생활은 자아를 죽이고 교만을 꺽어야 하며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는 삶,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주께서 인정하시는 자들에게는 주의 손길과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임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