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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예루살렘 귀환
삼하 19:9-15
8b〇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11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14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15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삼하 19:9-15 / 이제는 이스라엘의 열 지파도 모두 다윗에게로 마음이 돌아서서 이렇게들 주장하였다. `본래 우리를 블레셋 족속과 모든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준 왕은 바로 다윗이다. 그런데 우리가 압살롬편을 들었기 때문에 그분이 압살롬을 피하여 이 나라를 떠나셨다. 10) 그러나 우리가 왕으로 세워 놓은 압살롬은 이미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이렇게 요구하였다. `이런 판국에 더 기다릴 것이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다윗왕을 다시 모셔 오지 않느냐?' 11) 북쪽의 이스라엘 열 지파가 모두 이렇게 주장하자 그 소문이 다윗왕에게도 전해졌다. 그러자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전하였다. `유다 지파의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내 말을 전하시오. `북쪽 지파에서도 이미 임금을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왜 유다 지파에서는 아직 그러한 생각을 못하고 있소? 12) 그대들이 바로 나의 동포요, 나의 골육지친인데 왜 임금을 궁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는 맨 나중 사람들이 될 작정이오?' 13) 그리고 압살롬을 섬겼던 아마사 장군에게는 이같이 내 말을 전하시오. `장군은 나와 골육지친이 아니오? 이제부터 나는 요압 대신에 장군을 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삼겠소! 내가 이 약속을 어긴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실 것이오.' 요압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다음,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왕에게 너무 당당한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다윗은 그를 밀어내고 아마사를 등용하였다. 14) 다윗은 이로써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자기 편으로 기울게 하였다. 그래서 온 유다 지파 사람들이 왕을 환영한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임금님께서는 신하와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어서 다시 돌아오소서!' 이제는 이스라엘 열 지파의 찬성과 유다 장로들의 결정에 의하여 유다의 정규군과 이스라엘의 정규군도 비로소 다윗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15) [원수들을 용서하는 다윗] 유다 지파에서 왕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전갈이 오자, 다윗은 곧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유다 사람들은 왕을 맞이하여 요단강을 건네 드리려고 요단강의 여울목에서 가장 가까운 길갈 성소에 와서 기다렸다. 그 여울목은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은 곳이었다.
반역을 진압한 다윗과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위하여 요단강 동편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도망하였더라(8b-10) 반역이 진압되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복위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지난 날 압살롬을 지지했던 자신들의 행동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의 복위의 타당성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지난날 이스라엘을 구하였던 다윗의 업적을 칭송합니다. 상황이 달라지자 왕 다윗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복위가 그리 쉬운 결정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압살롬을 따르는 무리들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삼하 17:24)이라고 한 반면에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든 백성’(삼하 15:17)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압살롬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반역의 불씨가 남아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다윗이 복위하기 위해서는 타당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명분은 바로 온 이스라엘의 전폭적인 지지인 것입니다.
왕이여 돌아오소서(11-15) 다윗은 유다 지파와의 교섭을 위하여서 당시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보내게 됩니다. 이는 다윗에게 유다 지파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전에 압살롬의 반역 때 유다 지파는 다윗보다는 압살롬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복위에 유다 지파를 적극적으로 가담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정치적 기반인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온 나라의 화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나라의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람들의 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확고한 통치기반을 다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직후 내분이 있었고(41-43), 또한 세바가 반란(20:1-22)을 일으킵니다. 또한 다윗은 요압의 무례한 행동(압살롬을 죽인 것, 다윗에게 직접적인 충고, 아브넬을 부당하게 죽인 것 등)으로 반란군 장군이었던 아마사를 요압장군 대신 등용하고자 합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판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유다 지파에 대한 다윗의 전략이 성공을 거둡니다. 유다 족속이 다윗 왕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들은 처음부터 다윗 왕권은 내부적으로 갈등을 안고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적 용 :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순간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한 적은 없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니 밤새 택배로 배달된 귀한 선물이 도착해 있습니다. 수신: 나, 발신: 천국 우체국, 내용물: 하루. “하루”라.. 상자를 여니 하루 분량의 시간과 각자에게 맞는 달란트와 움직여 섬길 수 있는 건강이 들어 있습니다. 그토록 많이 배달된 이 선물을 하루도 감사와 기쁨으로 꽃 피우지 못하고 불만과 짜증과 원망과 한숨으로 썩혀 버리고 맙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 선물상자는 매일 배달됩니다. 선물이 오는 동안의 하루하루는 영원한 나라와 연결되는 기회입니다. 편지에 답장하듯이 선물에 대한 각자의 반응은 천국을 얻을 수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대는 “하루”라는 선물을 오늘 어떻게 쓰실 건가요? -스펜서 존슨-
호크마 주석
=====19: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앝으매 - 고대 사회에서 성문(城門)은 매매, 행정, 집회 등의주무대였다(룻4:1,2 삼상 9:18 ;욥29:7 ;암 5:10, 12). 아울러 성문은 왕이 백성들과만나는 장소였으며 왕의 재판(裁判) 장소였다(15:2). 따라서 다윗 왕이 이곳(마하나임의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자신의 임무를 다시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사들을 치하 격려하고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의 올바른 깨우침을 볼수 있다. 즉 요압의 권고가 비륵 거칠고 무정한 점은 있었으나, 다윗 왕은 그 말의 옳음을 인정하고 요압의 권면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Keil). 그러나 결국 다윗의 이 같은 결단이 있기까지에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위로가있었을 것이다(시 40:17; 56:13). 실로 인간의 사정을 그 당사자보다 더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야 말로 진정 근심과 슬픔과 절망에 짖눌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대상 28:9; 잠 16:2,3).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 이 말은 왕 앞에서 군대의 개선 행진이 있었으며, 또한 승리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왕과 백성들 간에 즐거운 대면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Keil, Smith).
