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이세종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그 제자들은 이현필을 중심으로 모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이현필이 30세 무렵 남원을 방문하여 삼일목공소를 운영하던 오북환집사 등 남원에 있는 기독교 신도들을 만나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이세종과 이현필의 고향인 화순군 도암면과 더불어 남원의 지리산 자락이 공동체 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
이현필은 남원에서 소녀 소년들을 모아서 갈보리산에 들어가 신앙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광복과 더불어 광주로 진출하였다. 서리내에서 교육 훈련을 받았던 청소년들과 함께 1948년 봄에 광주로 이동하여 기독청년회관에 머물며 생활했다. 1948년 가을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발생하자 1949년에는 도암 청소골에서 고아 돌보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0년 광주 지역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시설이 광주 유력인사들의 뜻에 따라 동광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고 이현필을 따르던 정인세가 원장을 맡았다. 6.25전쟁으로 늘어난 고아들을 돌보면서 또한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와 식구들이 불어나게 되었다. 1954년 광주시의 정책에 따라 동광원이 폐쇄되자 불어난 동광원 식구들은 화순과 서울 능곡과 경기도 벽제 등까지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4년 지도적 스승이었던 이현필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새로운 활력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스승의 유지에 따라 정인세 원장이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을 세우고 활동했다. 이현필 선생은 그 생애의 말년인 1960년쯤부터 새로운 공동체로 귀일원을 언급했다. 정인세 원장에게 ‘동광원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귀일원을 하십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정인세는 1965년 2월에 사회복집법인 귀일원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