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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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을 가치있게 보내려 한다. 그 가치가 무엇인가? 가치는 경제적 가격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 쉽게 말해 시장에서 인기가 있으면 가격은 올라간다. 사람도 만인의 인기에 의하여 그 가격이 결정된다. 가격이 비싼 사람은
그만큼 가치도 많아 보인다. 현대의 정치와 문화가 모두 상업화되어 가는 마당에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하여 모두 총력을 기울인다. 가치가 꼭
가격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가치는 슬픔의 상처를 안고 밀려난다. 역사에 이런 슬픈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격과
가치가 불일치한 경우다. 좌우간 가치나 가격은 세상사가 다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기에 생긴다. 이 말은 사회생활에서 상대방의
인정과 승인을 얻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소유욕을 말한다. 소유욕은 단적으로 인간사이에 먹으려는 욕망이 원초적이라는 것과 통한다. 불교에서는 이
먹고 싶은 욕망을 사식론(四食論)이라 부른다. 음식을 쓸어 요리해서 맛있게 먹고싶은 단식(段食), 남녀간에 피부로 접촉해서 먹고싶은
촉식(觸食), 상호간 의사소통에서 상대방을 설득 동화시키고 싶은 의사식(意思食), 자기의 지식으로 대상을 정복해서 자기 것 으로 삼고 싶은
식식(識食) 등을 사식이라 한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잘 통찰한 바와 같이, 사회생활에서 타자로부터 인정과 승인을 얻고 싶은 욕망은 불교적으로
보면 다 타자를 먹고 싶은 소유욕과 같다. 음식 먹기도 문화여서 타자들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맛있고 우아하게 먹으려 하고, 성욕도 사회적인 승인을
통해 배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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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으로 인간의 사회생활은 먹고 먹히며 서로 인정받고 승인받기 위한 투쟁과 갈등의 연속이다.
가격과 가치가 그런 상호주관적인 욕망관계에서
생긴다.
그런데 가치는 가격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격은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도태되면 그것으로 수명이 끝이지만, 가치는
인간의 마음이 개입된
복잡한 욕망의 주장이다.
가격경쟁에서 실패했지만, 마음이 겨냥한 가치가 무의미하게 사라졌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상호
주관적 욕망이다.
비록 시장에서 탈락되었으나, 언젠가 나의 가치를 인정승인할 날이 올 것이라고 앙앙불락 기대한다.
그것이 신념일 수 있고, 나쁘게 보면 고집일 수
있다.
인류사의 가치론을 볼 때 한때 가격에서 탈락되었으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엄청난 경쟁력을 새롭게 지니게 된
가치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가격과 가치가 불가분이지만 꼭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그 가치가 무엇인가? ‘내가 가치있게 살고 싶다.’ 할 때의 그 가치가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정치적, 도덕적, 예술적, 학술적 생각을 사회적으로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앞의 사식(四食)
가운데 의사식(意思識)이나 식식(識食)이 주로 여기에 해당하겠다.
가치는 상호주관적 사회생활에서 소유론적 욕망과 직결된다. 사회생활이 없다면 가치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가치는 ‘내가 생각하는
것(cogito)’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의사식이나 식식에서 타인을 설득시키고 지식
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논리를 정리하고 이념을 창출한다.
이것이 시장에서의 광고처럼 이념에서의 선전이다.
이념의 선전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cogitamus)’으로 만들기 위한
소유욕의 책략이다.
특히 소유욕의 책략에서 정치적 가치가 예술적 가치보다 훨씬 강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가치는 세속적 지배를 원하는 종교적
가치처럼 지배의지를 진리의지와 동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구조주의 철학자 라캉이 그의 저서인 ‘기록’에서 한
말이다.
“내가 존재하는 곳에 나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뜻 무슨 말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상호주관적 사회생활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기 위함이지, 내가 존재하는 사실을 언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고, 생각이 일어나서 분별하는 경우는
모두 소유를 위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일어나는
경우는 모두 호오와 시비와 선악을 내가 취사선택한 한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가치는 나의 생각의 산물이고, 이것은 또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의사식과 식식의 경우에만 ‘나는 생각한다.’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단식과 촉식의 경우에도 내가 먹는 음식이나 나의 몸매가 만인이
부러워하는 선망의 표적이 되게끔 만인을 홀리려
한다.
라캉의 생각처럼 사회생활에서 모든 것이 소유와 피소유의 관계로 환원된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사회생활이 그래왔었기 때문이다.
라캉은 프로이트 계통의 학자인데, 결국 성욕이 인류사회의 가장 원초적 언어활동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겠다.
성욕과 소유는 같은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무의식중에 가치있는 인생을 향유하기를 기원해 왔다.
가치없는 인생은
타자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가치는 결국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만인에 의하여
평가받고 싶은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가치는 나의
기호를 만인의 기호로 변경시키려는 확장욕에 불과하다.