이스라엘은...도망하였더라 - 여기서 `이스라엘'은 압살롬의 반역에 참가했던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이들은 더 이상 저항할 명분과 기력을 상실하고 각자 뿔뿔이 후어져 자기 장막(처소)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라는 평화를 되찾고, 새로운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19: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 여기서 '이스라엘의 모든지파'는 유다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변론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둔'(* )은 `다투다', `정죄하다'는 뜻이다(창 15:14; 욥 36:31; 시 110:6; 전 6:10).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다윗 왕 복권의 지체(遲滯)에 대하여 서로를 책망하였다는 내용의 말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은 지난날 압살롬을 지지했던 자기들의 행동이 크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스스로 자각했기 때문이었다(Keil).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후 백성들이, 과거 다윗 왕이 자기들을 위해 세운 큰 공적을 회상하는 말이다. 즉, 다윗 왕의 순간적인 실수에 대한 반발과 압살롬의 수려한 외모에 반하여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했던 백성들이, 이제 상황이 달라지자 다윗 왕을 건체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했던 것이다.
=====19:10
무리가 기름을 부어...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는 공식적인 행사, 곧 기름 부음 받는 의식(儀式)이 분명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분명히 `이스라엘 온 무리'라 일컬었고, 다윗의 군사들을 `백성들'이라 일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ulpit Commentary). 또한 `다윗 왕이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다'고 한 9절의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무튼 압살롬의 공식적인 즉위식(卽位式)은 다윗 왕의 복권(復權)에 다소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다시말해서 다윗 왕이 복권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 선언이 그에게 또다시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윗 왕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예루살렘으로 곧 돌아가지 아니하고, 마하나임 성에 그대로 남아 백성들의 대대적인 지지선언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복권 이유로 압살롬의 전사(戰死)를 들고 있다. 즉, 그들이 지지했던 압살롬이 이제는 죽고 없으니, 다윗 왕을 복권시키자는 논리였다. 우리는 여기서 만일 압살롬이 살았더라면 그들이 압살롬을 계속 지지했을 것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R. Payne Smith). 따라서 다윗 왕을 복권시키자는 그들의 소리는 다분히 이해 타산적이며 현실적인 것이었다(Herzberg). 우리는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당시 백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한편에서는 지난날 압살롬을 지지했던 자기들의 과오를 인정함과 동시에 다윗 왕을 다시금 존경하면서 그의 복권을 주장하는 참신한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껏 압살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만 그가 죽었으므로 나라의 안정을 위해 다윗 왕의 복권을 주장한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들도 있었으며, 또는 이미 대세(大勢)가 다윗 왕에게로 기운것을 파악하고 재빨리 친(親) 다윗계로 처신하는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와같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다윗 왕에 대한 또 하나의 반란을 예상할수 있다(20:1-26).
