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8세기 말까지의 지중해 상업
-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교역로, 해상 운송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 노플, 에데사,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에서 직물
시리아에서 포도주와 올리브유 및 향료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에서 밀
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포도주
교역품을 로마로 가져오면서 제국의 상업은 번창했었습니다.
- 로마 말기의 게르만 족 칩입은 로마적 문명의 게르만화에 의의가 있습니다.
로마가 붕괴된 후 게르만족에게 문명전달의 역활을 맡았던 건 지중해 지방(이탈리아, 남프랑스, 스페인)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쇠망하였어도 제도의 일부는 게르만족에 의해 생존하게 됩니다.
시 참사회(decuriones)는 세부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법적, 행정적 권한을 가진 행정관들의 단체로 쇠망후에도 남아있게됩니다. 그밖에도 도시 수호자(defensor civitatis)와 공증된 증서를 기록하는 도시기록부(Gesta Municipalia)도 존재했습니다.
- 로마에 의해 건설된 도시들은 로마 쇠망후에도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각 도시는 농촌을 위한 시장이었고, 그 지역의 대 지주들이 겨울에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클로비스 시대 국왕과 대지주는 통행세(teloneum)를 받음으로 국가 재정을 늘렸습니다. 통행세 징수자들(telonearii)은 국왕의 가장 유용한 공무원들이었습니다.
클로비스 시대 많은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경제조직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일이 화폐를 계속 주조했는데 솔리두스(solidas), 트리엔스(triens), 데나리우스(denrias)를 주조하였습니다. 이중 솔리두스와 트리엔스는 금으로 주조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항구인 마르세유는 아직 지중해 동부와의 무역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세유로 귀중한 파피루스, 향료, 고급직물, 포도주, 올리브유가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로마가 쇠망한 후에도 로마 시대에 비해 쇠퇴했지만, 서유럽에서는 활발한 상업 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제 2장 9세기 상업의 쇠퇴
- 이슬람의 등장은 가느다랬던 동부 비잔틴제국과의 유대를 단절시켜버렸습니다.
이슬람의 칩입으로 지중해에 놓여있던 역사적 무게가 북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서유럽의 운명을 프랑크 왕국이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 역사에 새로운 장을 써야했고 메로빙거 시대와 카롤링거 시대는 종교적 감정, 정치, 문학, 제도, 언어, 서체 등 모든 분야에서 대조적으로 변해갑니다.
- 샤를마뉴가 로마황제 및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획득함으로서 이제 비잔틴 제국은 동방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이는 동방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상업의 중심지도 이젠 지중해 연안이 아닌 내륙지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폐쇄적인 국가 경제 체제를 낳아 상업의 쇠퇴를 불러일으킵니다.
- 상업은 남지중해의 이슬람, 북해의 바이킹들의 약탈로 상업의 쇠퇴가 가속화됩니다.
9세기 초 상업활동이 지속된 곳은 북부 갈리아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상업활동이라 볼수 있는 거래 폼목을 보면 포도주, 소금등과 같은 필수품과 불법적인 노예 매매(슬라브족 노예 사냥), 동방상품의 극소량의 거래가 고작이었습니다.
교환 경제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인 정규적, 정상적인 상업활동, 항상적,조직적인 교류, 전문적인 상인계층이 수행하는 교역행위는 카롤링거 시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 9세기 수많은 시장(mercatus)은 존재했으나 사실상 소규모 지방시장이었으며, 농촌의 식량을 그 지방 주민들에게 소매로 공급하는 역활만을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금화인 솔리두스와 트리엔스의 주조가 중단됩니다. 이것은 지중해 봉쇄로 화폐를 만들 금을 수입할수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금화가 쓰이지 않을만큼 경제활동이 축소된 것을 가리킵니다.
상업교류가 활발할수록 화폐제도가 통일되고 단순화됩니다. 하지만 루이 경건왕(Louis le Pieux, 재위 814 ~ 840 샤를마뉴의 아들)시대 화폐제조권이 수시로 시장이 개설될때마다 부여되었습니다.
- 재정적 취약성이 강했던 카롤링거 제국은 그 당시 사회적 지위로 인해 무보수로 봉사할수 있었던 귀족들을 관리로 등용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프랑크 제국의 본질적인 결함이었으며 제국 해채의 근본원인이 됩니다.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제국처럼 정교한 징세제도와 재정 통제수단, 집중화된 재정구조, 그리고 관리의 급료를 지급하고 공공사업을 추진하며 육, 해군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국고를 가지고 있었다면, 카롤링거 제국은 존속하였을것입니다.
