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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코로나와 전쟁은 무엇인가?
사순절 여정!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다. 동행하는 제자들은 금번에 자기 스승이 메시아임을 선포하고 메시아 제국을 세울 것이라는 기대로 흥분하였다. 특별히 요한과 야고보 형제들은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좌우의 자리를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 말에 화가 난 제자들이 두 형제와 핏대를 올리며 다투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싸움을 중지시키고 자신은 제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에 왔으며 금번 예루살렘 행은 죄와 죽음, 악의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 위해 대속의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헨리 나우웬이 말년에 하버드대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지적 장애인과 함께 살기 위하여 캐나다의 어느 공동체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의 그런 행동을 지식인의 영적 허영과 직무 유기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 나는 그가 사제이며 수도사로서 매일 것이 없는 지식인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서구사회 자본주의의 불의와 부패를 비판하며 정의로운 사회 개혁을 촉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의미를 깨달았고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하버드대학교 교수직이 아무 것도 아니며 교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 기간이다.
26억에 가까운 크리스천들이 사순절에 대속자요, 화해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며 참회와 감사의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에 사는 세 명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완악하고 교만한 자들을 위해 화해자로서 삶을 살게 되면 곧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기대와 희망이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절 예배 후에는 절망과 낙심으로 바뀐다. 21세기에 들어서만 해도 사순절이 벌써 스물두 번이나 지나갔지만 세상은 우리의 기도와 이상대로 달라지지 않았다. 교회와 우리 크리스천들이 달라지지 않는데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자신의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자신의 지나친 소유를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누구도 치열한 경쟁을 포기하지 않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누구도 세상의 이권 다툼을 포기하지 않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자신의 과소비와 허영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자신의 삶이 은혜인 것을 깨닫는 사람이 없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는 사람이 없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누구도 온전히 용서하지 않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누구도 종의 삶을 살지 않는데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해마다 반복되는 사순절이 개인들의 영적 카타르시스로 끝나지 않고, 경건한 교회 행사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변곡점이 되는 놀라운 결단과 변화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난 4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과 미얀마 내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묵묵히 바라보며 형언할 수 없는 아픔, 고뇌와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역사와 인간 정신의 퇴보에 경악하며 때로는 상처와 낙담으로 냉담과 무관심에 빠지기도 하였다.
언뜻 보면 코로나, 전쟁은 다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다 하나님 없는 무한 탐욕이란 핏줄에서 태어난 형제들이다.
코로나팬데믹으로 인하여 국경이 닫히고 비자 발급이 중단되고 비행기 운행 중단으로 인하여 해외 사역 현장을 돌아갈 수 없었던 개인적인 고통과 상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지구촌 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겪은 비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기원을 과학의 발달로 인한 지구환경 파괴와 착취 그리고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에서 찾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의 무한 탐욕이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을 촉진하였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변화하지 않았다. 처음에 록 다운으로 대기가 맑아지고 자연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는 뉴스에 잠시 환성들이 터져 나왔지만 코로나 백신이 나온 지금 모두 다 코로나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 각종 단체와 개인들이 모두 다 코로나로 중단되고 망하고 침체된 것들을 옛 수준 이상으로 복구하려는 노력과 집념으로 핏방울이 튀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 환경과 생태가 인간의 무한 탐욕을 정화해낼 수 없는 극한 상황, 위기에 빠졌다는 자연의 신음이자 신호이며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우리가 신처럼 신봉하고 있는 과학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개발과 발전이 자연 생태계를 교란시켰으며 결국 그것은 인간에게 재앙이 된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생태계 교란과 오염, 파괴와 혼란은 국지적인 재앙이 아니라 세계적인 재앙이 될 것이며 지구는 대체될 수 없는 하나의 생태 및 생명 공동체라는 것,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결코 자연을 정복할 수 없으며 정복했다는 착각으로 하는 모든 연구와 실험들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어 갈수 있다는 계시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물질만능의 가치관과 물질로 포만한 생활을 더 늦기 전에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살 권리를 부여받은 자연 생태계의 생명의 살 권리를 인정하며 함께 공생하는 생명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라고 권면하였다.
처음 코로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피동적인 변화를 시도하였다. ‘록다운’으로 바쁜 생활을 정지하였고 어쩔 수 없이 쉼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인류세를 자랑하며 만물의 영장이었던 인간이 미생물 앞에서 무력하고 초라하고 불완전한 과학과 문명에 대 성찰을 하였으며 또한 에너지와 오염, 탐욕과 과소비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을 하며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 없는 문명의 죄악과 참회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 결과 백신이 나오자 사람들은 잠시 눌러 두던 욕망으로 마스터플랜을 재정비하며 과학 발전이 오염과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가까운 미래에 해결해 줄 것으로 확신하며 다시 무한 경쟁 체제로 돌입하였다.