=====19:11
다윗 왕이...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 이는 다윗 왕이 유다 지파와의 교섭을 위해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두 제사장, 곧 사독과 아비아달을 교섭의 실무자(實務者)로 임명하는 장면이다. 다윗 왕이 이처럼 유다 지파와의 교섭을 시도하게 된 동기는 다른 이스라엘 지파내에서 일어났던 다윗 왕의 복권 추진 움직임 때문이었다(9, 10절). 즉 만일 이스라엘 지파들만이 다윗 왕을 지지하는 가운데 그가 꼭 복권된다면, 다윗 왕과 유다 지파 사이는 대단히 소원(疏遠)한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유다 지파가 다윗 왕을 지지하지않을 경우, 다윗 왕을 복권시키겠다고 나선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그들의 왕을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성읍 으로 모실 위험성까지 있었던 것이다(Wycliffe Bible Commentary). 또한 다윗 왕은 자기가 이스라엘 지파들에 의해서만 복권될 경우,자기의 통치력이 심히 약화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Hertzberg). 왜하면 다윗 왕은 유다 지파출신으로서, 만일 타 지파에서 반란을 일으킬경우 그를 지지할 지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자신이 복권하는데 유다 지파도 적극 참여시킴으로써, 과거 압살롬의 반역을 주도했던 유다 지파의 죄를 용서하고 온 나라의 총화 단결을 도모하고자 했던것이다(Leon Wood).
유다 장로들 - 이들은 유다지파를 다윗 왕에게로 돌릴 수 있는 실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 이들이 압살롬의 반란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 다윗 왕이 복권된 후 자기들에게 미칠 후환(後患)을 우려하여 잠가코 있었던 것이다(R. Payne Smith).
=====19: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 여기서 다윗 왕은 자기가 유다 지파 출신이므로유다 지파 바로 그들이 자기의 복권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와 갈은 다윗 왕의 말은 자기를 반역한 유다 지파에 대해 유화정책적(宥和政策的)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제안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다윗 왕의 제안을 받아들인 유다 지파 다윗 왕의 복권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이 불평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40-43절).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스라엘은 세바(Sheba)의 난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골육'(骨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쳄 우바사르'(* ** )를 직역하면, `뼈와 살'(bone and flesh)이란 뜻이다. 이는 곧 피를 나눈 친척이나, 또는 자기 신체의 일부라 할 정도로 가까운 인간관계를 멎고 있는 자에게 사용되는 히브리 문학의 한 표현이다.
=====19:13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 압살롬의 군장(軍長)이었던 아마사(Amasa)는 실제로 다윗 왕의 조카였으며, 요압과는 사촌지간이었다(1717:25; 대상 22:16,17).
요압을 대신하여...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다윗 왕은 요압(Joab)을 축출하고 새로이 아마사를 자기의 군장으로 삼으려 한다. 이처럼 다윗 왕이 요압을 축출하려 한 이유는 요압에 대한 그의 좋지 못한 인상 때문이었다. 즉 요압은 다윗 왕이 죽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압살롬을 죽인 장본인이었으며(18:14), 또한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윗 왕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사납고 거친 비난을 서슴치않았던 자였고(5-7절; Hertzberg), 그리고 요압은 다윗 왕의 집권 초기에 사울의 군장 아브넬을 부당하게 죽인 난폭자였다(3:27, 39). 그러나 이러한 요압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 외에 또 다른 측면에서 다윗 왕은 아마사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즉 다윗 왕은 당시 반란군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모두 규합(糾合)하려고 하였던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로서, 다윗 왕은 아마사를 자기의 군장으로 삼음으로써 자기를 반역했던 모든 압살롬의 추종자들에게 자기는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던것이다(Payne).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아마사등용 정책은 불공평하고 현명치 못한 처사였다(Smith). 즉 다윗은 화합이라는 대전제 아래 무모한 관용과 앞뒤를 가늠하지 않은 결단함으로써 재난의 불씨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20:10). 특히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살해한 요압(4:14, 15)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있었다 하더라도 요압은 반란군 진압의 공헌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요압을 제쳐놓고 반역의 최일선에 섰던 자를 군대의 통솔자로 삼은 것은 다윗의 실수로 밖에 볼 수 없다. 즉 그때 다윗은 공의로운 통치 원리보다 인간의 이해를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거나 실수를 범하게 마련이다(마 26:69-75). 결국 이러한 다윗의 처사에 앙심을 품은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한 점(20:8-13)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의 다윗의 처사는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다고 판단된다(Keil, Wycliffe Bible Commentary).
=====19:14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재히 돌리게 히매 - 여기서 `돌리게 하매'의 주체는아마사나 대제사장들 (사독과콰 아비아달)이 아니라 바로 다윗 왕이다. 즉, 본 구절에서 저자는 유다 지파에 대한 다윗 왕의 지혜로운 정책(11,12절)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묘사하고있다(Keil, Lange).
=====19:15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급히 요단 강을 건널 때(17:22)와는 정반대의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권속과 승전한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 당당하게 요단 강에 이르렀다(F.R fay).