이 확장욕은 우리가 앞 글에서 여러 번 지적한 본능의 소유욕에 해당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어떤 충격을 받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가치는 무조건 좋은 것으로 알았는데, 여기서 가치가 결국 무의식적 본능의 소유욕을 의식의 명분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가치는 각자의 심층적 소유욕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이념과 각별하게 연관된
것일수록 더 사회지향적 선전이
심하다. 그런 가치는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그것이 우리의 가치가
되도록 각색한다. 대개의 역사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세계사를 통하여 널리 확산되어 왔었다.
그래서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초기 실존주의에서
후기 사회혁명주의로 기운 철학자 사르트르와의
역사논쟁에서 사르트르적인 공산주의 지향의 역사의식을 비판하면서, 역사는 늘 어떤 이념적 경향성을
잠복시킨
내용적 편파성과 외연적 부분성을 띠고 있으므로 역사를 과학으로 인정하기를 그의 저서인 ‘야생적 사유’에서
거부했다.
그는 이념적 가치의
편향성에 의한 사실왜곡이 거의 없는 인류학과 민족학을 역사에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 말은 많은 경우에 정치적 사회적 이념의 가치는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을 언명함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세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세가지의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그것이 가장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선택했다는 한계고,
다른 하나는 자기선택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한다는
한계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가치의 선동
선전에 미쳐서 모든 가치가 필연적으로 반가치를 품고 있는 측면을 전혀 도외시한다는 한계다.
그러면 모든
가치는 다 문제적인가? 세상을 소유하고 지배하겠다는 경향성이 희소한 순수 종교적, 예술 미학적
가치가 가장 사실성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지?
그러면 무엇이 진짜로 사실인가? 객관적으로 증명가능한 것만을 사실성으로 인정하는 실증주의적 시각이 옳은가?
실증주의는 사실성을 밝히는 데
너무 좁고 미흡하다.
10여년 전 뒷길 교통신호대도 없는 네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내가 냈는지 당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에 그 사고의
원인은 길
건너 앞차가 ‘깜빡이’를 켜지 않고 차의 진로를 알려주지 않아서 내가 거기에 신경이 빼앗겼기에 다른
차와 접촉하는 사고가 생겼다.
이것은 나의
심증이지 물증이 없다.
이처럼 실증주의는 사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너무 좁다.
소유론적 무의식을 지닌 가치가 다 편파적이고 부분적인 사실의 왜곡에
기인한다면, 지공(至公)한 사실의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앞으로 21세기적 모든 학문의 의미는 가치론보다 사실론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모든
가치는 결국 자아중심적 소산이다.
자아가 어떤 색깔로 물들어 있어서 그 색깔로만 세상을 바라보므로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는 자는 두가지 부류겠다.
하나는 이념적 가치를 위하여 일부러 사실을 거짓말로 속이는 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어떤
특정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모르고 그 색깔로 세상을 늘 보는
자이다.
무의식의 소유욕이 그런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전자는
진짜로 언급할 만한 거리도 못되는 정신적 사이비다.
그러나 후자는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무의식의 업장에 갇힌 자이고, 20세기 프랑스의 현상학적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용어로는 잠재적인 ‘암묵적 전(前)의식’의 집단무의식에 갇혀 사는 자이다.
다 같은 생각을 개진한 것이겠다. 업이나 집단적
무의식에 걸리면, 그 업과 무의식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은 생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의식이 모른다.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미래의 교육에서 가치관 형성에 열을 올리지 말고, 인간이 자아를 가진 한에서 얼마나 편견과 아집의 노예가
되기 쉬우며, 가치의
이름으로 세상을 헛보게 만드는가를 인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가치가 반가치를 필연적으로 띤다는 것, 가치는 자기 기호의 선택이므로 전체를
보는 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아를 무아로 점진적으로 바꾸는 교육이 실제로 자아의 가치관교육보다 더 미래의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말해주어야겠다.
역사와 세상과 자연의 전체 사실을 여여하게 보는 눈을 키우는 공부가 미래의 철학교육이리라.
미래의 철학은 어떤 특정가치를 세상에
뒤집어 씌워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아의 탐욕이 없는 마음에
비쳐지는, 존재하는 필연성을 아는 데 있겠다. 신경병도 과거 억눌렸던
상처를 알아차리는 데서 치유된다.
가치의 주입이 아니라 무명(無明)의 알아차림이 더 중요하다. 눈 뜬 장님들이 세상의 사실을 왜곡한다.