누가 오만한 인간 욕망의 고삐를 쥘 수 있겠는가? 개개인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욕망의 분출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누가 기업들의 미래 투자인 개발연구와 시장 지배를 위한 마케팅을 조정할 수 있겠는가? 강대국들의 정치경제적 횡포와 제재, 군사적 위협을 불의하고 악하다고 말하며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예언대로 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이 개인과 기업, 나라와 민족의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욕망에 부대끼고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에 시달리면서 가장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한 대목은 코로나 팬데믹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각국 정부가 취한 ‘록다운’ 정책이었다. ‘록다운’이 ‘록다운’으로 말미암아 부득이하게 발생한 가난하고 병든 모든 사람들의 희생과 고난을 넘어서는 가치와 효과가 있었는지? ‘록다운‘이 코로나 방역을 위한 최선의 조치였는지는 후세 학자들이 밝히겠지만 나는 방역을 빌미 삼은 ‘방역 독재’의 의미가 더 컸다고 본다.
세계 각국의 공권력은 참으로 막강하였다. 순간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정지 되고 통제 되고 폐쇄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았다. 교회도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다. 결혼식과 장례식에 가는 것도 통제되었다. 특별히 팬데믹으로 죽은 사람의 장례식은 비참하였다. 참으로 기막히게도 생일과 명절에도 5인 이상 가족이 모일 수가 없었다. 모든 미팅의 숫자가 제한되며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병원 진료를 받기 전에 먼저 코로나 감염 여부를 먼저 검사를 받아야 했다. 코로나 환자들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감시되었다. 일상이 사라졌고 어디를 가든지 기록하여야 했고 모두들 전시치하처럼 TV에 달라붙어서 코로나감염환자 수에 경악하며 불안과 공포에 잠겼다. 그리고 영세한 자영업자, 소상공인, 중소기업 순으로 폐업의 수순을 밟게 되었고 이로 인한 경제 불황의 파급이 밀물처럼 우리 사회를 덮쳐 버렸다. 그러나 누구도 생명의 위기라는 상황 앞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려고 심혈을 기울이는 방역 독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네팔과 인도에서는 방역독재 때문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나 산에서 죽거나 기아로 쓰러졌다. 네팔과 인도에서 긴급구호를 요청하는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거리의 사람들의 생명과 생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나라들의 방역독재에 안타까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마다 첸나이, 뉴델리, 안드라프라데시, 텔랑가나, 마니푸르와 카트만두와 시골 등지에서 산소통과 약 그리고 식사와 담요를 원하는 요청이 빗발쳤고 나는 이년 여 세월 동안 그 수발에 정신이 없었다. 물론 하나님의 공급으로 한 것이지만 말이다.
작년 10월에 네팔 거리 배식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그들의 히스토리를 들었다. 취업을 하러 올라와서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 ‘록다운’으로 일터가 문을 닫았고 돈도 없고 돌아갈 길도 막혀서 거리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취업하려해도 실업자가 넘쳐서 일할 곳이 없고 집으로 돌아가려해도 돌아 갈 수가 없게 되었다며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추르찬드푸르에서도 코로나 죽음에 대한 비참한 이야기와 그 때 우리 신학교가 코로나 감염환자 수용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들었다.
과연 각 나라들의 각종 방역 규제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퇴치한 것일까? 당시 ‘록다운’은 선택하면서 ‘록다운’이 미칠 긍정적인 영향과 함께 부정적인 영향, 단지 경제적인 요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사회성과 인간관계에 미칠 영향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았을까? 교육과 종교가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조금도 허용할 수 없었을까? 명절과 특별한 행사에 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강력하게 규제했어야 할까? 방역 기간에 형성된 청소년들의 고립 생활과 심각한 스마트 폰 중독을 방역당국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이들 뿐 만 아니라 기성세대들까지도 스마트폰으로 노는 세상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내가 코로나의 세계적인 방역독재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명목이 독재를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기꺼이 자유를 유보하거나 반납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시상황이 아니어도 생명의 안전과 보호의 이름으로 국민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고 제한 할 수 있으며 국민은 아무런 생각 없이 자유를 국가에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재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동의에 의하여 언제나 우리 곁으로 올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록다운’으로 야기된 억울한 죽음과 영화 속 세계에서나 가능했던 충격적인 기억과 폐업으로 무너진 사람들의 고달픈 이야기로 끝난 과거의 것이 아니다. 후유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무엇보다 알 수 없는 것은 앞으로 어떤 변종 바이러스, 신종 바이러스가 나타나 우리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우리의 삶이 지옥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우리가 편리한 과학 문명을 많이 영위하면 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 소모로 지구온난화가 가속화 되어 지구를 살리기 위한 자연 생태계의 몸부림이 어떤 형태의 재앙으로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문명, 하나님 없는 복지, 하나님 없는 번영, 하나님 없는 쾌락, 하나님 없는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대속자가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따라서 우리 또한 이 시대 속에서 하늘과 사람,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대속의 삶, 화해의 삶,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 길만이 탐욕으로 세워지고 탐욕으로 영위되는 제국의 질서를 극복하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2023. 3.29. 수요일
우담초라하니
미얀마 내전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무엇인가?
2부에서 계속됨
직접 겪지 않은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아직도 겪고 있는 한반도를 생각하면 마음을 둘 곳이 없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는 나라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망의 때가 왔다.
촛불혁명으로 촛불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나는 한반도의 교류와 여행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핑크빛 환상으로 행복하였다. 드디어 오랜 세월 기도하였던 기도 제목이 응답된다는 설렘으로 도문에서 남양시를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