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민성아, 이 독서통장은 아직은 니가 쓰기가 힘드니까 다음에 쓰자. 대신 좋은 책은 읽어두면 좋으니까 필독도서 50권은 읽고...만약 니가 50권 다 읽으면 상은 엄마가 상장 만들어서 줄게”
“좋아, 그럼 트로피는 내가 만들게”
어느 날 민성이가 학교에서 필독 도서 50권 안내문과 함께 독서 통장이란 것을 받아왔다. 민성이 말로는 50권을 다 읽고 이 통장을 쓰면 학기 말에 상을 준단다. 어떻게 하고 싶냐니까 자기도 열심히 읽어서 상을 받겠다 해서 그러라 했다.
그런데 책은 생각나는 대로 읽는데 독서통장은 쓰자 하니 나중에 할게 하며 미룬다. 나눠 쓰면 별 거 아니지만 몰아서 하려면 힘든 것을 아니 그냥 책 한 권 읽을 때마다 쓰면 좋으련만 민성이는 번번히 ‘다음에’ 라고만 한다. 사정이 이러니 나도 점점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이건 아이의 일이고 엄마는 아이가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는 일 정도로 그쳐야지 이렇게 먼저 나서면 안된다라고 머릿속으로는 알지만 늘 애가 타는 것은 나였다. 그러다가 어떻게 민성이와 드디어 독서통장을 쓰는 날이 왔다. 그런데 처음 제목 쓰는 것부터 엄청난 문제가 생겼다.
독서통장의 양식은 b4 용지를 반 접은 크기를 세로로 5칸 나누고 한 칸을 다시 가로로 5칸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한 칸 당 한 권의 책을 읽고 쓰라는 것인데 한 칸 크기가 초등학생 1학년 글자 크기로는 몇 글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다. ‘나카야 미와’ 가 쓴 ‘도토리 마을의 빵집’ 모두 13글자를 한 칸에 넣어야 하는데 ‘도’를 쓰자 칸이 반이나 차 버렸다. 처음 독서통장을 봤을 때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시 독서통장을 보니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 넣은 것 이상으로 이 좁은 칸에 뭔가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느낌이 받았다. 제목이야 그렇다 치지만 느낀 점은 어떻게 할 것인가? 느낌이라는 것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데 무슨 근거로 아이들의 느낌이 이런 좁은 칸에 들어갈거라고 생각했을까? 이 칸 크기에 맞추려면 책을 읽은 느낌은 결코 길면 안 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기보다 생각의 정도를 칸 크기에 강제로 맞춰야 하는구나. 프로테스크의 침대가 생각났다. 긴 내용을 짧게 줄여 나타내는 것은 상당히 높은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일이다. 높은 지적 수준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부담을 줄여 주려고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학년이 올라갈수록 폭넓은 사고나 다양한 생각을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지 않나?
나도 학교 있을 때 독서통장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써 오라 하면 애살 있는 아이들은 그 양식에 맞춰 곧잘 해 왔다. 날짜 쓰고 제목 쓰고 느낀 점 쓰고 부모님이나 선생님 확인 받고 ... 그런데 한 번도 그 양식이 아이들에게 맞는 것인지,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이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막연하게 책을 읽으면 좋지, 책을 읽고 간단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지. 독서상은 조금만 신경 쓰면 받을 수 있는데 안 하는 아이들은 게을러서 그렇지 이렇게만 생각했다.
민성이도 겨우 첫 글자 썼는데 반이 차 버린 칸을 보고 난감해 하고 있고 나는 나대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마 민성이만 이렇진 않을 것이다. 민성이가 뛰어난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아이는 되는데 생각해 보면 이제 겨우 한글 겨우 떼고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독서통장을 쓰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나도 몰랐듯이 어쩌면 담임선생님도 이 사태를 미처 모르고 계실거야.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선생님께 어떻게 이 일을 의논할까 고민이 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내 아이 상 받게 하려고 유난떠는 학부모처럼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엄청나게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민성이가 책 읽고 독서통장을 쓰려는데 아직 한글쓰기가 서툰 탓인지 칸이 너무 작아요. 책 제목에서 두 글자만 썼는데도 칸이 다 차버려서 어찌해야 할지요. 독서통장을 b4 정도에 확대 복사해야 다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답이 왔다.
