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무기연당 & 기양서원
방석나무 ・ 2022. 5. 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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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에는 조선시대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별당 정원이 있다.
별당의 이름은 '무기연당'으로 무기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씨 가문의 정원이다
함안, 역수의 땅에서 충신의 땅으로
1500년경 주문보는 외가가 있는 칠원의 무릉마을에 정착하면서 입향조가 된다.
주문보의 두 아들 중 장남은 주세곤이고, 차남은 조선 최초의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이다
무릉마을에 살던 주씨 일가가 무기연당이 있는 무기마을로 옮겨온 것은 17세기 중반 주명헌 때였다.
주명헌은 주세붕의 형인 주세곤의 6대손이고, 무기연당을 조영한 주재성의 할아버지로, 종가는 '주씨 고가'로 불린다
종가인 '주씨 고가'는 경상남도 민속문화재로, 무기연당은 국가민속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별당 정원이 국가민속문화재로 등록된 곳은 영양 서석지와 무기연당밖에 없을 정도로 드문 편이다.
그만큼 그 가치를 독립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셈이며, 덕분에 함안은 역수(逆水)의 땅이라는 오명을 벗고 충신(忠臣)의 땅이 됐다
종가에 딸린 별당 정원이지만, 종가의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무기연당
무기마을은 상주 주씨의 집성촌이다. 작대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를 등지고 칠원천을 마주하고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무기마을의 무기는 무우기수(舞雩沂水)의 줄임말로 공자가 살던 노나라 도성 남쪽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마을 앞을 구불구불 흐르는 시내물에 기수라는 상징을 끌어와서 의미를 부여했던 것같다
무기연당은 종가인 '주씨 고가' 에 딸린 별당 정원이다.
무기연당을 조영한 주재성은 1728년(영조 4)에 이인좌의 난(무신란)이 일어나자 함안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사재를 털어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에 관군들이 복귀하는 길에 그의 집 근처에 연못을 파고 정충비를 세웠다.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으로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연못 국담, 멀리 하환정
이후 연못 한켠에 정자 하환정(何換亭)을 짓게 됨으로써 온전한 별당 정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헌정과 현판
주재성은 만년에 하환정에서 거처하여 벗들과 시를 지으며 즐기는 삶을 살았다 한다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통정대부로 추증된데 대해, 장남 주도복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채인 감은재(感恩斎)를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사랑채 감은재
이후 정조 때는 주재성에게 정려를 허하고 주도복에게 관직을 내렸기에, 종가의 대문에 충신과 효자 두 개의 정려, '충효쌍정려'가 나란히 걸렸다
대문 위에 걸려있는 충효쌍정려
'주씨 고가'로 다가서면 먼저 충신과 효자의 붉은 정려로 장식된 솟을대문을 만난다.
솟을 삼문
주씨 고가의 공간구성은 크게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살림집 구역, 불조묘가 있는 사당 구역, 그리고 무기연당이 있는 정원 등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인 감은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가운데 대청마루
마루 윗벽에 걸려있는 '감은재 중수기'
감은재 앞마당에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당인 불조묘가 있다. 안채는 살림집이어서 출입이 안된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과 일자형 안채
감은재 맞은편에 작은 일각문인 한루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긴 장방형의 연못, 무기연당이 나타난다
무기연당으로 들어가는 한루문
한루문을 들어서서 무기연당을 바라보니 생각보다 연못이 넓고, 큰 석가산과 노송 한 그루가 눈에 띈다.
연못 가운데 석가산, 왼쪽 하환정, 오른쪽 풍욕루
잔잔한 연못을 지긋이 바라 보면 금방 석가산의 기묘함과 하환정과 풍욕루의 운치에 빠져들게 된다
[출처] 함안 무기연당 & 기양서원|작성자 방석나무
하환정(何換亭)
지금의 무기연당은 방지방도로 조성된 못에 누정을 갖춘 전형적인 정원으로 그 중심에 하환정이 있고 그 뒤로 풍욕루가 있다.
