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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8:31-19:10 요절/ 누가복음 19:10 | 2022. 10. 16 | |
누가복음 제 32 강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아버지께로 부터 잃어버린 자들 이였습니다. 이로 인해 고아와 같이 방황하며 불안과 염려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는데 생명을 걸고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동안 여러 번 예루살렘으로 가셨지만 이번은 이전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가십니다. 무엇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이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31b-33)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이루지게 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빌라도와 군인들에게 넘겨져 희롱과 능욕을 당하십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살아나십니다. 예수님은 이전보다 더욱 상세하게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를 들은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34절은 말합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음으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누가복음에 적혀 있는 것만 해도 여섯 번째입니다. 왜 이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원하는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하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메시야 관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은 하였지만 그들의 생각과 목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여전히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말씀이 감취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예수님이 당하실 일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준비시키십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성경을 풀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당장 이해 못하는 자신과 양들을 볼 때 우리는 낙심이 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갖고 인내해야 합니다. 때에 맞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계속하여 말씀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친히 깨닫게 하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였습니다. 한 맹인이 길 가에서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렸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하였지만 이 맹인은 다윗의 자손이라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의 칭호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메시아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맹인은 앞을 못 보는 자입니다. 자기 자신도 볼 수 없고 무엇 하나 볼 수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을 정확히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구원과 관련이 있을뿐더러 우리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얼마나 자신이 미천하고 부족한 죄인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긍휼의 자세가 있을 때 사람들의 시선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게 됩니다. 포기치 않고 끝까지 간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맹인에게 시끄럽고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하라며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크게 소리 질러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9) 그의 간절한 외침을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발걸음을 멈추시고 예수님은 그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40). 그리고 그가 오매 그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맹인은 그의 인생문제인 눈을 뜨는 것,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습니다.(41)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맹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자 맹인은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를 보고 백성들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43) 참된 제자는 예수님을 정확히 알고 믿고 긍휼을 구하는 자입니다. 무엇보다 따르는 자입니다. 제자들은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목적과 유익만을 위해 따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눈뜬 맹인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맹인은 긍휼의 마음을 덧입고 예수님을 정확히 알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지난여름 청년학생들은 DMT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의지하여 가을학기 도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믿음이 생겼고 캠퍼스 축제 때 가을학기 동아리 홍보에 도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감당할 일꾼들이 부족하였습니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기사 일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김스마일목동과 강찬솔형제님이 자원하여 공강 시간에 나와 홍보를 하였습니다. 김한결형제가 한림성심대에서 강대까지 나와서 지원을 해 주었고 정페이스목자는 반차를 내어 홍보에 참여하였습니다. 박은혜자매는 몇 일간 풀타임으로 홍보에 동역해 주었습니다. 사도목자님들도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학생들을 만나 말씀을 나눠줄 수 있었고 그 가운데 소원 있는 양들의 명단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김성진형제와 이충무공형제가 바로 그때 만난 이들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도전하게 되고 간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이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 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한 구원자 이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긍휼을 구해야 겠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 간구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 받아야 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알지 못해 영적인 맹인이 되어 어둠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여리고 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1). 그곳에는 삭개오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는데, 세리장입니다(2). ‘세리의 장’은 세무 직원을 총괄하는 책임자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로마 정부 밑에서 일하고, 정해진 세금보다 더 거뒀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리의 장’이니 ‘죄인의 장’으로 취급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입니다.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구원받기 불가능한 사람입니다(18:24). 그는 죄인이면서 부자이니 구원받기 어려운 조건을 두 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무엇을 합니까?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었습니다. 포기치 않고 그는 앞으로 나아가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그의 소원은 간절하였습니다(3,4). 5절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삭개오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 이름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신 데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를 외적인 것으로 판단치 않으시고 존재로 바라보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뜻은 ‘순결한’, ‘의로운’입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세상에서 순결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삭개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삭개오’보다는 ‘죄인’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를 삭개오라 부르심으로 그의 존재를 회복하십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니 그는 죄인에서 순결하고 의로운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 후에 무엇을 하십니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서 보내고자 하십니다. 