긍정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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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긍정적 사고를 권력과 돈에 아부하는 사고처럼 생각하는 무의식적
관습에 젖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지식인은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하는데, 긍정적 사고는 지식인의 비판적 사고와 한 자리에 동거할 수 없는 현실
맹종적 사고로 여기기 다반사다. 그런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까닭은 우리의 역사적 업이 그렇게 형성되어 왔던 것 으로 보인다. 과거부터
나라가 백성을 제대로 두루두루 아껴 보살핀 적이 거의 없이 경제적· 안보적 위기에서 버림받았다는 기억이 그런 무의식적 업을 낳게 하였던 것 같다.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악착같이 무슨 수를 강구하려는 우리의 행태도 나라정치와 지도층의 인격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집단무의식과 깊은 연고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긍정적 사고는 아첨하는 사고와
다르다 . |
긍정적 사고는 모든 창조적 사고와 사기진작의 원동력이다. 쉽게 말하면 긍정적 사고는 자기의 운명 팔자를 수용
하는 사고다. 예컨대 자기의
타고난 운명팔자가 나쁘다고 부모나 타인을 탓하고 비난한다고 자기의 운명이 개선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일생을 불운 속에서 헤매다가 임종을 맞을
뿐이다.
나쁜 운명의 여건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사람은 그 운명을 사실로서 수용하고 거기서부터 인생의 설계를 세워
운명의 장애를 극복한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은 다르다.
수용성과 수동성의 미묘한 차이를 철학적으로 잘 해명한 이가 20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가톨릭 실존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이다.
그는 수용성을 수동성과는 달리 자기 내부정리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준비가 된 열린 마음의
자세에
비유했다.
열린 마음은 불운에 임해 마음이 내성적으로 안으로만 접히지 않고, 불운의 사실을 새로운 가능성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불운이 자기의 마음을 접히게 하느냐, 아니면 새롭게 열게 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의 활용에 달렸다.
열린 마음은 불운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불운에서 ‘너는 좋아지리라.’라고 자기의 마음에 희망의 빛을 예견
한다. 그런 예견은 불운을 기회로 활용하는 마음의
자세와 직결된다. 받아들임은 이미 주어진 제약의 굴레를 자유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적극적 사고를 도입하는 자세이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말한 운명애(運命愛=amor fati)가 초인적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여긴 것은 창조가
자신의 어려웠던 처지를
오히려 지혜로 되돌리는 마음의 활용과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유신론자 마르셀이나 무신론자 니체가 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진술한 것이겠다.
이처럼 창조적 사고는 긍정적 사고에서 잉태된다. 불운한 운명의 시련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한 시공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운명과
연관될 때에, 그 시공의 정신문화적 주제로서 등록된다.
대체로 정신문화의 필요성은 공동운명의 시련이 생기하였을 때에 일어난다.
그 공동운명의
시련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난과 질병에 의한 고통이나 전쟁에 의한 죽음이나, 소외나 무상감
이나 억압의 부자유나 박탈의 절망감과 같은 것이
실존적으로 비슷하게 느껴지는 경우, 또는 기존의 사상이나
지식으로 새 미래를 헤쳐나갈 자신이 없는 무지의 자각현상이 강렬한 경우에 생긴다.
고통의 느낌이나 무지의 자각은 전혀 다른 두 개의 문제가 아니고, 동일한 문제의 두 측면이다.
왜냐하면 공동운명으로서의 고통의 느낌은 우리
문화가 과거에 스스로 지은 말과 생각과 행동의 습관이 현재완료
진행형으로 쌓여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는 자승자박의 굴레를 말하고,
무지의 자각은 그
현재완료진행형 상태에 있는 습기(習氣)의 구속을 풀 수 있는 해방의 새 지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마음이 욕망이라고 늘 말해왔다. 이번에는 그 마음이 습관이라고 말한다.
욕망과 습관은 같은 뜻을 달리 표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기호가 반복되면 습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정신문화는 사회생활을 하는 마음의 욕망이 어떤 습기를 이룩한 결과다.
정신문화는
공동운명이고, 이것은 또 공동습기를 뜻한다.
공동습기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정신문화의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긍정적 사고를 말하면서 왜 고통과 무지를 말하나?
바로 이 고통과 무지가 우리의 것이기에
그것을 공동운명으로서 감수하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운명애는 우리 것이니까 무조건 좋다는 감정적 편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감정적 편애는
자기 자식이므로
무조건 감싸는 지각 없는 부모의 편애와 다르지 않다. 운명애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가 된 우리의 업장(業障)을
사실로서 인정함이다. 공동사실로서의 공동업장을 수용하면서 그 업장의
방해가 동시에 지혜의 원동력으로 변용될 수 없겠는가 하고 깊이
사유한다.
12세기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의 시작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땅으로 넘어진 자는 그
땅을 밟고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다.’는 구절이 운명애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공동운명의 업장이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였다면, 우리가 일어서기 위한 지혜가 다른 곳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재완료진행형으로
흘러오고 있는 바로 그 공동운명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긍정적 사고의 의미다.
그런 긍정적 사고에서 우리를 고통과 무지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창조적 사고가 움튼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봐도 자기를 저주하고 학대하는 이에게 우리는 그의 운명팔자가 개선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공동운명의 역사를 분노에 차서 누구의 탓으로만 돌리는 일도 현명한 지혜의 눈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것을 무조건 최상의 것으로
치켜세우는 자존망대의 국수주의적 행각도 우스꽝스럽다.