연못과 하환정
하환정의 '하환(何換)'은 "어찌 바꿀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무기연당을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중국 남송 때의 시 삼공불환(三公不换)에서 유래한 말로, 출세보다는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살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하환정, 뒤로 풍욕루
하환정은 무기연당 최초의 건물로 정원이 조성될 때부터 중심 공간이었다.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모습은 마치 기수의 강물을 떠다니는 한 조각 배로 보인다
풍욕루(風浴楼)
그 뒤의 풍욕루는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뜻으로 정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풍욕루
원래 주씨 일가의 한 사람이 무기연당을 견제하기 위해 담장 밖에 지었던 삼신당이었다 하는데, 그후 주재성의 4대손이 삼신당을 사들이고 풍욕루라 불렀다.
무기연당을 등지고 있던 풍욕루를 하환정을 바라보도록 고쳐 지은 후 정원 안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가운데 대청마루
풍욕루 대청마루에는 경(敬)자 현판이 있는데, 이 '경'자는 백운동 소수서원 죽계천 계류의 '경'자 바위에 새긴 것과 비슷하다.
'경'자는 유회정 별업, 무릉마을의 무산서당 등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주씨 가문의 정원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글자이다
'경'자 현판
풍욕루로 인해 기존 하환정에서 끝났던 동선이 더 연장됐다.
하환정 뒤로 풍욕루
게다가 계단 옆에는 화석(火石)을 깎아 세웠고, 더 깊은 곳에는 짧은 섬돌을 배치했으며, 연못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는 탁영석을 놓아 정원을 감상하는 범위가 확장되었다
탁영석(濯缨石)과 목가산(木假山)
탁영석은 영양 서석지처럼 물이 불면 물속에 잠겼다가 물이 줄면 드러낸다. 마치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탁영은 탁청과 그 상징적인 의미가 비슷한데, 탁영석으로 인해 물가에 발을 담그는 여유와 즐거움이 있는 풍류의 공간이 됐다
또한 목가산은 주로 매화나무나 침향목 등의 줄기를 잘라 낸 나무 등걸로 마치 산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있다.
주위에 여러가지 풀을 심고 물을 적셔 안개가 피어나게 해서 신선 세계에 비유되곤 했다
풍욕루 앞 목가산
국담(菊潭)과 석가산(石假山)
무기연당의 연못은 국담이다. 유심히 보면 산석(山石)으로 쌓은 호안석축이다.
석축은 켜쌓기와 골쌓기의 2단으로 쌓아 견고하면서도 계단식이어서 편리하다.
풍욕루 앞에 계단과 섬돌
특이하게도 네 면의 석축 높낮이가 모두 다르다. 남쪽과 동쪽은 단 차이가 분명하여 시각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단 차이가 매우 심한 북쪽에는 하환정이 올라앉아 전망이 좋고, 출입하는 서쪽에는 단차가 거의 없어 연못으로 다가서기 쉽다.
특히, 하환정 모서리에는 층계를 두고 소나무 옆에는 탁영석을 두어 연못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계단길 밑에 섬돌
연못 가운데는 석가산이 있다. 처음에는 양심대(養心台)라 했다는데, 네모난 연못에 석가산도 네모나서 방지방도인 셈이다
석가산에는 봉황석, 납두석, 부석 등의 괴석이 있고, 백세청풍(百世清風)이라고 새겨진 괴석도 있다. 세상을 등지고 절의를 지킨 백이숙제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연못 가운데 석가산, 뒷쪽에 하환정과 풍욕루
석가산, 앞쪽 괴석에 백세청풍 글자
기양서원
연못 남쪽에는 원래 석축위에 꽃과 나무를 심은 화오가 있었다는데, 근래에 기양서원 사당인 충효사와 영정각이 들어섰다.
연못 남쪽 기양서원(사당, 영정각)
사당 충효사와 영정각
기양서원은 터만 남아있고, 입향조 주문보를 비롯 주세곤, 주명헌, 주재성(무기연당 조성), 주도복( 사랑채 건축)의 위패를 봉안한 충효사와 영정을 모신 영정각만 세워졌다
풍욕루와 멀리 서원 구역
기양서원 중건기념비
서원구역에도 괴석과 초화류가 보이고, 연못에는 지하수가 솟아나와 수원을 확보하며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있다.
지난 200여 년간 7대에 걸쳐 완성된 '무기연당'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이곳을 잘 표현한 글로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자그마하되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되 심심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우리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출처] 함안 무기연당 & 기양서원|작성자 방석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