이때부터 사회와 국가의 경제기반은 토지 소유자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 8세기에는 시 참사회원, 도시기록부, 도시수호자는 사라집니다.
- 대토지 소유자들은 팔수 없었기 때문에 팔지 않았고,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팔 수 없었습니다.
제 3장 키비타스와 부르구스
- 교회는 로마시대의 도시인 키비타스(civitas)의 경계를 기반으로 교구(diocese)의 경계를 정했습니다. 게르만족은 교회를 존중하였으므로 그들이 제국의 속주들을 점령한 이후에도 교회는 교회조직의 기반인 도시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키비타스의 지배자인 주교는 교회법규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 정주해야했습니다. 따라서 키비타스들은 상업이 쇠퇴한 이후 시민행정에서는 기능을 상실했을지라도 여전히 종교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 키비타스는 방어을 위해 성채로 지어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 있었던 성채의 형태는 카롤링거 시대에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탑들이 세워져있는 정방형 형태였으며, 통상 4개의 성문으로 외부와 통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벽을 둘러싸인 공안은 매우 좁아서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길이가 400 ~ 500미터를 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더구나 그것에는 건축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택들 사이에 경작지와 채원이 었었습니다. 메로빙거 시대에 성벽 너머로까지 확대해간 외곽지구( subrbinm 키비타스 바깥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지역 )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 9세기 무정부상태는 프랑크 왕국의 해체를 촉진시켰습니다.
자신들의 관할지역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기도 했던 대지주들은 당시 상황을 아용하여, 완전한 자치권을 차지했습니다. 곧 이어 그들의 관직을 세습화하고, 그들에게 위임된 공권력을 그들 자신의 영지에서 행사하는 사적인 권한과 결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인근 백령(comte)을 장악해 영역 제후령(principuute)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제후들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에 따른 의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의 소유가 된 토지와 신민들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9세기부터 도처에 요새지들이 축조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가장 일반적이고 기술적인 명칭은 부르구스(burgus)입니다.
- 부르구스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사료의 기술로 살펴볼수 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영역을 성벽으로 혹은 목재로된 울타리로 둘러싼 것으로서 형태는 대체로 원형이었고,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중심부에는 강력하게 요새화된 탑과 망루가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공격받았을 때 최후 방어 보루였습니다.
기사들로 구성된 주둔병들(milites castrenses)이 그곳에 항상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인근지역의 주민들 중 선발된 전투병들이 기사들과 교대하여 수비를 담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성주(castellanus)는 이런 병력을 지휘하였습니다.
- 부르구스는 무엇보다 군사시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원래의 군사적 기능에 행정중심지라는 기능이 덧붙여졌습니다. 성주는 기사들을 지휘하며 성주령(chatellenis)으로 불리우는 성벽 주위의 일정지역에 대한 재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성주령은 10세기부터 부여되었습니다. )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부르구스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변 농촌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입으로 살아갔고, 단순한 소비자의 역활외에는 어떠한 경제적 역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러므로 카롤링거 시대 '도시들'은 중세와 근대의 도시들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속성인 중산적 시민(population bougoisie)와 자치조직(organisation)이 없었습니다.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는 행정중심지였지 상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민수도 많지 않아 부르구스의 주민은 수백명, 키비타스의 주민도 2 ~ 3천명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카롤링거 시대에는 사회적 의미에서건 경제적의미에서, 법적 의미에서건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릴수 있습니다.
중세 초기에는 상업이 죽었다고 생각되지만, 나름대로 활발한 원거리무역(아이펠의 현무암-멧돌용)등이 있었고 특히 귀족들의 수효를 위한 무역으로 메로링거 왕조시대부터 Fos포와 마르세이유에 세관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뭐,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도시가 전부 전몰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 특히 6세기 잉글랜드 혹은 북부이탈리아에선 도시구조가 비교적 잘 유지됬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동준 // 이글에서는 상업의 흥망 여부가 도시의 발전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재어졌습니다. 메로링거 시대에서는 어느정도의 해상무역이 이루어졌지만, 카롤링거 시대에 들어와서 해상무역이 중단됨으로써 상업은 소수 고위층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되어 메로링거 시대와 비교하여 민간 상업 활동이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본문에도 있는 카롤링거 시대 교역품의 종류를 보면 활발한 무역이 있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확실히 메로빙거 시대에는 도시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롤링거 시대는 다릅니다. 카롤링거 시대 제도가 봉건화되고, 무역이 쇠퇴하자 도시는 몰락했습니다. 이때까지 활발했던 키비타스는 점점 인구가 줄어
도시로서의 정의를 내릴때 상업적,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왕국의 통지도시( 아헨, 파도바 등)과 무역도시 그리고 견본시(Messe), 일일시, 주간시 등이 형성되었고 8세기(744년) 종교회의 에서 좋은 도량형을 갖추고 올바른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것(legitimos foros et mensuras)은 주교의 의무로 정해지기까지 했습니다. 9세기 후반에 동프랑크왕국 국왕의 시장개설 전매권이 생긴것은 계속 생기는 시장의 통제와 시장개설 필요 욕구의 결과였습니다.