뱀의 독 속에 그 독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약이 있다고 한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이중적이다. 이것이 사실의
존재론적 법칙이다. 공동운명의 업장 속에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해독제가 있다는 것이 긍정적 사고의 의미다.
나는 16세기 율곡의 성리학에서 이통기국(理通氣局=理가 비록 보편적이나 특수적인 氣의 상황을 떠나서 실존하는
것이 아님)이란 철학적 언표를
아주 좋아한다.
저 언표 속에서 율곡은 주자학의 보편적 이치라도 조선의 역사적·사회적·자연적 상황을 떠나서 추상적으로 실존할
수 없다는 창조적
사고의 원리를 제창했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주자학의 조선화를 겨냥한 사유가 거기에 배어있
다고 생각된다.
주희도 이 이치를 깨치지 못한 데가
있다고 율곡은 그의 친구 성혼에게 호젓이 고백했다.
나는 율곡의 저 언표가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사상과 매우 닮았다고 여긴다.
이 세상의 어떤 진리도 구체적 살(肉)을 떠난 추상적 본질이 성립하지 않으며, 구체적 날짜와 장소를 여읜 무시공
(無時空)의 철학적 사유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메를로-퐁티가 ‘의미와 무의미’에서 남긴 말이다.
그런데 율곡이 저 유명한 ‘이통기국’의 언표를 남기고 그에 알맞은
형이상학과 심성론의 원리를 말하고 정책의 면
에서 그 시대의 아픔을 혁파할 수 있는 정책방도를 개진했으나, 불행히도 공동운명의 질곡을 희망으로
치환시키는
길을 언명하지 않았다.
우리가 고통과 무지에서 구체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탐색하기 위하여, 율곡의 저 명제가 한 번도 진지하게
심층적으로 자기화되는 길을 가져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해 보지 못한 이유도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운명의
업보가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거의 예외없이 우리 고통과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학문을 창조하지 못한 채 다만 서양의 인문사회과학은
서양의 이론을 소화하지 않고
소개하고, 동양학 내지 한국학은 옛 고전의 생각을 역시 소개하는 정도로 마감해온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이 땅의 인문사회과학은 우리의 풍토병과
아픔을 치유하려는 진단처방보다 ‘…에 관한 연구’로서 ‘호모 스펙탄스’
(homo spectans=관람자)나 ‘호모 인트로두첸스’(homo
introducens=소개자)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지? 그래서 대학의 학문과 현실이 따로따로 헛도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나는 자기 것으로 숙성된 학문에 의해 세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가 어떻게 아류의 신세를 면할 수 있는지
모른다. 율곡이 말한
‘이통기국’은 결국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같겠다. 실사구시는 긍정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아껴야 한다. 진선진미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현실의 구체적 인간들은 다 잡석(雜石)이다.
앞 글에서 왕양명의 말을
인용했다.
예컨대 거리의 사람들이 5%, 20%, 75%의 금을 지닌 잡석과 같은 성인이라는 것이다. 순금의 금괴는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존재일
뿐, 자연적으로는 실존하지 않는다. 옥석혼효(玉石混淆)라 하지 않던가? 모든 인간은 다 자기의
장기를 타고났다. 이것이 자연의 존재양식이
아닌가? 각자의 특장(特長)을 잘 살려서 신바람나게 공동운명을 좋게
바꿔놓게끔 힘을 실어주어야지, 보석을 보지 않고 잡석만 자꾸 캐내려 하면
누가 그 인민재판 앞에서 버틸 수 있겠
는가? 우리는 역설적으로 옛 중국의 전국시대 제나라 정승인 맹상군의 삼천식객(三千食客)과
계명구도(鷄鳴狗盜)를
예사롭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계명구도하는 식객이 맹상군을 위기에서 구출해 냈다.
사법재판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만인이 만인에게 사법재판 하듯이 옥석을 가린다고 따진다면,
옥석이 다 타버리는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손실을 우리가 아니고 누가 입을 것인가? 서로 나쁜 점을 헐뜯는 사회
보다 서로 좋은 점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회가 더 좋은
양질의 사회생활을 일구고, 우리를 더 행복스럽게 만들리라.
비밀의 열쇠가 우리 안에 있듯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동운명 안에 깃들어 있다.
지식과 마음의 활용
지식욕 버려야 지혜가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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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과학은 지식을 탐구하지만, 철학은 지혜를
일군다.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 차이일 것이다. 한국의 철학교육은 과학이 쳐다보지도 않는 어설픈 지식의 개진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철학은 지혜를 일구지만, 기존의 지혜가 어느 정도 진실하고 신뢰할 만한가를 분석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무엇일까? 지식은 나에게 결핍된 것을
후천적 학습으로 습득해서 얻는 일종의 소유이지만, 지혜는 이미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다. 지식은 인간의 취약한 본능을 대신한
지능의 작품이다. 동물의 본능처럼 자가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발전할 본능의 능력이 미비하기에 인간은 본능을 대신하는 지능을 요청한다. 지능은
자기에게 필요한 생존의 기술을 밖에서 구한다. 이것이 지식의 인위적 탐색인 과학의 시작이다. 그 탐색은 본능의 선천적 능력과 달라서 거듭거듭
반복된 추리와 검증의 단계를 거쳐서 완성된다. 과학적 지식은 축적해 나가야 한다. 지식은 다양하나 기본적으로 인간이 세상을 지배해서 편리하게
살기 위한 도구로서 넓은 의미의 기술이다. 그래서 지식은 소유론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을 편리하게 살기 위하여 취득해야 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
지혜는 인간이 이미 자기 속에 깃들어 있는 능력을 현시하기만 하면 된다.