요단을 건 네려하여 - 이는 `다윗 왕을 호위하여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도록 하기 위하여'란 뜻이다(Keil). 길갈 엘리사의 길갈(왕하 2:1-4), 갈릴리에 있는 길갈(수12:23), 유다의 경계 지역에 있는 길갈(수 15:7), 에발 산 근처에 있는 길갈(신 11:30) 등이 있으나, 여기의 길갈은 여리고 근처, 곧 요단강가의 길갈을 의미 한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단을 긴넌 후 진을 치고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이다(수 4:19, 20절). 한편 이곳은 바로 요단 강가에 위치했으므로, 유다의 장로들이 다윗 왕을 맞 이하는 이 편리한 곳이었다(R.Payne. Smith).
< 설 교 >
백성의 이기심
사무엘하 19:9-10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도가 점차 하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인기도가 하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복잡하게 대통령의 지도력이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얘기는 다 접어 버리고 가장 간략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현 사회의 형편이 개인의 선(善.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은 자기 이익에 맞으면 찬성이고 맞지 않으면 반대입니다. 국민들의 관심은 현 사회가 자신이 생활하는데 얼마나 편한가에 있는 것이지 개인의 선과 연관 없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을 향한 마음도 항상 변덕입니다. 대통령이 내 놓는 정책이 당장 듣기에 좋을 때는 찬성하면서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반대해 버립니다.
옛날 왕정시대 때도 이 점은 동일합니다. 비록 백성이 선택하여 세운 왕은 아니라 할지라도 왕을 향한 마음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좋은 정책을 펼쳐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면 성군이라고 하면서 높였던 것입니다. 결국 왕이든 대통령이든 지도자를 향한 개인의 마음은 개인의 선(善. 이익)을 따라 항상 변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신앙의 세계 속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백성이 백성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신자가 신자의 이기심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복음에서는 멀어진 채 오직 개인의 선(善.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백성의 이기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하여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다윗의 울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요압은 왕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해 달라고 말합니다. 왕의 생명과 왕의 자식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해 줬더니 수고한 신복들을 위로하고 칭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반역자인 압살롬의 죽음으로 울며 슬퍼하는 다윗을 향해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이 압살롬을 죽임으로써 다윗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를 외면하고 있는 다윗을 향한 섭섭한 심기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요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9-10절의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압살롬 편에 있었던 백성들이 이제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오자는 의견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장을 보면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술수로 인해 다윗보다는 압살롬이 왕으로서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직 누가 더 자신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들이 왕을 택하는 기준은 자기 이익이었으며 결국 자신을 이롭게 해줄 것으로 여겼던 압살롬이 다윗의 군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다시 다윗의 편에 서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 한 사람을 향해 확고하게 세워져 있었다면 압살롬은 감히 반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압살롬을 잃고 애통해 하는 다윗의 울음에는 백성들의 반역도 한 몫 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압살롬의 죽음이 마치 자신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한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이 고통 받는 것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압살롬이 반역하고 다시 압살롬이 죽고 그로 인해 다윗이 애통해 하며 고통을 겪는 모든 일에 자신들이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않습니다. 즉 그 모든 것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압살롬은 다윗을 반역 했으니 죽어 마땅한 것으로만 여기고, 백성들이 왕으로 세운 왕이 없으니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 오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인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백성들은 다윗의 울음에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다윗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울게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그것이 진심으로 다윗 앞에 나오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저 ‘우리가 세운 압살롬이 죽었으니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윗을 이용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백성들을 우리가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하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들을 보면 아무리 파렴치하고 못된 짓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우리가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비판을 참고 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판 자체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의 처분을 묻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거기에 몰려있던 모든 사람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꽁무니를 뺄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분기가 등등하여 여인을 끌고 온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간음한 여인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판은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 자들의 몫일뿐입니다.
성경은 파렴치하고 참으로 악한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할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의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악한 자인가를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말씀에 머물러 있을 때는 필히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교제입니다.
