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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계' 출간에 부쳐
영문법 개념에서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
가 태(態)다. 한자 의미를 따르면 영어로 mode
쯤 돼야 할 것 같은데 voice다. 왜 voice일까. 라
틴어 vox에서 기원했는데, 이 단어에는 ‘목소
리’와 ‘주어와 동사가 맺는 관계’라는 두 가지 뜻
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법 개념에 해당하
는 vox는 다시 그리스어 '디아테시스’의 번역어
다. 디아테시스에는 영어 mode에 해당하는 방
식, 습성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모양과 방식
이라는 의미가 함께 담긴 태로 번역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능동태와 수동태
의 구분에 초점을 맞춘 태라는 개념이 인도유럽
어에만 있다는 것, 그리고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언어의 문
법 개념이 고대 그리스어(헬라어)에서 연원했다
는 데 있다.
태라는 개념이 헬라어에서 연원한 게 왜 중요
할까. 첫째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듯
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며, 둘째 미국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철학은 플라
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
의 삼위일체 격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
토텔레스는 모두 헬라어로 사유했고 헬라어
로 존재론(철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따라서 그
들의 사유를 따라가는 서양철학자는 모두 헬라
어에 기초해 사유를 펼쳐야 한다. 그렇기에 서양
철학자들은 “결국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
는 고백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일본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
계'는 이런 서양철학의 흐름에 제대로 한 방
을 먹인다. 첫째, 헬라어 문법체계에선 능동태-
수동태의 구별 이전에 중동태-능동태의 구별
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둘째, 반(反)플라톤 철학
을 펼쳤다는 스피노자-니체-하이데거-데리다
의 사상이 실은 플라톤 시대의 중동태적 사유
로 해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명사는 동사에 선행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언어의 역사부터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인류 언어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품사
가 뭘까. 명사다.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명명
이 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동사는 다른 품사
와 마찬가지로 명사에서 파생됐다. 동작 또는 사
건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이야기가 있
다’에서 ‘이야기하다’가, ‘후회가 생기다’에서 ‘후
회하다'가 파생되는 식으로 명사구 형식에서 구
체적인 동사로 태어났다. 그래서 ‘동사란 발달
한 명사’라고 할 수 있다.
동사가 처음 만들어질 땐 개별행위자가 중요하
지 않았다. 그래서 It rains(비가 온다)나 It sno
ws(눈이 온다)처럼 비인칭(3인칭) 표현이 먼
저 생겨난다. 이런 사건 중심적 사유가 행위
자 중심의 사유로 바뀌면서 1인칭과 2인칭 주어
가 뒤늦게 등장하게 된다. 고쿠분은 이를 살
짝 과장해 '사건의 사유화’라고 부른다.
프랑스 고전학자 장 콜라르의 연구에 따르
면 인도유럽어의 공통기어는 현재 우크라이
나 혹은 남러시아에서 살던 사람들이 1만 년 전
후로 쓰던 언어였다. 그래서 인도유럽어에서 ‘바
다’라는 단어의 어원은 제각기지만 ‘눈’의 어원
은 공유된다. 이때 이미 명사에서 동사가 파생됐
다. 그러다 늦어도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유
럽 각지로 퍼져나갔다고 본다. 이즈음 인도유럽
어에 주어와 동사의 관계맺음에 대한 관심이 형
성돼 태의 개념이 탄생한다.
주어와 동사의 관계는 곧 방향성과 관련 있
다. 주어로부터 동사로 표현되는 행위가 일어
날 때 능동태, 거꾸로 주어가 동사로 표현되
는 행위의 결과물이 될 때 수동태가 된다. 그
럼 중동태란 무엇일까. 능동과 수동의 중간을 표
현한 것인가.
아니다. 중동태는 오늘날의 자동사(어떤 상태
가 되다)와 재귀동사(스스로에게 뭔가를 행하
다), 그리고 수동태(어떤 상태로 초래되다)를 포
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중동태-능동
태의 대립쌍이 중요했다. 그러다 중동태의 일부
인 수동태가 독립해 나가 ‘하느냐(능동)-당하느
냐(수동)’의 대립쌍이 공고해지면서 중동태는 자
취를 감추게 된다. 그 시점은 대략 고전라틴어
가 형성되는 기원전 1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중동태-능동태의 대립쌍은 라틴어보다 역사
가 깊은 산스크리트어와 헬라어에서 발견된
다. 이를 심도 있게 연구한 프랑스 언어학자 에
밀 벤베니스트에 따르면 ‘주어가 해당 동사가 수
행하는 과정의 바깥(능동)에 있느냐, 안(중동)
에 있는냐'로 구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간
다'의 경우는 주어가 해당 행위를 완수하면 주어
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기에 능동
인 반면, '욕구하다'의 경우는 주어가 그 욕망
이 추동되는 과정 속에 존재하기에 중동이 된다.