지혜는 취득되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의 필연성을 읽는 눈이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도 사려가 깊으면 지혜인이 될
수 있다. 그는 지식이 결코 좌지우지할 수 없는 세상의 필연성을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지혜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엮고 있는 필연성의 이해와 직결된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지혜의 능력을 계발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 능력이 무상(無償)으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지혜의 길로 들어가야 한다. 지혜계발의 길은 지식추구의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간다고 노자는
피력했다.
왜냐하면 지혜는 지식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마음을 버릴수록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도덕경’(48장)에 ‘학문을 하면 지식이 날로
늘어나지만, 도(道)를 닦으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날로 줄어든다.’고
하였다.
중국 송대의 노자 주석가인 이가모(李嘉謀)는 ‘학문을 하면 지식을
추구하므로 날로 그것이 늘고, 도를 닦으면
망상을 제거하므로 날로 줄어든다.’고 노자의 말을 주해했다.
왜 그럴까? 본능을 대신하는 지능이
발달할수록 지식은 증대하고, 그만큼 지식에 의하여 세상을 더 편리하게 장악
하려는 소유욕은 더욱 강렬해진다. 모든 소유욕의 가장 깊은 안쪽에 다
이기심과 자의식이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지능이 비록 본능을 대신하였으나, 본능이 지닌 충동적인 이기적 자아생존의 욕망이 지능의 우회적인
전략을 통하여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생존전략의 기술로서 지능의 인위적 능력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지혜는 본능과 달리 본성의 능력에 축을
박고 있다. 본능이
이기배타적인 소유론적 욕망을 나타낸다면, 본성은 자리이타적인 존재론적 욕망을 띤다.
욕망의 개념은 마음이 자기 아닌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성향을 말한다.
존재론적 욕망의 의미는 이기적 소유욕을 위하여 타인과 세상을 희생시키는 탐욕이 아니고, 타자와 세상이 존재
하는
그대로 편안하게 존재하게끔 도와주는 원력(願力)을 말한다. 이것이 본능과 본성의 차이점이다.
인간은 본능상 자기중심적이면서, 동시에 본성상
타인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위로해 주고 싶은 그런 상반된
성향을 묘하게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상반된 본능과 본성이 서로 가는 방향에서
다르지만 공통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 공통점은 둘 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자연적이고 자발적 욕망의 기호(嗜好)를 선천적으로 띠고
있다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 본능과 본성의 구별이 없고, 오직 본능 하나에로 동물성이 귀착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 묘하게도 그 둘이
엇비슷하나 다르다. 이런 관계를 구조주의에서 상관적 차이(pertinent
difference)라 부른다. ‘좌/우’, ‘장/단’, ‘선/악’
처럼 서로 다르나 일방이 있기에 타방이 성립하는 상관성을 일컫는다.
본능과 본성은 차이 속에서 함께 동거하는 상관적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본능과 본성의 상관적 차이는 ‘이기심/자리심’, ‘배타심/이타심’, ‘소유론적 욕망(탐욕)/존재론적 욕망(원력)’의 이중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인공적 지능이 자연적 본능을 대신함으로써 동물적 본능의 제한적이고 닫혀진 생존필요성의
추구가 무한히 가변적으로 열려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능은 생존유지의 직접적 차원을 넘어서 소유의
영역을 무한히 인공적으로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지능을 좋게 보면 그것은
무한한 지식의 축적이나, 나쁘게 보면 그것은 무한한 소유적 탐욕의 대명사가 된다.
그 동안 인류는 이 소유론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지식의 추구를
최대의 가치로 여겨 무한팽창을 장려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런데 본능과 본성처럼 이 지능과 본성도 상관적 차이의 이중성을 구조적으로 띠고 있다. 이 지능의 소유욕이
우세하면, 본성의 존재론적
욕망(존재하는 세상을 기쁘고 편안하게 존재케 하려는 원력)은 인간의 마음에서 감추어
진다. 이것은 마치 지능의 경쟁심이 본성의 이타심을 은폐시키는
것과 같다. 이 사실을 노자가 ‘도덕경’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겠다. ‘도를 닦으면 날로 소유욕이 줄어든다.’는 것은 지식욕이든 물질적 탐욕이든
자아중심적인 지배
욕이 줄어야 본성이 지혜의 길을 열어 놓는다는 것이다.
