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행지는
‘오스트리아 ‘빈’ 구“비엔나”와, 이색 간판 거리 '게른트너 거리(Kerntner Street)' 그리고 '모차르트 생가‘ 를 둘러보겠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호텔 조식을 하고 음악의 도시“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로 가는 길, 아직 어둑 살이 벗겨지지 않은 새벽하늘에 후조(候鳥) 들이 날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길고 짧은 터널, 구부러진 산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창밖엔 어제 보다 키 큰 침, 활엽수 군락들이 저마다 고운 색을 뽐내고 사계(四季) 푸름을 자랑하는 히말라야시다도 많이 보였다.
히말라야시다는 나무의 이름대로 히말라야 산맥이 고향인 나무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아름드리나무가 죽어도 그대로 두고 그 자리에 다시 새순이 자라도록 보호하는 것 같다! 계곡을 끼고 있는 자욱한 안개가 한층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까만 베일을 벗고 달려오자 그림 같은 초원의 고요한 마을마다 뾰족 지붕 아름다움의 생체(生體)가 드러났다.
아침 햇살이 굼실대는 의자에 기대선 가이드 오늘도 해박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강의보다 실감 나게 들려준 사람, 가는 곳마다 지루한 시간을 메우던 재주꾼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고산 8부 능선에 눈이 내리더니 금세 하얀 상고대로 피었다. 이곳이 어딘지 즉석에서 보여주는 진풍경이었다. 군데군데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날개를 휘감는 바람이 가을과 겨울로 갈라놓은 듯 아래에는 단풍이 곱게 들고 위에는 상고대가 피는 두 계절의 장관을 뒤에 두고 달리던 버스의 거친 숨소리가 멎은 비엔나,
‘현지 가이드’ 희정님 인정스런 말투, 깔끔한 안내로 목적지로 가는 버스에서 진지한 안내를 받으며 오늘 돌아볼 곳, ‘빈’(비엔나)에서 가장 번화한 '게른트너'거리(Kerntner Street) 여기가 이곳 관광의 시작점이고 가장 화려한 곳이다. 이색적인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 보는 내내
신비의 길에서 바라본 이방인의 눈에 한군데를 콕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거리,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슈테판 성당까지 직선으로 600여 미터가 보행자 전용도로로 보호받고 있었고 유럽은 대부분 ‘트램’(지상 전철)을 운행하고 있었다. ‘트램’은 “노면전차(路面電車),시가전차(市街電車)” 라고 불리는 교통수단의 하나이며 주로 도로상에 부설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전동차다. 이것을 북한에도 수출했단다. 그래서 일까? 트램 승차 또한 ‘이색 체험’이었다.
그 중에서도 불꽃처럼 살다간 천재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생가를 둘러보는 심정은 남달랐다. 아래사진 ‘노란벽 집’ (참조)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린 최고 작곡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합창곡, 성악곡 등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긴 위대한 음악가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오로지 아들의 음악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단다.
모차르트는 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건반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6살 무렵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건반악기 연주자가 되었으며, 오르간과 바이올린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으며 작곡에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해 6살 때 미뉴에트, 8살 때 교향곡, 11살 때 오라토리오, 12살 때 오페라를 작곡하는 기록을 세웠다.(중략)
1786년과 1787년,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과 〈돈 지오반니(Don Giovanni)〉걸작들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대중들 사랑을 한몸에 받는 천재 작곡가가 되었고, 그러나 그는 늘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일정한 수입의 일자리가 없어 왕실 가족이나 귀족 앞에서 연주를 하거나 귀족 자제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지만 오스트리아와 터키 간의 전쟁으로 귀족과 왕실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수입도 줄어들었단다.
1787년 12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빈에 잡아 두기 위해 파트타임 일자리를 제안했다. 리도우텐 홀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무도회를 위한 춤곡을 작곡하고 일 년에 800플로린을 받는 조건이었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며 1788년, 빈 근교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이유는 집세를 조금이라도 줄일 생각에서였고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돈을 빌리기 시작했으며 가까운 친구에게 아주 비굴한 어조로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도 썼다고 전해진다. 1789년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재정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포츠담,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등지를 방문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던 그가 극심한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그해 6월, 빈으로 돌아와 왕실로부터 새로운 제안을 받았고 그것이 1790년에 초연된"여자는 다 그래(Così fan tutte)" 이다 이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에 발표한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ote)" 역시 엄청난 힛트를 쳤지만 그의 건강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고 그 후 익명의 사람에게 "레퀴엠(Requiem)" 작곡을 의뢰받고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채 1791년 12월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생가를 둘러보는 내내 가슴 한구석에 애잔한 마음으로 '울적'을 다듬으며 다음여행지로 가기 위해 호텔에 투숙했다.
다음에 계속.
첫댓글 오스트리아 의 거리의 풍경
운치가 남다르네요
직접 가서 보신 느낌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깔큼한 설명과
멋진 사진 감동이어요
국장님!
지난해 다녀보며
부러운 게 너무 많았습니다.
선조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후손들이 삶의 결이 더 여유로웠던
기억 새롭습니다.
오늘은 정말 햇살이 너무 좋습니다.
창밖에 흐드러지진 매화가
눈부시게 하늘거리고
누군가 그리워 설레는 휴일입니다.
고맙습니다.
여행은
산지식을 얻는것
그만큼
추억도 기억도
아름답게 담아질겁니다
전 언제 갈지도 모르는
유럽 여행
두루두루 다녀오시고
좋은 시간이셨을것 같아요
다음호가 또 기대되는걸요
억지로라도 다녀오실 것은 권해 드립니다.
사실 약간에 돈도 들지만
살다보면 그 돈 없어도 있어도
쪼들리기는 매 마찬가지인 저는
후회가 없습니다.
음악의 천재는
그렇게 단명을 했습니다
여행의 기회가 없을 수 도
있는 저로서는
무조건 부럽습니다
이리 앉아서 눈이
호강이니 감사드립니다
계속 이어 질
다음이 기대 되어집니다
모쪼록 무탈 안전
좋은 여행되시길요..
그들만의 문화를 꽃피우던 아득한 날
수백, 수 천년의 세월 지키고 선
널브러진 보석(건축)들
최고 음악의 산실을 돌아보던 현장은
참으로 감동이었습니다.
그의 집 앞에서 그들의 역사 앞에서
나는 그저 감탄만 하다 왔습니다.
올해는 다른 유럽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휴일 즐겁게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유럽의 건축물은
규모에서도
웅장하고 화려함의
극치입니다
건물하나에도
백여년이 넘도록 지은다는데
시인님의 여행길에서
담으셨을 귀한작품들
여행기와 더불어
즐감했습니다
고딕,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바로크. 등 건축 양식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영광이었습니다.
짧게는 수년, 수십, 수백, 무려 천년에
이어오면서 지어진 건물 앞에서
그저 감탄 뿐이었습니다.
그 시절 저 아름다운 조각 몰딩 그 높은 건물을
어떻게 지었으며 그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완성한
위대한 건축물, 절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소중한 글벗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