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록 [소설 심문모전]
제3부 함안댁(제50회)
6. 중근이 찾다(2)
(처음부터 읽지 못한 분을 위한 재수록입니다.)
동네를 빠져나오느라고 무도장 뒷길인 듯싶은 방향으로 걸었다.
반듯한 골목길이다. 자동차가 조심스럽게 서로 마주 빠져 나갈 만한 폭의 길이었다.
시청사 바로 뒷길이 되는 그 골목길을 끼고 왼쪽에 공터가 있었다.
꽤 넓었다. 집이나 건물을 헐어버린 자리 같지 않은데 반반한 마당이 있었구나 싶었다.
무도장 뒤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공터는 뭘 하던 곳이지?
이쪽 동네 쪽을 그동안 전혀 다녀보지 못했다는 것도 스스로에게 기이했다.
그리고 그 조용한 골목은 바로 네거리가 되었는데 오른쪽이 무도장이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무도장 앞으로 가보았다.
큰길.
갇혀 있다가 터져 나오듯 굉음이 확 달려든다.
군용 차량들이 좌우 양쪽 방향이서 다투듯 내달아 가고 오는 소음이다.
질주가 따로 없다. 시내에서 그것도 넓지 않은 도로. 거기에는 아무런 안전 표시나 운전자를 위한 표시선 따위가 일체 없다. 그냥 자동차가 알아서 우측통행을 지키면서 서로 마주 달리고 있는 것이다.
도로는 콘크리트로 포장 되었지만 먼지가 이는 것은 비포장도로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바닥이 깨어진 곳이 더러 있어서 자동차는 덜컹거렸고, 보행자들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무도장은 말 들은 대로 외견상 야전병원이었다. 역시 외국군인을 위한 병원이었다. 영문으로 간판을 붙이고 있었다.
몇 대의 군용 앰뷸런스가 마당 안으로 들여다보였다. 정문에는 한국인 헌병과 미군 엠피가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다. 보준에게서, 겉으로 보기에는 병원이지만 실제는 팔군 정보기관의 한 부서가 있다고 들었던 곳이어서 그런지 몰랐다. 하기는 병원으로 쓰면서 정보기관이 그 어디엔가 한쪽에 묻혀 있는 것이겠지.
그에게는 너무 익숙했던 그곳, 순식간에 온갖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장소가 아닌가? 그런데도 건물은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건만, 그 가까이 근접을 허락하지 않는 거부의 느낌으로 낯설었다.
그 앞을 마치 피하듯 지나서 시청 앞으로 갔다.
거기 마당에는 피란민들이 열을 지어 가득 차 있었다.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었다. 아이를 업고 안고 손에 잡고 온 아주머니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 사이를 헤집고 뛰어다니면서 놀기도 하고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칭얼대거나 우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아이를 어머니가 손바닥으로 등때기를 때려주어 크게 울려 놓기도 했다.
벌써 네 시 가까이 되어서 날은 한없이 맑았지만 햇살은 한껏 얇아지고 찬바람은 더 신들린 듯이 불어대고 있었다.
특히 시청은 네거리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비록 판자 담장을 두르기는 했지만 바람이 방향도 없이 사방에서 시청 건물을 향해 교대로 불어오는 듯했다.
본관 정문 앞에는 아마 시청 공무원인 듯한 사람이 메가폰을 잡고 뭐라고 고함소리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뒷전에서 구경하는 문모로서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추운 날에 떨면서 그 마당에 쪼그리고 앉거나 발을 동동거리며 서 있거나 간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대부분 가지고 있는 옷가지를 둘 데도 없어서인지 있는 대로 다 껴입고 있는 듯했다.
가만히 보니 그들은 동회에 가서 피란민 임시 기류증명을 해가지고 와서 소위 구호미 배급표를 받으러 온 모양이었다. 안남미라고 하는 걀쭉하게 생긴 낯선 모양의 쌀.
재작년까지 현준이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신문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문 이름은 달구일보로 바뀌어 있었다.
신문사의 인쇄 공장 쪽 널따란 출입구에는 신문팔이 아이들이 와글거리면서 자기 순서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렸다가 신문을 사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막 석간이 발간된 모양이었다. 그 아이들은 앞의 순서 번호를 받기 위해서 점심 때부터 미리 와서 줄서서 기다려야 했다.
보통 가판은 가정배달 신문보다 두 시간 정도 미리 발행되었다.
순간순간의 소식이 갈급해지는 전쟁 중인데다가 피란민으로 인하여 시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으므로, 신문 독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대구 시민의 인구는 전쟁 전에 비해서 거의 서너 배로 폭증해 있었다. 그런데다가 신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무리 집도 절도 없이 한데서 묵새기는 신세라고 해도 신문을 사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밥을 굶어도 신문은 보아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안정된 거처가 있는 토착 시민이 아닌 피란민들은 거처가 일정하지 못해서 정기 배달 신문보다 거의 대부분 가판 신문을 사서 읽었으므로 신문팔이들이 많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독자 수는 중앙지에 비해서 대구 지방지가 압도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구 지방이 전황의 속보에서는 중앙보다 앞설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고, 급박해지고만 있는 전황은 대구에서 발표되고 있으므로 임시정부가 환도하고 신문사들도 부산 피란지에서 서울로 본사가 옮겨가 있었다. 그러나 전황 뉴스에 관한한 중앙지보다 대구 지방지의 권위와 신뢰가 앞서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셋 중 한 아이들은 구두닦이 그리고 양담배팔이, 신문팔이로써 가사를 위한 벌이에 나서고 있었다. 신문팔이는 구두 닦는 일이나 담배와 껌을 파는 일과는 달리 두어 시간 한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어서 다른 일하다가 과외로 짬내어 할 수도 있었고, 다른 일과 겸할 수 있었다. 즉, 구두닦으면서 신문도 팔고, 담배 매대를 메고 신문도 팔 수 있었던 것이다.
바깥 게시판에 붙여놓은 신문의 지면은 전쟁 전과 비교가 안 되리 만큼 시원하고 깨끗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달구일보는 신문사 위치로서도 다른 신문에 비해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시청이 옆에 있고, 도청과 육군본부의 중간에 위치해서 어느 쪽도 다른 신문사에 비해서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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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주말[토&일]마다 2회분씩 이틀간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