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이야기
홍윤숙
이제 우체국에 가서
원고를 부치는 노고도 필요 없어졌지만
전화나 팩스 같은 문명의 이기로
대개는 볼일을 보고 말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옛날처럼
편지나 시를 쓰면
그것들을 들고 골목을 지나 큰길을 건너
나들이 가듯이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 아가씨도 옛날처럼 상냥한 소녀는 아니어서
낯선 얼굴의 무표정한 눈총이 서먹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숨결이 그리워서
필요도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으며
풀칠을 하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다
냇물 속에 떨어지는 잔돌 같은 작은 음향
그 소리 들으면서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에 가슴 젖는다
날마다 무언가 변하여 가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는
그 작은 감동이 나를 위로한다
오늘도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차들이 질주하는 큰길을 건너서
옛날의 내 어머니 새 옷 갈아입고 나들이 가듯이
우체국에 간다
아, 거기 기다리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의
따스한 숨결
☆★☆★☆★☆★☆★☆★☆★☆★☆★☆★☆★☆★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홍윤숙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바람 소리 귀 세워
두어 번 우편함을 들여다보고
텅 빈 병원의 복도를 돌아가듯
잠잠히 내 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누군가
나날이 지구를 떡잎으로 말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방화를 지르고
하얗게 삭는 해의 뼈들을
공지마다 가득히 실어다 버리건만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나뭇잎 한 장도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내가
이 가을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정오의 태양을 작별하고
조용히 下午를 기다리는 일이다
정중히 겨울의 예방을 맞이하는 일이다
☆★☆★☆★☆★☆★☆★☆★☆★☆★☆★☆★☆★
이별 1
홍윤숙
가야 한다고
가서 젊음의 황야를 갈아야 한다고
미명의 문을 따고 너는 떠났다
분홍빛 발톱 채 굳지도 않은
등에 한 자루 무거운 열망을 지고
지구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그날 출발은 지체없이 뜀박질로 오고
이별은 한 순간에 눈썹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십년 아시아의 대도시 수도 서울엔
팔월 삼복에도 눈이 내렸다
충견처럼 기다리는 그 지붕 밑 다락방엔
열리지 않는 녹슨 빗장 하나
스물 다섯 해 잠자던 네 따뜻한 창가에선
수국빛 추억 만발하고
스치면 구석구석 종소리 울리는
기억의 계단에선
먼 일기장의 까만 낙서들이
춤추는 인형처럼 튀어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쥐똥나무 그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작은 발자욱들, 작은 목소리들,
때없이 내리는 빗발이 되고
때없이 울리는 악기가 된다
이별
홍윤숙
그 날 떠날 때
내 가슴 반은 무너지고
남은 가슴 반에 그대를 묻었으니
나는 그대의 집이노라
살아서는 멀리 헤어져 서로 떠돌고
한구석 문고리 잠겼던 마음
죽어서 남김없이 다 풀어놓았으니
무시로 빈 가슴 문 열고 들어와 편히 쉬어라
그 산골짜기 외진 길 및 굽이 돌아가면
그대 먼저 가서 터 닦아 세운 집
우리 생애 마지막 집 한 채 거기 있으니
내 희망 또한 거기 가 쉬리라
무너진 가슴 반은 이미 그 곳에 가 있으니
☆★☆★☆★☆★☆★☆★☆★☆★☆★☆★☆★☆★
인생
홍윤숙
인생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험한 산, 깊은 계곡 우거진 숲을 지나는 법
별 하나 사랑하고 기다리고 끝내 이별하는 지혜를
다리를 놓아야 마을에 이르고
비를 맞아야 무지개를 보는 것도 알았습니다.
가는 목 휘청거리며 땅으로 낮게 낮게 질경이로 펴져서
밟히고 다져지는 법도 배우고
무거운 마음의 진흙더미 털어 내고
모습 없이 가벼운 바람이 부는
무소유의 자유도 일러 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전해줄 마지막 말은
어두운 밤길 등불 없이 산을 넘어
어느 날, 예고 없이 세상 끝에 닿는 일
그 마지막 가르침을 듣기 위해 나는
날마다 하늘로 귀 열어놓고
끄슬린 창들을 닦습니다.
세상에 매운 연기 아직도 자욱해
닦으면 끄슬리고 끄슬리면 다시 닦고
오직 그 한 가지 일에 온 날을 지샙니다.
슬프지도 않은 눈물 가끔 옷깃을 적시며
☆★☆★☆★☆★☆★☆★☆★☆★☆★☆★☆★☆★
장식론
홍윤숙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 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 가는 때문이다
<씻어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보면
쇼윈도우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는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낙엽처럼 슬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
知命의 겨울 3
홍윤숙
어디서나 지천이던 장미 한 묶음
한 시대 아름다운 동반으로 손을 잡다가
오늘은 내가 한 사발의 피를 쏟고
혼절해버렸다
한 묶음의 장미엔 한 묶음의 가시가
꽃보다 푸르게 눈뜨고 있었다
그렇게 꿈은
깨기 위해 꽃 속에 잠복하고
꽃은 죽기 위해 날마다 벼랑에 피고
피어서 스스로 파괴해가는
쓸쓸한 장례식이 매일 거행되었다
☆★☆★☆★☆★☆★☆★☆★☆★☆★☆★☆★☆★
행복
홍윤숙
한 잔의 차와
더불어 인생을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친구
한 송이 꽃과
기다리는 먼 곳의
그리운 엽서 한 장
창 밖에 그 해의 첫눈 내리는 날
예고 없이 반가운 사람 찾아와 주는
그 작은 행복을 그리건만
인생은 언제나
그 중 하나밖엔 허락하지 않는다
꽃이 피고 계절이 바뀌어도
소식 오지 않고
언제나
혼자 마시는 차
혼자 바라보는 꽃
혼자 젖어서 돌아가는 눈길
☆★☆★☆★☆★☆★☆★☆★☆★☆★☆★☆★☆★
환별
홍윤숙
총대도 탄환도 없이 오르는 장도에
주먹과 가슴팍과 그리고 불타는 젊음만이
하나의 무기라고 웃음 짓던 너 ∼
낙엽도 목숨처럼 쌓이고
목숨도 낙엽처럼 쌓이는
높은 산마루엔
청춘이 한 묶음 꽃처럼 뿌려지리.
너 가거든
옳은 것이 그리워 너 가거든
부디 사랑과 같은 것은
조그마한 이름으로 둘러 두어라.
백설이 휘날리고 얼음이 깔리련다
밤마다 하늘은 포성에 무너지고
아! 나는
얼어붙은 창 밑에 손끝을 녹이며
너 돌아오는 날
개선의 새벽까지 살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