<전체 통일해서 바꿀 수가 없어요>
순간 당황했다. 난 아이의 문제를 이야기 했는데 선생님의 답에는 아이가 없다. 업무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솔직히 화도 좀 났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시나?
<그럼 제목과 지은이 다 안 쓰고 한 두자만 써도 될까요? 좁은 칸에 막 스무 자씩 쓸 수가 없어요. T.T>
자꾸 트집 잡는 학부모로 보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부드러운 느낌이 들도록 이모티콘까지 써 가며 보냈다.
<ㅎㅎ 그럼 포스트잇 사용해서 덧붙이셔요~요령껏이요~ 독서통장으로 동학년 통일이라 안쓰면 나중에 상줄 때 곤란합니다.>
여기서 더 이상 이야기하면 우리 아이 상 받게 하려고 진상부리는 사람으로 보이겠다 싶었다. 어차피 상은 내 관심 밖에 일이었다. 아이를 학교에 처음 입학시킨 부모들은 얼마나 학교에서 하는 거 하나 하나 신경쓰고 있겠노. 학교가 잘못된 게 아니고 우리 아이가 부족하구나 싶어 괜히 아이들하고 신경전 벌이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 선생님은 문제의 본질은 모르고 자꾸 상 받으려면 알아서 요령껏 양식에 맞춰라 이야기한 하고 있으니 답답했다.
<포스트잇이 독서통장 두께만 해질 듯 해서 잘 생각해 봐야 겠어요. 글자 크기 조절이 안 되어 포기할수도 ㅎㅎㅎ 어제 한 글자 쓰고 허걱했네요. 다들 어찌 쓰고 있는 것인지...어쨌든 학년 통일의 중요성 잘 알아서 선생님 말씀 이해가 갑니다. 바쁘신데 친절히 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민성이가 쓴 글자가 얼마나 큰지 사진으로 찍어서 같이 보냈다.
보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괜히 나섰나 싶기도 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문의이자 건의사항인데 가슴이 이리 떨리고 마음이 불편하니 평소에 다른 사람들은 학교에 얼마나 말 못하고 지냈겠다 싶기도 했다. 학교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시하면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될 것을 진상부린다’고 험담했던 예전 동학년 분위기도 생각났다. 그렇지만 학부모들이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야 일학년에게 맞지 않는 이런 양식이 바뀌지 않을까.
문자를 다 주고 받고 민성이에게 독서통장을 쓰기가 어려우니 다음에 쓰자고 했다. 상 받는 게 아쉬우면 필독도서 목록 책 다 읽으면 엄마가 상을 주겠다 하니 의외로 민성이도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 땐 필독도서 읽으면 좋겠지 싶었는데 지금은 그 생각도 바뀌었다.
필독도서 50권 중에 20권 정도는 이미 민성이와 내가 전에 같이 읽었던 책인데 굳이 다시 읽어야 하나? 아니면 예전에 읽었으니 읽은 셈 쳐야 하나? 이런 거 없어도 민성이는 민성이 나름대로 독서 스타일을 가지고 책을 잘 읽고 있는데 괜히 이런 걸 주니 신경이 쓰였던 내 모습도 부끄럽다. 민성이는 그림책보다 긴 줄거리를 가진 책을 더 좋아해서 미하엘 엔데의 소설집을 종종 들고 와 나보고 읽어달라고 한다. 혼자 읽고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1학년 필독서 목록에는 절대 엔데의 책은 올라오지 않겠지. 누가 무슨 기준으로 연령별 권장도서, 필독도서 목록을 만드는 것인가.
이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학급 밴드에 담임 선생님이 독서통장 잘 된 것을 사진으로 찍어 올렸는데 깜짝 놀랐다. 과연 누가 할까 싶었는데 아이들의 능력은 어른의 기대 이상인가 보다. 내 눈에는 거의 묘기 수준으로 느낀 점을 쓰고 책 제목을 써 놓았다. 이걸 보고 이 정도가 보통이라고 생각할까봐 왜 내가 걱정일까? 오늘은 밴드에 다시 독서 시상 관련 공지가 올라오니 열심히 하겠다는 학부모들의 댓글 8개가 보인다.
아이들 가르치는 교사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가 되어 보니 예전에는 당연하게 했던 일들이 달리 보여 답답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솔직히 독서통장 일은 아이들에게 폭력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 솔직한 내 느낌이다.
(5월 12일에 나눈 이야기를 기록해 둔 것을 6월 3일에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