지식욕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상을 편리하게 살게끔 세상을
장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지식은 다 도구적이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 여러 번 지적되었듯이,
가치는 필연적
으로 반(反)가치를 수반한다. 도구도 양날의 칼처럼 가치와 반가치를 동반한다. 가치가 큰 도구일수록, 반가치의
해독도 그만큼 크다.
컴퓨터의 가치를 부정할 사람은 없겠다.
그러나 그 해독의 크기가 얼마나 엄청날지 아직 우리는 다 모른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그 해독의
일부분일
것이다. 그렇다고 컴퓨터를 다 파괴하고 원시상태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방직기계를 없애고 물레를 돌리는
수공시대로 되돌아가자는 낭만주의적 경제학의 발상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본성의 지혜는 지능의 지식축적과는 정반대로 이기적,
자아중심적, 인간중심적 사고를
버릴수록 더욱 찬연하게 마음 안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사는 지식추구의 가치만을 숭상하고, 그 반가치의 해독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고 그의 저서 ‘무엇이 사유라 불리워지는가?’에서
언명했다. 과학은 도구적 소유적 지배지식만을 생각하지, 인간이 모든 자연과 다 함께
존재하는 공존과 공명의
사유를 망각했다는 뜻이겠다. 하이데거의 말은 과거의 철학이 과학을 크게 키우는 데 그 역할을 다했으므로, 이제
그런
철학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사유의 도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지식의 가치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과학이 존재의 지혜를 사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의 가치를 지혜스럽게 활용하는 것도 마음의 본성이 지능의 힘을 견제하는 능력을 갖도록 하는 데 있겠다.
컴퓨터의 반가치적
해독을 줄이는 길은 흔히 말하는 실효성이 없는 사이버매체의 도덕이 아니라, 마음의 지혜를
여는 본성의 존재론적 발현일 것이다. 과학교육의
중요성만큼 지혜의 발현을 위한 존재론적 사유도 역시 중요하다.
지혜는 자의식 대신에 자의식을 비우는 공부를, 소유적 가치와 공격적 힘의 축적
대신에 자기와 세상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보는 평정심을, 이기적 탐욕 대신에 일체를 존재하는 그대로 다 아끼려는 원력을 각각 활용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바로 본성의 활용이다.
1세기경(?) 인도 대승불교의 고승, 아슈바고샤(한자명 馬鳴)는 그의 저서인 ‘대승기신론’에서 유명한 삼대(三大)
사상을 말했다. 그는
불법의 본질인 공성(空性)의 위대성을 비로자나불인 법신불에, 공의 바다로부터 파도처럼
솟는 만상 존재의 불가사의한 기(氣)의 힘을 노사나불인
보신불에, 그리고 마음의 지혜스런 활용의 보기를 석가
모니불인 화신불에 각각 비유했다.
화신불인 석가모니가 어떻게 마음을 활용해야 세상이
구원되고, 모든 만물이 다 고통에서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그와 같이 오셨고(如來)’, ‘그와 같이
가셨다(如去)’는 것을 아슈바
고샤는 암시하려 했다.
법신불은 신구교 신학에서의 성부에, 보신불은 성령에, 그리고 화신불은 성자의 의미와 매우
유사하다.
우리는 종교의 벽을 넘어서 석가세존과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인간의 본성을 활용하는 지혜를 가르치고 가셨다는
것을 유념해야겠다.
서양의 연금술에서 ‘현자의 돌’(philosopher´s st one)을 찾기 위해 연금술사들이 눈을 밖으로 돌려 많은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 현자의 돌만 찾으면,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그들은 꿈꿨다.
그러나 그 현자의 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이미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 왔다.
그 돌은 불교적으로 보면 여의주다. 여의주는 용이나 거북이 물고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이미 깃들어 있다.
우리도 그것을 늘 바깥에서 찾으려 했다. 지식교육과 함께 우리는 늦기 전에 마음을 지능에서 본성에로 옮기는
마음의 활용법인 지혜의 교육도
가르쳐야 한다.
지식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나이’처럼 근육의 힘을 주나, 반가사유상처럼 자기와 세상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현자의 돌이나 여의주가
본성이다. 본성은 지능이 쉴 때에 깬다. 지혜는 본성의 발현이다. 지식은 자아의 꽃이나,
지혜는 무아의 열매다.
이성을
넘어서 |
인간이 얼마만큼 이성적일까?
보통 우리는 감정이 격해서 흥분한 사람에게 이성적(reasonable)으로 또는 합리적(rational)으로
행동하라는 말로 충고한다. 저 말은 감정의 흥분과 격정에 생각을 맡기는 것을 피하라는 말로 들린다.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빨리 흥분하고
격정적이어서 대국(大局)에서 실수를 잘하고 공동의 이익을 놓치는 어리석은 일을 감행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종종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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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가 나면 이익도 팽개치고 다 엎어버리는 한국인의 충동적 행동을 나는 그 동안 세상을 살면서 여러 번 경험했다.
