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THIS IS TOTAL WAR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서양사 중세유럽 중세 유럽의 도시 발전사 - (1) 로마 쇠망부터 카롤링거 시대까지
Abliarsec 추천 0 조회 642 06.10.28 19:31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06.10.29 01:58

    첫댓글 안타까운 중세 초기의 서유럽의 모습이군요.

  • 06.10.29 03:20

    중세 초기에는 상업이 죽었다고 생각되지만, 나름대로 활발한 원거리무역(아이펠의 현무암-멧돌용)등이 있었고 특히 귀족들의 수효를 위한 무역으로 메로링거 왕조시대부터 Fos포와 마르세이유에 세관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뭐,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도시가 전부 전몰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 특히 6세기 잉글랜드 혹은 북부이탈리아에선 도시구조가 비교적 잘 유지됬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작성자 06.10.29 07:47

    이동준 // 이글에서는 상업의 흥망 여부가 도시의 발전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재어졌습니다. 메로링거 시대에서는 어느정도의 해상무역이 이루어졌지만, 카롤링거 시대에 들어와서 해상무역이 중단됨으로써 상업은 소수 고위층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되어 메로링거 시대와 비교하여 민간 상업 활동이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본문에도 있는 카롤링거 시대 교역품의 종류를 보면 활발한 무역이 있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확실히 메로빙거 시대에는 도시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롤링거 시대는 다릅니다. 카롤링거 시대 제도가 봉건화되고, 무역이 쇠퇴하자 도시는 몰락했습니다. 이때까지 활발했던 키비타스는 점점 인구가 줄어

  • 작성자 06.10.29 07:52

    들었죠. 결국 키비타스에는 주교와 성직자 그리고 이들 성직자들을 위한 시민들밖에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자급자족의 형태로 변화해간것이죠. 부르구스 역시 군사시설이었고 생산하거나 시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롤링거 시대에는 도시가 없었다고 보는것입니다.

  • 06.10.29 09:23

    도시로서의 정의를 내릴때 상업적,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왕국의 통지도시( 아헨, 파도바 등)과 무역도시 그리고 견본시(Messe), 일일시, 주간시 등이 형성되었고 8세기(744년) 종교회의 에서 좋은 도량형을 갖추고 올바른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것(legitimos foros et mensuras)은 주교의 의무로 정해지기까지 했습니다. 9세기 후반에 동프랑크왕국 국왕의 시장개설 전매권이 생긴것은 계속 생기는 시장의 통제와 시장개설 필요 욕구의 결과였습니다.

  • 06.10.29 09:28

    물론 이런것이 자치권을 갖고 독자적 상업활동을 한 중세시대의 도시와는 다른 모습이긴 해도 돕쉬(Dopsch)와 같은 '시저에서부터 칼 대제로 이어지는 유럽의 문화발전'을 지지하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도시로 본 중세유럽: 에디트 엔넨)

  • 작성자 06.10.29 11:33

    이동준 // 입장이 반대로군요. 본문에도 적은것과 같이 카롤링거 시대의 이런 현상은 상업의 쇠퇴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광범위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전문적인 상인은 물론 전문 제조업자도 사라졌습니다. 광범위한 시장이 없어 화폐의 유통이 한 지방에 정체되었고, 이것은 당시 통행세에 의존하던 국가 재정에 많은 어려움을 주게됩니다. 이로 인해 화폐제조권을 국가가 보유하지 못했고 시장이 열리는 지방에 그때그때 부여한것이죠. 화폐제조권이 이렇게 된 이유는 화폐 유통이 이뤄지지 않았기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