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제가 수년 전에 목회자 수련회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저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한 목사가 제 가까이 오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김 목사는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우리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던데”라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이 친구의 말을 곱씹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런 마음은 목사라고 해서 별 다를 바 없음을 알았습니다. 큰 건물에 많은 교인, 그리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기의 위용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목회자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여러 모임에 지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고 보니 저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질적인 측면으로 목사는 무엇을 드러내야 할까요? 마지막 예수님의 심판대에 설 때 자랑할 것이 큰 건물, 수많은 교인이어야 할까요? “내 노력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요청을 드려야 될까요?
예수님의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을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마 7: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는 주의 종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매끄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혜롭게 할 만한 설교를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도 행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큰 예배당도 지을 수 있었고 많은 교인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뿐 아니라 주님 앞에서도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평시에도 주님께 가면 많은 상급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었고, 이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마 7:23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고 큰 권능을 행하였다고 떳떳하게 내세우는 자들에게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불법을 한 자라고 꾸짖는 것입니다.
한쪽은 주님께 칭찬받을 것을 기대하여 나름 세상에서 열심히 하여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가혹하게 모른다고 하시며 불법을 한 자라고 하시면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십니다. 무엇이 이렇게 큰 차이를 빚어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주님은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행한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아 마지막 심판의 때에 모두 무너져 내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 안에 예수님이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루기를 원하는 하나님 독생자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내가 이뤄놓은 업적에 마음이 빼앗기고 내 노력으로 얻은 결실에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내가 쌓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책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목회자의 모범을 보였던 바울은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힘써 이루려고 하였던 것은 커다랗고 웅장한 예배당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자기 수하에 끌어들여 영향력을 행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삶이 자신에게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그 삶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를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참된 생활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나타내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처음 쓰였을 때는 긍정적인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지역에서 비기독교인에 의해 붙여졌던 것으로 예수에게 미친 듯이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란 경멸적인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별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유대교를 숭상하는 자와 구별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활동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셨을 때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고 이에 대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인격을 취해야 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삶의 뿌리를 땅에 드리우지 않고 하늘에 두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약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행한 사역에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행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삶의 뿌리를 땅에 드리우지 않고 하늘에 두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의 '거기'라는 단어는 문맥상 갈릴리 지역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대규모의 군중 앞에서 설교하셨습니다. 그 후 마가복음 5장을 보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셔서 세 번의 이적을 행하셨고, 이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성공해서 돌아오는 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서 외지에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 고향에 돌아오면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것을 갖고 오기를 원합니다.
많은 재물이거나 높은 학식 들 세상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향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실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타 지역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많은 이적을 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신 것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냉랭하였습니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이것이 큰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마음에 담고 있는 세상의 성공을 전혀 염두에 두시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이 고향에서 떠날 때도 랍비로 떠났고, 여전히 랍비로 돌아오셔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칠 뿐입니다. 결혼하여 훌륭한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크고 호화로운 집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멋진 예배당과 많은 교인을 끌어모아 그 위에 군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가진 것 없는 초라한 모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즉,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땅의 것에 매이지 않고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분은 1.4후퇴 때 아들 하나 데리고 피란 오신 분이 계십니다. 남편은 같이 내려오다 폭격 맞아 먼저 세상을 떠나고 이분은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삯바느질부터 시작해서 떡 장사 남의 집 허드렛일은 물론 안 해본 일들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악착스럽게 돈을 모아 땅을 사고 집을 사곤 했습니다. 어는 정도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척들이 장사를 지내 드리려고 갔더니 누더기에 손에 무엇을 꼭 쥐고 누워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했더니 땅문서와 집문서를 꼭 쥐고 있더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주님이 부르실 때 모든 것을 툴툴 털어버리면서 주님께 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두고 떠나지?’ 하고 있다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는 젊으니 예외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젊어서부터 주님이 찾으실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요, 하늘에 상급을 쌓아놓고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어떤 것도 내 소유가 아닙니다. 나는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신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막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에 살고 있었던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30여 년 성장 과정을 줄곧 지켜보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율법이 기록되어 있는 토라를 펼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매우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끝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싸늘하고 경멸적인 시선으로 변해 ‘예수를 배척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분에게 부정적, 혹은 공격적 태도를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의 시선에 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는 의심은 당시의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이라 표현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출생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기억하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스캔들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 중일 때, 마리아는 임신했습니다. 요셉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 말했고, 마리아는 자신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임신하게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성령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연히 마리아가 딴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서는 해괴한 변명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남편 될 사람 요셉이 이혼을 청구하지 않음으로써 이 스캔들은 그냥 덮이는 듯했지만, 결국 삼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사건은 다시 고향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라고 지적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을 ‘목수의 아들’이라 기록했고, 누가는 그냥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해 두었습니다. 당시의 목수는 목재와 돌을 함께 다루는 사람으로 천한 직종에 해당되었습니다. 마가는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이 목수였듯이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전에는 목수로 사셨음을 알려 줍니다.
이런 약점과 결점이 있었지만 이를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결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안고 견디면 꿋꿋하게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 참모습입니다. 나의 약점과 결점이 오히려 주님의 나라에 더욱 필요한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행한 사역에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행하셨습니다.
막 6: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비록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지만, 그분의 사역은 온전히 감당하시면서 전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크든지 작던지 묵묵히 감당하여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눅 19: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은 영어로 ‘small matters’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세상의 기분으로 보면 아주 미미할 수 있습니다. 교회뿐 아니라 내게 주어진 직장에서의 일도 그렇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위치라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감당하여 나가 보십시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내 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생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main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주어진 환경과 시간의 흐름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성령님의 작용일 일어납니다. 내게 주어진 약점과 결점으로 매여 한탄하지 마십시오! 이를 견디고 이기는 과정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순간까지 참고 견디며 묵묵히 감당하는 가운데 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모습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