나는 감정적 흥분상태의
격정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이성적 또는 합리적 사고방식이라고 젊었을 적부터 꽤 오랫동안
생각해 왔었다.
한국인의 비이성적, 감정적 생활태도를
나는 비판적으로 보아왔다. 그런 나는 얼마만큼 이성적이었던가?
나 역시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쉽게 빨리 흥분하는 감정의 행태를 노출해 왔었다.
직업상 나는 학술세미나에 많이 참석해 왔었다. 학술세미나에서는 찬반 토론이 생기고 때로는 격렬한 주장도 일어
날 수 있다. 그런데 거의 예외없이
학술세미나에서 반대의견의 개진이 치열할 경우에 논리적으로 합리적 종결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감정상의 앙금이 남아서 가시돋친 말의 교환이
오가는 와중에 겉으로는 점잖아 보이
지만 속으로 감정이 뒤틀어진 상처가 이성의 당위적 요구를 무색케 하는 현상을 나는 많이 목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20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장인 하버마스의 이성적 비판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사회를 교조와 통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목적으로서의 ‘이상적 담화의 상황’에 의하여 균형적
말의 교환을 방해하는 장벽을 헐고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대화하는
이성사회가 가능하겠는가 크게 의심하게 되었다.
단적으로 나는 그런 사회의 창조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나는 점차로 이성에 의한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공상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이성은 결코 무의식에 침전된 인간의 감정적 앙금을 씻어내지 못한
다는 것을 깨닫는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지니는 의미를
숙고하게 되었다. 과연 인간은 이성적 동물인가? 그 말의
뜻이 무엇일까?
앞글에서 여러 번 강조됐듯이, 인간의 본능은 동물의 본능처럼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지 못하고 희미해서 본능
대신 지능이 생존의 능력을
대행하게 되었다. 지능만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자연의 본능을 지배하고,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개척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대본은 다 지능의 산물이다.
이성적 동물은 지능적 동물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이성은 도구적 이성을 뜻한다. 지능과 이성은 다 도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인간이 동물인데, 단지 동물과 다른 특이한 차이는 지능을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뜻이
겠다. 그 말이 옳다. 도구적 이성은
실용적인 편리의 진리를 추구한다.
그런데 지능은 동물적 본능의 대행이므로 본능이 지닌 자기생존의 우선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개인적,
가족적, 국가적, 종족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자기생존의 우선권이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한 번도
포기된 적이 없었다. 그것이 포기된 상태는 곧
지능이 모자라는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그만큼 지능의 경쟁에서 승리한 나라라고 봐야 한다. 즉 도구적 이성의 사용이 왕성한
나라가 세상을 지배해 왔다. 그 도구적 이성의 승리는 늘 자아주의, 이기주의의 생존욕을 안으로 감추고 있다.
그런 생존투쟁을 비판하면서 도덕적 해방적 이성을 강조하는 반(反)도구적 이성주의의 사상이 반작용으로 존속해
왔다. 그것이 시대마다 다른
이름을 지었었지만, 좌우간 이기적 자아생존의 우선권이 늘 패배자의 슬픔을 밟고
있어 왔기에 불의의 역사를 심판하는 그런 기능을 비판적 이성이
담당해 왔었다.
동양에서 주자학적 도학주의나 대동(大同)이념에 입각한 성리적 사회사상, 서양의 각종 사회주의나 마르크시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등등은 다 도덕적 성리주의와, 또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는 사회적 이성
이나 해방적 이성의 신뢰에 근거해 있다고 봐도 괜찮겠다.
유가적 성리론(性理論)은 천명(天命)의 절대적 선의지를 인간의 사회에 대동적(大同的)으로 실현하려는 도덕주의를
말하고, 기독교적
메시아사상과 연관된 사회주의적 이성론(理性論)은 이기적 지능을 초월한 공동선 의지에 입각한
역사적 구원의 공동체를 이 세상에 실현하여 인간의
현실적 소외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이성(理性)의 개념은 서양어 ‘reason’의 번역어이나, 이미 동양에 있어 온 성리(性理)의 개념을 참작하여
살짝 바꿔
옮긴 것이겠다. 그래서 역사를 구원하는 해방적 이성론자들은 도구적 이성을 격하시키고, 보다 더 상위적인 구원적
이성을
지고선(至高善)의 이념과 동격으로 부상시켜 그런 구원적 이성이 인간의 모든 생각을 궁극적으로 통일하는
규정적 이념(regulative
idea)이라고 여겼다.
지고선의 규정적 이념이 과연 인간의 모든 감정의 비이성적 앙금의 응어리를 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비이성적 감정의 앙금은 역시
이기적 지능의 자아우선주의와 직결된다. 자아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기에 그것이
감정의 앙금으로 남아 타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은연중에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자아에는 도구적 이성의 자아우선
주의와 다른 해방적 이성으로서의 보편적 자아가 있다는 것인가?