백성들이 다윗의 울음이 자신들의 탓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추구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윗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은 변함없이 나의 왕이고 나는 그의 백성이라는 굳건한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누가 우리를 살게 좋게 해줄만한 왕인가에게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바로 백성들의 이와 같은 이기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모든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을 안다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님의 고통이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나로 인한 것임을 깊이 자각한다면 고통의 현장인 십자가 앞에 나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고통 앞에서 내가 당하는 고통을 말하면서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무작정 요구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온 것일까요?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온 것이라면 나로 인해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셨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음을 생각하며 나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섬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만약 이런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자연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이웃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익으로 인해서 이웃이 겪을 수 있는 피해와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웃에게는 짐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머리되신 교회이며 이러한 교회가 증거하는 것이 천국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꾸고 개혁이라는 것을 꾀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교회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인해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으로 인해 이웃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별로 관심도 없는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도록 했고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의 현장에 버젓이 서 있는 나의 모습은 보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나의 유익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지독한 이기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영생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은 자로서 여러분의 이기적인 입장에 서지 마시고 애매하게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예수님의 입장에서 ‘신앙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마음이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라는 애통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 나 좀 위로해 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라는 마음을 앞세운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이기적인 자기 입장에서만 예수님을 찾는 것일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으로 십자가를 아는 것도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님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을 찾게 되면, 결국 나를 위로해주고 나에게 도움이 될 듯하고 믿으면 유익이 생길 것 같은 예수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복음에 대해 기쁜 마음이 있을 수 없으며,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애통의 마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로서 복음으로 인한 기쁨과, 죄로 인한 애통이 없다면 분명 그것을 신자로 일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중요성을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편히 먹고 사는 것입니까?
요즘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어딜 가도 웰빙 문화, 웰빙 음식 등등 웰빙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웰빙’이라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삶을 누린다고 해도 유효기간은 분명 있습니다. 목숨이 끝나는 날, 아니 몸이 늙어가고 건강을 잃을 때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은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동행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계속되어질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비록 남보다 못 먹고 힘들게 산다고 해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 해도 나같은 죄인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 말로 영원한 행복과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기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십니다. 피 흘림이 누구로 인한 것인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왕이십니다. 비록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유익이 없다고 여겨진다고 해도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오셨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죄에서 건짐 받고 해방된 자로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이 마음이 넘치는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일석이조 꼭 정답은 아닙니다
삼하 19:9-15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다시 왕으로 추대하자는 백성들의 여론에 힘입어 다윗이 대제사장들을 앞세워 유다백성들을 독려하고 반대편을 포용하여 왕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입니다.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던 백성들은 다시 다윗 왕을 모셔야 한다는 변론을 합니다. 다윗은 유다의 장로들에게 왕을 모시는 일에 나중 되지 말라고 하며 아마샤를 군 지휘관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유다 지파가 왕을 모시려고 길갈로 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론, 유다 장로들을 압박하는 다윗, 군대장관으로 세워지는 아마샤, 다윗의 예루살렘 귀환 준비 등입니다.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 다윗이 두 제사장을 통하여 유다의 장로들에게 전한 것으로, 다윗 왕을 왕궁으로 모시는 일에 어찌 맨 나중이 되려느냐는 책망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복권 추진이 유다 지파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다 지파가 빠지고 그들 만에 의해 다윗이 복권된다면 여러 문제가 벌어집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우선, 다른 지파가 다윗을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모셔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제 3의 장소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으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지파에서 반란이 일어날 경우 자신을 지지할 지파가 없어 다윗은 또 한 번 실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다윗과 유다 지파가 영영 소원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통치력이 약해 질 수밖에 없으니, 지원 세력이 없어지기 때문이죠. 등등의 이유에서 다윗은 유다 지파에게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복권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이 있던 곳은 마하나임입니다. 압살롬의 난이 평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난처인 그곳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다른 왕 같았으면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복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분열된 국론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리더들의 지지와 많은 충신들의 도움이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갈라질 뻔한 내란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폅니다. 여론을 조성하는 것과 유다 장로들을 압박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하는 것과 그리고 군사 조직을 개편하는 것 등입니다. 특별히 압살롬의 군대장관을 포용하여 반대세력을 끌어 들이는데 애를 씁니다. 모두 민심을 하나로 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함정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 다윗이 두 제사장을 통하여 아마사에게 전한 것으로, 맹세코 그를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아마사는 다윗 왕의 친 조카로, 요압과는 사촌지간입니다. 그 말은 요압 대신에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을 아마사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학자들의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우선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였건만 요압이 그것을 지키지 않고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할 때 찾아 와 격한 비난과 배신의 운을 띄우며 협박과 공갈조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요압의 거친 성품과 사나운 기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받아 들여 다윗의 반대 세력들을 규합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은 반란군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아마사를 기용함으로써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자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윗은 생각은 오판입니다. 그것은 곧장 실패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째 건 요압은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일등공신입니다. 그런 그에게 상도 없이 자리를 뺏는다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공정한 처사가 아닙니다. 결국 앙심을 품은 요압은 아마사를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일석이조가 빚은 불행으로,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정답도 아닙니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 잡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만한 효율도 없으니, 그래서 사람들이 환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따른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의 간과입니다. 기대심리가 빚은 허황된 욕심은 물론 성실한 삶의 자세가 경홀히 여겨질 수 있다는 폐단입니다. 어쩌다 그럴 순 있지만 매번 그럴 수 없으니, 그것에 따른 반대급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심보, 불로소득에 대한 갈망,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불평, 원망 등등입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사람을 타락케 만드는 요인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행운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땀 흘려 번 돈이 진짜 내 수입입니다. 그 외의 것은 사기요 절도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행운을 가져오는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성실, 정직, 자선, 배려, 이웃사랑 등등입니다. 그런 것들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나도 생각하여야 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 먼저 살고 보자는 세상입니다. 나도 살아야 하지만 남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라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가 아니라 더 많이 잡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진정 그런 사람이 환영받고 존경받고 사랑받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그토록 이웃사랑을 강조하셨다고 봅니다.