이동준 // 입장이 반대로군요. 본문에도 적은것과 같이 카롤링거 시대의 이런 현상은 상업의 쇠퇴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광범위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전문적인 상인은 물론 전문 제조업자도 사라졌습니다. 광범위한 시장이 없어 화폐의 유통이 한 지방에 정체되었고, 이것은 당시 통행세에 의존하던 국가 재정에 많은 어려움을 주게됩니다. 이로 인해 화폐제조권을 국가가 보유하지 못했고 시장이 열리는 지방에 그때그때 부여한것이죠. 화폐제조권이 이렇게 된 이유는 화폐 유통이 이뤄지지 않았기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안타까운 중세 초기의 서유럽의 모습이군요.
중세 초기에는 상업이 죽었다고 생각되지만, 나름대로 활발한 원거리무역(아이펠의 현무암-멧돌용)등이 있었고 특히 귀족들의 수효를 위한 무역으로 메로링거 왕조시대부터 Fos포와 마르세이유에 세관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뭐,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도시가 전부 전몰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 특히 6세기 잉글랜드 혹은 북부이탈리아에선 도시구조가 비교적 잘 유지됬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동준 // 이글에서는 상업의 흥망 여부가 도시의 발전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재어졌습니다. 메로링거 시대에서는 어느정도의 해상무역이 이루어졌지만, 카롤링거 시대에 들어와서 해상무역이 중단됨으로써 상업은 소수 고위층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되어 메로링거 시대와 비교하여 민간 상업 활동이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본문에도 있는 카롤링거 시대 교역품의 종류를 보면 활발한 무역이 있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확실히 메로빙거 시대에는 도시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롤링거 시대는 다릅니다. 카롤링거 시대 제도가 봉건화되고, 무역이 쇠퇴하자 도시는 몰락했습니다. 이때까지 활발했던 키비타스는 점점 인구가 줄어
들었죠. 결국 키비타스에는 주교와 성직자 그리고 이들 성직자들을 위한 시민들밖에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자급자족의 형태로 변화해간것이죠. 부르구스 역시 군사시설이었고 생산하거나 시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롤링거 시대에는 도시가 없었다고 보는것입니다.
도시로서의 정의를 내릴때 상업적,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왕국의 통지도시( 아헨, 파도바 등)과 무역도시 그리고 견본시(Messe), 일일시, 주간시 등이 형성되었고 8세기(744년) 종교회의 에서 좋은 도량형을 갖추고 올바른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것(legitimos foros et mensuras)은 주교의 의무로 정해지기까지 했습니다. 9세기 후반에 동프랑크왕국 국왕의 시장개설 전매권이 생긴것은 계속 생기는 시장의 통제와 시장개설 필요 욕구의 결과였습니다.
물론 이런것이 자치권을 갖고 독자적 상업활동을 한 중세시대의 도시와는 다른 모습이긴 해도 돕쉬(Dopsch)와 같은 '시저에서부터 칼 대제로 이어지는 유럽의 문화발전'을 지지하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도시로 본 중세유럽: 에디트 엔넨)
이동준 // 입장이 반대로군요. 본문에도 적은것과 같이 카롤링거 시대의 이런 현상은 상업의 쇠퇴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광범위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전문적인 상인은 물론 전문 제조업자도 사라졌습니다. 광범위한 시장이 없어 화폐의 유통이 한 지방에 정체되었고, 이것은 당시 통행세에 의존하던 국가 재정에 많은 어려움을 주게됩니다. 이로 인해 화폐제조권을 국가가 보유하지 못했고 시장이 열리는 지방에 그때그때 부여한것이죠. 화폐제조권이 이렇게 된 이유는 화폐 유통이 이뤄지지 않았기때문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