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金萬重의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서포西浦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며, 충렬공忠烈公 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이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인 1650년(효종1)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16세인 1652년(효종3)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했다. 1665년(현종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666년(현종7)에는 정언正言을, 1667년(현종 8)에는 지평持平ㆍ수찬修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문학론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후대의 평가 속에서도,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예찬론`은 주목을 받는 논설이다. 김만중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특히 한문을`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보고 있는 까닭에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등의 한글 가사를,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견주었다. 이는 그의 개명적開明的 의식의 소산으로 평가된다. 김만중의 많은 시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다. 기본적으로 고시 계열의 작품을 애송하였던 것과도 맥이 닿고 있다. 장편시 단천절부시端川節婦詩는 그의 주정적 시가관詩歌觀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그 밖에 그의 소설이나 시가에서 많은 인물이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도 흥미 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국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주로 구운몽ㆍ사씨남정기 등과 같은 소설이다. 근년에 들어 이와 같은 시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