다윗의 복권
삼하 19: 9-15 / 푸른교회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9-10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 사람들이 다윗 왕의 복권에 대해 서로 논의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복권 문제를 다룬 이유를 압살롬의 죽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즉 그들이 기대했던 압살롬이 이제 죽고 없으니 다윗 왕을 복권시키자는 논리였습니다. 이는 압살롬이 살아 있었더라면 계속 그를 지지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분히 기회주의적이고도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압살롬을 적극 지지했던 유다 지파가 빠져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12절)하며 그들로 하여금 왕의 복권을 위해 나서도록 권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14절)하며 다윗의 귀환을 청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15절).
압살롬의 반란군 추격을 피해 급히 밤에 요단강을 건널 때(17:22)와는 정반대로 지금은 다윗이 자신의 신하들과 승리한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어두운 밤이 끝나고 새벽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겪었던 탄식과 슬픔, 분노의 감정들을 이제 다 흐르는 강물에 던지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하여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에 사람을 보내 굳었던 마음을 풀고 편협했던 심사를 넓히며 식었던 사랑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복권 문제를 이렇듯 무난하고도 아름답게 풀어낸 것입니다.
<적용>
-다윗은 어느 지파 출신이었을까요(12절)?
-다윗이 자기를 반역한 유다 지파에 유화정책을 쓴 이유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오(13절).
-다윗과 <아마사>(13절), <아마사>와 <요압>의 관계를 적어보십시오(17:25, 대상 22:16-17).
<기도>
주님, 마침내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다윗을 반역했던 유다 지파가 다윗의 복권을 지지했습니다. 다윗도 압살롬의 반역에 적극 개입했던 유다 지파의 죄를 묻지 않고 온 지파, 온 나라의 단결을 도모하고자 <너희는 다 내 형제요 내 골육이라>며 포용했습니다.
대의를 위해 큰 마음으로 모두를 용서하고 후환을 두려워했던 사람들까지도 다 끌어안았던 다윗의 통 큰 결단을 오늘 저희도 진지하게 살피며 배우게 해주시옵소서.
손익계산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삼하 19:9~15 / 묵상여행
9~10절 : 압살롬을 따르던 자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난다. 비록 그들이 압살롬을 기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세웠지만 이미 죽었으니 다시 다윗 왕을 모셔오자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전에 백성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변론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직 다윗을 반대하는 자들도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만약 다윗이 다시 왕으로 귀환하면 압살롬의 편에 선 자들에게 보복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각자 여러 가지 손익계산들이 분주한 상황이다.
11~13절 : 다윗 왕 재추대 움직임이 부산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유독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만이 침묵하고 있었다. 이는 유다지파가 압살롬의 모반에 앞장섰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유다지파 사람들에게 제사장을 보내어 같은 지파이고 골육인데 너희는 왜 가만히 있느냐고 나름대로 유화정책을 써서 그들에게 돌아올 명분을 준다.
이는 반란의 주동적인 역할을 했었던 유다 장로들을 포함하여 유다 지파 모든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하겠다는 다윗의 마음 표현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요압의 자리에 세우겠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학자들의 많은 의견이 있다.
우선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였건만 요압이 그것을 지키지 않고 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과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할 때 찾아와 격한 비난을 공갈조로 말했기 때문이다. 즉 요압의 거친 성품과 사나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받아 들여 다윗의 반대 세력들을 규합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은 반란군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다지파의 마음만이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한 자들에게 유화책이 된다.