나는 그런 보편적 자아가 현실적으로 실존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보편적 자아는 관념상의 추상적 자아로서 당위적
으로 이기심이나 감정적 흥분을
억제해야 한다는 의식상의 의지론이지, 그 의지론이 자아의 자연적 실상은 아니
라는 것이다. 의식의 각성은 무의식의 자연적 기호를 이기지 못한다.
모든 도덕주의나 사회주의가 실패한 기본원인은 그것이 무의식의 기호를 외면한 명분주의이기 때문이다.
의식이나 의지는 모두 자아에서 발원하고
있으므로 자아에서 발원하는 모든 현상은 자아우선적 이기심의 무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방적 이성이 그리는 보편적 자아가 도구적 이성이 낳는
이기적 자아를 능가할 것 같지만,
전자는 의식의 명분이고, 후자는 무의식의 자아우선의 기호를 대행하는 것이므로 의식의 명분이 무의식의 기호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사회주의나 도덕주의가 실제로 시장주의와 기술주의를 능가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이유는 바로
의식상의 명분이 무의식상의 이익을
조금도 부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주의는 곧 지능의 사상이고, 그 생명은 20세기 미국의 철학자 듀이가 갈파한 도구주의적
이성(지성)의
영역을 넘지 않는다. 듀이는 해방적 이성같이 거창한 허구를 수용하지 않고, 착실한 현실적 문제해결의 가능한 영역
에 이성의 기능을
제한시켰다고 하겠다.
도구적 이성의 진리는 곧 세상살이를 편리하게 만드는데 있다. 편리를 만들려는 자아우선주의는 본질적으로 자아
중심의 소유주의적 속성을
경쟁적으로 띠고 있으므로, 나의 승리는 너의 패배요, 나의 기쁨은 너의 슬픔이 되게
마련이다. 이것이 도구적 이성주의의 빛과 그림자다.
도덕주의와 사회주의가 아니고 저 이성주의의 소유론적 자아
우선주의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는 여기서 공자가 ‘논어’(자한편)에서 말한 ‘절사’(絶四)의 뜻을 음미해 볼 필요를 느낀다.
“공자가 네가지를 끊었는데, 곧 그것은 무의(毋意=자기 멋대로 함이 없음), 무필(毋必=기필코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없음),
무고(毋固=고집스러운 집착이 없음), 무아(毋我=자아우선의 욕심이 없음)이다.” 뒤에 우리가 공자의
사상을 다시 검토하는 기회를 갖겠지만,
단적으로 공자의 사상은 삼원체제(자연적 무위/도덕적 당위/기술적 유위)를
갖추고 있다. 오늘의 ‘절사’사상은 그 중 하나인 무위유학의 면모를
말한다.
이 면모는 불교와 노장사상과 유사한 대목을 지닌다. 장자(莊子)의 ‘대종사’편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인 ‘심재좌망
(心齋坐忘)’이 여기에
속한다. 마음의 공허가 심재요, 좌망은 장자의 유명한 주석가인 3세기경 중국 위진시대의
곽상(郭象)의 표현처럼 ‘무심의 마음’, ‘일신을 느끼지
못함’, ‘천지를 알지 못함’ 등으로 이해된다. 의식의 생각을
온전히 비웠다는 것이 곧 심재좌망이겠다.
자아가 존속하는 한에서 경쟁의 세계에 살 수 밖에 없는데, 경쟁과 자아우선의 사고방식을 약화시키는 길은 그것을
억압하거나 지우려고 노력하는
도덕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다.
억압의 길은 파행적 지능의 교활함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다. 사회주의에서 시장이 봉쇄되면서 시장의 기능이 암시
장으로
은폐되어 나라경제를 교란시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도덕주의는 명분지향의 한국사회처럼 앞뒤가 다른 위선의 풍토만을 조성할 뿐이다. 억압
대신에 자의식을 고요히
쉬게 하는 무심한 마음의 안정법을 익혀야 한다. 의식이 고요히 쉬면, 무의식에 숨어 있는 본성이 잠을 깨면서
이기적
본능의 탐욕이 자의식과 함께 누그러진다. 본성의 자발적 기호는 본능의 자발적 기호가 쉬면 드러난다.
이것이 열리면 지능의 이기적 분별심 대신에
본성의 지혜가 빛을 발하면서, 지능의 도구적 이성의 역할이 자리
이타적 방향으로 발양하게 된다.
공자가 말한 심재좌망은 마음이 그냥 멍청하게 아무 생각 없는 무기(無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의
자기 생존욕을 잠재우고
본성이 자기 존재의 꽃을 피워 타인들에게 이익을 보시하려는 고요하면서 즐거운 채우기를
뜻한다. 자의식의 이기심은 도덕주의적 훈계나 사회주의적
권력계도로 사라지지 않는다.
자의식의 마음이 고요히 쉬게되면, 마음의 본성이 무의식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면서 본능과 지능의 합작품을
본성과
지능의 합작품으로 돌린다. 마음의 본능을 억압하는 도덕과 정치보다 오히려 마음의 본성을 가까이 하는
방법을 미래교육의 화두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