심문의 언어 vs 자유의 언어
벤베니스트는 언어학에서 한 발짝 더 나갔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크게 10개로 나
뉘는데 이것이 헬라어의 문법체계를 따른 것이
며 그중 6개는 명사, 4개는 동사에 해당한다
는 가설을 펼친다. 또 동사에 해당하는 4개 범주 가운데 능동태에 해당하는 ‘하는가’를 제외하
면 ‘겪는가’(수동태), ‘어떤 태세인가'(중동
태), ‘어떤 상태인가'(중동태 완료)가 모두 중동
태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고쿠분은 이런 통찰을 철학사로 확장한다. 능
동-수동의 대립쌍은 모든 행위를 누구에게 귀속
시키느냐를 중시하는 사유체계를 낳는다. 사건
의 사유화가 심화된 양태이자 자본주의 출현 이
후 대두되는 ‘일물일주(一物一主)'의 전조 증세
라 부를 만한 사유방식이다. '행하다’와 ‘당하
다'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런 사유는 결
국 의지와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고쿠분은 이
를 늘 행위의 귀속처를 찾고, 능동과 수동 가운
데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
서 '심문의 언어'로 규정했다.
이에 반해 중동-능동의 사유는 주어, 곧 주체
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건으로서 행위 그 자체
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어떤 행위의 출발점으
대한 책임의 개념으로부터 일종의 자유가 발
생한다. 중동태적 사유를 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에게 의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갈파
한 한나 아렌트의 통찰도 이를 뒷받침한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이를 '비(非)타동사
성'이라 말했고, 또다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
는 '능동적이지도 않지만 수동적이지도 않은 존
재의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
니츠는 ‘사건에 선행하는 주어는 없다'는 말로 이
를 대변했다. 이런 중동태적 사유의 정점은 ‘자
유의지'를 부정했지만 ‘자기본성의 필연성에 입
각해 행위하는 자는 자유롭다'고 갈파한 스피노
자에게서 발견된다.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본 스피노자
의 세계관에서 신의 작용은 결코 신을 넘어서거
나 벗어날 수 없다. 스피노자의 신이 초월적이
지 않고 내재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주어행위가 늘 그 자신의 내부에 머무는 중동태적 세계관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세계관은 능동과 수동도 포용한
다. 신이라는 내재원인이 다양한 성질이나 형태
를 띠는 변양을 통해 개물로 표현된다. 문제
는 이 개물과 개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는 점이다. 이를 2차 변양이라고 할 때 변양하
는 물체의 본성에 충실한 경우를 능동적이라 보
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수동적이라 봤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비율의 문제로 취급했다
는 데 있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주어질 때 차분
히 본성에 입각해 반응하는 것과 감정에 사로잡
혀 반응하는 것 가운데 어느 비율이 더 높은지
에 따라 능동과 수동이 된다. 스피노자에게 자유
는 그런 능동성이 고양된 상태라면 강제는 수동
성에 압도된 상태다.
이는 곤란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돈을 건네
는 것과 위협당해 돈을 건네는 것의 차이를 드러
낸다. '총신으로부터는 결코 권력이 발생
할 수 없다'고 주장한 아렌트에게 둘은 모두 능
동적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전
자는 의로운 본질에 투철하기에 더욱 능동적이
고 그래서 자유로운 행위지만, 후자는 수동성
의 발현이 더 크기 때문에 강제적 행위가 된다.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을 넘어
고쿠분이 말하는 중동태의 세계는 현실
에 더 가깝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선악의 이
분법이 딱 부러지게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능동
과 수동의 이분법이 적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
에 취해 애매하고 모호한 중동태적 사유는 잊히
고 은폐됐다.
이와 관련해 고쿠분의 ‘중동태의 세계’는 간과
했지만 깊이 음미할 대목이 있다. 기원전 1세
기 집필된 디오니시오스 트락스의 ‘문법의 기법
(테크네 그라마티케)’을 소개한 대목이다. 가
장 오래된 헬라어 문법책이자 18세기까지 유럽
에서 표준문법서로 통용된 이 책은 3가지 태
를 언급하고 있다. 에네르게이아, 파토스, 메소테
스다. 오늘날 언어학자는 대부분 이를 능동
태, 수동태, 중동태로 번역한다. 미국의 언어학
자 폴 켄트 앤더슨은 이를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에네르게이아는 뭔가를 수행하는 것, 파토스
는 뭔가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메소테스
는 그 둘이 혼재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실제 파토
스가 ‘수동’이 아니라 ‘경험’으로 해석되는 경우
를 수없이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헬레네가 파
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호메로스는 부정적
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여겼다. ‘아프로디테(사
랑의 여신)의 숨결이 헬레네에게 임했다. 마찬
가지로 아킬레스가 전쟁터에서 무용을 떨칠 때
는 ‘아레스(전쟁의 신)가 아킬레스에게 깃들었
다'고 봤다.
현대인이라면 어떤 분위기나 상태에서 자신
의 영혼을 수동적으로 내준다고 부정적으로 인
식할 만한 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부름
에 대한 능동적 호응으로 간주했다. 중동태적 사
유가 결코 이 책 한 권에서 끝나지 않고 좀 더 깊
은 영향을 끼칠 것임을 예감케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