사람들은 죄인인 그와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변화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했지만, 예수님은 대면으로 만나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그냥 보려고만 했는데, 예수님은 그와 적극적으로 사귐을 가지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죄인도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초청에 서둘러 내려왔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6).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과 삭개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립니다(7). 왜냐하면 그들은 의로운 사람은 죄인과는 교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밥을 먹어도 안 되고, 잠을 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고정관념,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무엇을 말했습니까? 8절은 말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서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의 돈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고자 합니다. 구약은 전체 액수에 그 액수의 1/5을 더하여 배상하도록 했습니다(레 5:16). 삭개오는 율법의 요구보다 훨씬 더 많게 보상하려고 합니다. 이는 돈을 위해 민족을 버리고 양심도 버리고 율법도 버린 그에게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 삭개오를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과의 만남 자체가 사람의 가치관을 바꾼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님께 회개나 믿음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아무 조건 없이 만나주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그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주님께서 그 부자를 받아주셨습니다. 그의 가치관과 삶이 바뀌어서 예수님이 만나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바뀐 겁니다. 만남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가치관이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9절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는 자에게 오늘 바로 구원이 임합니다. 그런 자가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변화의 모습을 보시고 이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여 주십니다. 10절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과 특권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린 자는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분명한 인생목적과 존재의미와 사명이 있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래 모든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한테서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치 어린이 동산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고아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오셨습니다. 죄인이 먼저 예수님을 찾지 않고, 예수님이 먼저 죄인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만나면, 그분을 믿으면 잃어버린 사람에서 찾은 사람으로 그 신분이 바뀝니다. 즉 죄인에서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으로 바꾸는 사역을 어떻게 이어가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가신 후에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셔서 그 사역을 이어가십니다. 그 사역을 기록한 내용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의 사역은 교회로 이어집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서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는 사역을 이루십니다. 그 점에서 교회는 죄인을 기다리기보다는 찾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죄인이 교회를 찾기 전에 교회가 먼저 죄인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이 모이는 곳만이 아닌, 찾기 위해서 흩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 존재의 목적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강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세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았고 반응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물에 빠진 그를 향해 꾸짖었습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위험한 강물에 들어갔느냐? 두 번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손을 쭉 펴서 젓고 발을 열심히 움직여서 물에서 나와라.’ 수영 방법을 알려줄테니 혼자 열심히 해서 알아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자기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을 구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을 예수님, 또는 교회로 비유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서 살리는 데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몇 해 전 다함께 교회에서 동해 바다로 물놀이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백사장 안내방송에서 이따금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방송이 나옵니다. 저는 그 안내방송을 들으며 도대체 어떤 정신없는 부모가 아이를 잃어 버리냐며 속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방송에서 “춘천에 사는 황안나 황안나 어린이가 부모를 잃어버리고 방송실에 있으니 방송을 들은 부모님은 속히 방송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라는 멘트가 나왔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방송실에 뛰어 들어가 안나를 찾았습니다. 그 정신없는 그 부모가 바로 저였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물놀이에 정신이 빠져 있었습니다. 부모를 잊어버려 불안과 염려로 가슴조려 하고 있던 안나를 안고 나올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잠깐 잃어버림으로 인해 고통 받았을 자녀를 생각할 때도 마음이 아픔니다. 하물며 하나님 품을 떠나 죄로인해 오랫동안 고통하는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 긍휼의 마음으로 예수님이 이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이자를 통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데 쓰시고자 하심입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캠퍼스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찾아야 함을 알고는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주님은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며 참 목자의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이땅가운데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자가 예수님과 같은 심정과 마음으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겠습니다. 그리고 이자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데 드는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감당함을 통해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소망 없던 우리에게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나를 통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교회로 삼아주신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내 주변에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야 겠습니다. 먼저 다가가야 겠습니다. 그들의 감겨진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목자의 삶을 힘써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