14~15절 : 이런 유화 정책이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이 다윗의 환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사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된 이후 그 즉각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 스스로가 그의 환궁을 추진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것은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형태로서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많이 떠나 있었음을 다윗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묵상)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바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백성들 스스로가 그의 환궁을 추진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것은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형태로서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많이 떠나 있었음을 다윗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다윗이 유다지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유화정책을 쓰는데 특히 압살롬의 군대 장관인 아마사를 요압의 자리에 등용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록 요압이 거칠고 문제가 많지만, 다윗과 함께 수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장수가 아닌가? 다윗의 부탁을 정면으로 거절하고 압살롬을 죽였지만 그는 반란군을 진압한 일등공신이 아닌가?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다윗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결국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의 판단이기에 다윗이든 내 마음이든 다 자기의 유익을 계산하는 자들일 뿐이다.
오늘 다윗의 행보의 초점은 복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배신한 유다지파에 대해서도, 압살롬의 군대장관인 아마사에 대해서도 복수하지 않고 그들을 다 품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요압은 어떻게 되는가? 일등공신에게 상은 주지 못할망정 그 자리를 빼앗아 다른 이에게 준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억울한 일이 많이 생긴다.
요압은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해서 후에 아마사를 죽인다. 요압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정말 끝까지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에 발 빠른 자가 아닐 수 없다.
다윗의 마음과 요압의 마음이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인간적으로 나는 다윗보다 요압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심을 믿을 때 요압에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군대 장관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얻는 것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하지 않는 다윗의 그 큰 마음에 굳이 요압의 희생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요압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다윗의 태도에 대한 아쉬움도 없지는 않다.
유다지파와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다윗과 요압과 아마사......이들의 머릿속에 손익계산이 분주하게 돌아갈 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십자가를 통해 생명을 얻는 일-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심을 생각한다.
(묵상 기도)
주님, 인간들은 언제나 손익계산에 분주합니다.
복수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마음에도 계산이 있고
군 지휘관을 두고 요압과 아마사에게도 온갖 마음들이 들락날락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게 십자가를 주셨으니
저는 더 이상 이런 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왕으로서 환궁하는 것도 아니요,
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과 교제함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니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브살렐 / 삼하 19: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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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승리하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 오려고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어찌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는 다윗의 혈족이었음에도 가장 주도적으로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윗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삼하 19:11~12) 뿐만 아니라,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유다 지파 사람 아마사에게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삼하 19:13)
그러자 유다 지파의 온 마음이 다윗에게 기울었고, 다윗을 왕으로 다시 모시려고 길갈까지 마중 나왔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교회의 권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원수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먼저 화목의 손을 내밀어 끌어안아 주신 복음의 그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원수된 자의 죄악을 용서하고 먼저 화목의 손을 내밀어 끌어안는 것이 교회의 그 권세인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3~14)
다윗은 어떤 잘잘못도 따지지 않고, 먼저 화목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주님은 화목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의 어떤 잘잘못도 따지지 않으시고 그 십자가의 피로 화목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화목의 아름다운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5:18)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화목하기 원합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 오직 사랑으로 화목하기 원합니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3) 아멘 아멘
다윗의 이상한 정책
삼하 19:9-15 / cjin001
압살롬의 반역은 실패했다. 그에 협조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고민한다. 다윗을 다시 왕으로 맞으려 한다. 다윗은 유다에 사람을 보내 질책한다. 이스라엘보다 먼저 자신을 맞으라 한다. 그들도 반역에 협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군의 장수 아마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고 한다. 이상한 정책이다. 다윗은 반역자를 자기 사령관으로 삼겠다며 맹세까지 했다.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왜 이런 황당한 정책을 발표했을까?
물론 그는 민족의 화합을 원한다. 빼앗긴 민심도 되찾아야 한다. 빨리 통일 이스라엘의 왕정을 회복하며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공의로운 판단이 빠진 유화정책이 아닌가? 정의가 실종되지 않았나? 반군을 진압한 부하들보다 죄인을 높인 것이다. 반군의 지도자인 아마사는 오히려 벌을 내려야 하지 않는가? 용서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사령관으로 세우겠다고? 우리도 해방 후 친일파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지 않은가? 사실 다윗은 반역으로 인한 고통의 당사자다. 왕위에서 쫓겨나 온갖 수모를 당했다. 그 모욕과 아픔을 잊은 것일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상식이 아니라 할례받은 자의 선민의식으로 무장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자아의식이다. 그는 자기가 당한 손해와 고통, 혹은 이익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는 반군도 할례받은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다. 그들도 주께서 용서하시면 회복될 수 있다. 그런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다윗의 이런 관점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예표하는 것이 아닐까?
