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3~9절)
-----------------------------------------------------------------------------------------------------------------
10월에는 올 한해를 마무리 하는 마음으로,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중에 무엇을 회복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나의 건강, 가정의 재정 상태, 자녀들의 학업과 진로 문제, 나의 영적인 상태 등 모든 면에서 회복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을 들으시라고 예고해 드렸습니다. 그렇게 잘 준비하시면서 말씀의 자리에 나아오고 계시는 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예기치 않은 회복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회복에 대한 마지막주 설교이며, 우리에게 약속하신 너무나도 고귀한 영생의 소망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말씀이 선포 될 것입니다. 잘 들으시고 성령이 주시는 감동과 회복과 충만으로 함께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주시는 본문 3, 4절을 읽어 드립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아멘.
오늘 보게 될 본문 위에는 “산 소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본문 3절 마지막에 산 소망이 나옵니다. 산 소망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된 출발은 하나님의 자비하심(불쌍히, 긍휼히 여겨 주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자비하심일까요? 죄와 사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그 피조물인 사람들이 전부 죄 가운데 죽어가고,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영원한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지극히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하심과 자비하심이 없었다면 산 소망은 만들어 질 수도 없었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산 소망을 주시려고 나와 내 인생을 불쌍히 여겨 주셨다는 그 사실, 그 시작지점을 우리는 분명하게 깨닫고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크던지 급기야 아들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시기까지 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여도 자신의 자식을 내어주는 것 까지 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에 순종할 수 있는 것 역시 예수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엄청난 희생과 부활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선물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산 소망”입니다. 산 소망은 구원자 예수님 자체이시며, 이제 우리는 산 소망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살아가기만 하면 죄로 인해 심판 받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망이기에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산 소망”이라고 하였고, 베드로 사도 역시 구원 받음에 감사하며 산 소망이 있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의 찬양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은 단연코 “산 소망”입니다. 우리가 지켜가야 할 가장 중요한 선물은 말할 것도 없이 “산 소망”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가족과 산 소망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산 소망”을 택해야 합니다.
가지고 싶은 것 다가지고 먹고 싶은 것 다 준다해도, 5천년 쯤 살 수 있는 어떤 명약을 준다해도,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살게 해 준다고 해도, “산 소망”과 그것들을 바꾸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 “산 소망”이 지금 현재 어떤 상태로 보존 되어 있는지 4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 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산 소망)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산 소망)은 여러분의 몫으로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 유산(산소망)은 여러분의 몫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고백하고, 성령으로 믿고, 성령으로 동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는자들, 아는 자들, 따라가는 자들이 “산 소망”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 자격있는 자들만이 “산 소망”을 일생 일대의 유업으로 간직하고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4절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이 유산(산 소망)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 소망”을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 지켜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집 안 깊숙한 곳에 1억원쯤 하는 골드바를 넣어 두었고, 그 옆에 “산 소망”이라고 A4용지에 글씨로 크게 써 놓았다고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장소를 보는 순간 골드바와 종이 중 무엇에 눈길이 먼저 가겠습니까? 도둑에게서 그 둘중에 무엇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하겠습니까? 집에 불이난 다급한 상황에 성경책과 골드바 중 무엇을 빨리 꺼내려고 할까요?
만약 누군가 골드바를 훔쳐 갔는데도, 전혀 요동 하는 마음이 없이 “산 소망”이라는 글씨를 붙잡고서, 그래 나에게는 골드바가 문제가 아니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산 소망의 약속이 있잖아 라고 말하면서 일상의 평안으로 나아가실 수 있으실까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겁니다.
보이는 것을 지키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믿는 다는 것, 부활 한다는 것, 영생 한다는 것, 산 소망이 우리의 몫으로 하늘에 보존 되어 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장 존귀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러한 현실적인 사실들과 산 소망을 지켜감에 있어서 사람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강력한 보호하심의 말씀을 들려 주었습니다. 5~7절을 읽어 드립니다.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아멘.
5절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각자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보호 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언제까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날, 심판의 그 날인 말세까지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되나요?
5절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예수님(믿음의 주인)으로 바꾸어 보면, 앞에는 “말세에 나타날 예비하신 구원” 이라는 말이 있고,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이름 아래에 가로를 치고 우리의 이름을 넣어 보세요. 이것이 구원의 도식이 됩니다.
예수님 이름 아래에 내 이름이 가로에 넣어진 것처럼, 항상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함께 움직여야 됩니다. 그래야만 내 이름 앞에는 말세에 예비하신(각자의 이름 000의) 구원이, 나와 함께 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보호 받으며 말세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죠.
예수님과 한 몸, 한 팀이 되지 않고 나 홀로 움직인다면 예비된 구원이 아니라, 헛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마누엘(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우리에게 오셨고, 항상 동행하려는 생각으로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산 소망을 지켜가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이며, 그 믿음은 우리가 지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지켜가시도록 예수님만 붙잡고 따라갈 때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보호받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시고, 반드시 말세에 예비하신 우리의 구원을 향해 끝까지 동행하시고 완주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 받는 예비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6절에서, “여러가지 시험”과 “잠깐의 근심”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시험이나 근심은 너무나도 많이, 시시때때로 우리의 삶을 뒤 흔듭니다.
지난 한 주만 뒤돌아 보아도 무수히 많은 시험(유혹)과 근심(건강, 외로움, 과중한 일, 사람들과 부딪힘...)들이 많으셨을 겁니다. 이렇게 피해 갈 수 없는 근심과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일어나고 잇으며 도저히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시험과 근심, 실패와 절망은 분노와 패배를 불러 옵니다. 하지만 임마누엘 되시는 믿음의 주인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보호 받으면서 마주하는 시험과 고난은 거뜬하게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7절에서 나옵니다.
7절을 보세요. 7절도 앞서 말씀드린 5절과 너무나도 구조가 동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한 가운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고, 그 앞에는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너희(우리) 믿음의 확실함”이 있고, 뒤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쇠뭉치가 처음부터 단단한 것이 아니라 불로 연단해야 강도가 단단해 지는 겁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있었을 때 블레셋과의 전투 장면을 보면, 칼이나 창을 가진 자가 사울과 요나단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당시는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였고, 블레셋 사람들만이 철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짓는 도구들인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에 요청을 해야 했습니다. 아마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작업을 맡겼습니다.
이런 실정이니 왕과 왕자 이외는 철제 무기를 가질 형편이 안 되었고, 반면에 블레셋은 철제 무기와 철 병거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애초에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는 크나큰 전력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연단 시키셔서 철제로 만든 칼이나 창이나 병거가 하닌 하나님만을 굳게 믿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공격 때문에 항상 시험이나 근심을 지니고 살았지만 금보다 더 귀하게 연단 받은 믿음으로 무장한다면 아무런 걱정없이 다 물리칠 수 있었던 겁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시험이나 근심이 당연히 있게 되는데, 그 시험과 근심을 이기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을 불로 연단해서 금보다 더 귀하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언제까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 믿음으로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얻는 그 날까지 연단해 가신다는 겁니다.
여기서도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아래에 괄호를 하고 우리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 이름앞에 놓여있는 어떤 시험이나 근심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연단하여 이겨내게 하실 것이고, 결국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받게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치 무임승차 하듯이 그저 예수님에게 단단히 붙어있기만 하면, 마지막 시험과 근심까지도 거뜬이 이겨내고 끝내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말세에 이르도록 구원을 이루게 될 것이고,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연단 받으며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날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구원에 있어서는 기승전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만이 해답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겠습니다. 내가 정말 말세에 이르도록 예비된 내 구원을 이루어 가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고 있는지 자문자답 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불(순종, 충성, 겸손, 온유, 사랑..)로 연단 받으며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으로 성장해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때까지 이기는 자로 잘 살아내고 있는지 자문 자답 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 모두의 연약한 믿음을 평가하거나 책망하라는 자문자답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지금부터라도 다시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만 단단히 붙잡고 정말 말세에 이르도록, 정말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날때까지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각오와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내 마음을 움직이는 각오와 결단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올려 드리고, 하나님의 능력아래 보호받기를 간절히 요청해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자녀가 간절하게 부르짖고 도와 달라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매정하게 대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진심의 마음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 믿음의 회복, 예수님과 동행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교회나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임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듣고 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결단이 성령의 강권적은 인도하심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역사하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산 소망과 예비하신 구원과 불로 연단한 믿음을 이야기 한 후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가장 큰 회복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8~9절을 읽어 드립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아멘.
여기서 우리가 회복해야할 가장 큰 주제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9절 말씀, 그토록 지켜가고 보호 받아야 할 믿음, 그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 과제는 당연히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는 방법은 오직 산소망 되신 예수님을 붙잡고 동행하며,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보호 받으며, 불로 연단 받으며, 인생 다하는 그 날 까지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릅니까? 다 압니다. 그것을 목표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 뿐이라는 사실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오직 예수님과 항상하는 믿음이며, 시험과 근심을 이겨내도록 불로 연단 받은 믿음이라는 것도 다 압니다. 문제는 실행의 문제, 실천의 문제, 순종의 문제입니다.
안다는 것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 알고 계시죠? 그럼 제가 성경 한 구절을 읽어 드립니다.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4:4,6) 아멘.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이고, 안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전혀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따르지 않고, 자기 주장,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 말만 계속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자기 의가 충만한 사람이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일 뿐입니다.
지난 번 요한 복음에서 진리(곧 예수님)를 안다는 것은, 그(말씀, 믿음)의 안에 거하는 자요, 그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요,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자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 기억 나실 겁니다.
이런 것을 실제로 행하여야지만 진짜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완벽하게 해 내라는 것이 아니라, 할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진리(믿음, 말씀)이신 예수님을 알아야 우리 인생의 최대 과제인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을 터인데, 문제는 8절에서처럼 그토록 알고 싶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듣고 싶은 예수님의 음성을 드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8절에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예수님이 안 보이고, 음성이 안 들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8절 중반부에 그 해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① 보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② 보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만이 주인이며, 구원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③ 보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께 영광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④ 보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하는 행동들이 진심이 되고 최선이 되는 삶을 하루 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 한다면 우리는 산 소망되시는 예수님을 굳게 붙잡을 수 있고,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루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정말 이러한 삶을 살아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부터 회복하셔야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셔서 진심으로 사랑의 고백을 드리면 그 시점부터 믿음의 회복이 일어나며 다시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원히 함께하는 믿음의 여정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정리해 드립니다. 말씀 중에 네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1. 나에게는 “산 소망”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기억되면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산 소망”의 은혜를 주셨음을 기억하고,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겨 주심에 항상 겸손함으로 영광을 올려 합니다.
2. 나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보호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기억되면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예비 하신 나의 구원이 말세에 이르도록 반드시 지켜지기 위해서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안에 보호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3. 나에게는 불로 연단아여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기억되면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근심과 시험을 이기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그 날까지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며 믿음을 지켜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4.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하여 보지 못하지만 진리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영광 돌리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셔야 합니다.
10월에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회복하고 소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회복이 필요하며,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오직 예수님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많이 기도학시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하시고, 예수님과 항상 함께 동행하며, 말세에 이르기까지,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각자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온전한 회복과 소망이 충만하게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산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동행하도록 은혜를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을 굳게 붙잡고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진심을 다하여 순종으로 살아가는 인도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