사도 바울도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며 죽였다. 하나님은 그 죄인을 돌이켜 십자가 복음의 일꾼으로 쓰셨다. 반역자는 혹독한 징벌과 함께 제거해야 한다고 세상은 믿는다. 그러나 다윗은 세상의 정치가도 재판장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순종하는 사람이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편으로 주께서 주신 마음을 전하고 있다. 세상의 입장에서는 비합리적이며 황당한 정책이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세상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실 수 있다. 세상의 인과론, 성취와 보상의 법칙만을 따른다면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윗을 통해 세상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공의와 사랑의 접점은 어디일까? 은혜의 원리로 주어진 십자가가 유일한 답이 아닌가? 판단과 정죄, 구원과 심판은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하며 영원한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주권이 오직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모든 죄를 사하시며 기억하지 않겠다 말씀하신 것은 상번제의 완성, 즉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악에 빠졌던 바울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사랑과 은혜의 길에 오른 것을 기억하며 사람에 대한 정죄와 증오의 마음을 버리기 원합니다. 주는 어떤 악인도 구원하시며 천국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도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 안에서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없는 좋은 계획은 없다
.삼하 19:9~15 / js9191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삼하 19:9)"
'각자도생, 각자도생이라는 말은 각자가 스스로 살길을 모색한다는 뜻으로,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위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궁리합니다. 반대로 기회를 만나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회를 어떻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적용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전해주시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함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당장 내 눈 앞의 현실을 보고, 나의 생각과 계획을 의지하지 말아야합니다. 압살롬이 죽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회로 여겼습니다.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가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북쪽의 이스라엘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을 따르던 그들은 재빠르게 다윗의 세력에 편승하려 하였습니다. 다윗왕이 자신들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다윗을 칭송합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한 왕이었는데 압살롬을 피해 나갔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기름부었던 압살롬이 죽었으니 빨리 다윗을 다시 모셔 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10) 이렇게 북쪽의 이스라엘 지파에서 다윗을 땡겨 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윗은 다윗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시켜 유다지파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권력 앞에 이랬다저랬다 하는 이스라엘지파들이 아닌 유다지파를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지파와 다윗은 당장 내 눈 앞의 현실을 보고,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상활들 앞에서 내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우리의 모든 선택과 계획에는 항상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다윗의 계획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다윗의 깜짝 놀랄만한 책략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자신의 충복 요압 대신 아마사를 지휘관으로 등용하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바로 옆에서 전쟁을 수행했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것이 바로 요압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그의 폭력성이 자주 엿보이게 되자 다윗은 요압을 견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요압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자신의 명을 어기고 그를 죽인 장본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다윗은 요압 대신 아마사를 등용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또한 다윗의 고육지책에 불과했습니다. 아마사도 어찌되었건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당장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기울게 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방법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이러한 선택과 계획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다윗이 스스로 뿌듯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북쪽의 사람들도 자신을 원하게 되었고, 눈엣가시였던 요압을 대신 할 사람도 세웠고, 유다 족속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좋은 계획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계획에는 항상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 무언가를 선택하고, 계획하실 때 꼭 하나님께 먼저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당장 내 눈 앞의 현실을 보고, 나의 생각과 계획을 의지하지 않게 하소서.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통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또한 인도하고 계심을 신뢰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 되어 주시고, 중심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정체성, 하나님은 내 인생의 주인 되어 주시고, 중심이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틈을 주십시오
삼하 19:9~15 / 김종호목사
도망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논쟁을 한다.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했고 블레셋에서도 구했지만 압살롬을 피해서 나라를 떠나계시고 압살롬은 이미 죽었다.
어찌하여 다윗 왕을 다시 모셔오지 않는가?하는 논쟁이다.
이때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하여 유다장로들에게 기별한다.
형제요 골육인 유다지파에게 왕을 모시는 일에 나중 되지 말라고 한다.
또 압살롬의 군대지휘관이였던 아마사에게도 자리를 보장해 준다.
모든 유다 지파 사람들이 일제히 마음을 돌려서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블어 돌아 오소서 요청한다.
말씀묵상:
다윗 왕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압살롬을 죽이고 패배해서 도망가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더 이상 추격하면서 공격은 하지 않았나 보다. 이스라엘군은 모두 도망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9)
모든 지파들이 논쟁을 시작한다.(9)
논쟁의 내용은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했고 블레셋에서도 구했지만 압살롬을 피해서 나라를 떠났게시고 압살롬은 이미 죽었다. 어찌하여 다윗 왕을 다시 모셔오지 않는가?(9, 10)라는 주제이다.
말씀을 보면서 다윗은 참 신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고 덤벼 올 때에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슬쩍 예루살렘을 피해 주었고 피난민 신분으로 도망자 신세였지만 에브라임 숲에서 어쩔수 없이 한판 붙어서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서 요압에게 전사를 당했을 때 여세를 몰아서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다윗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힘은 있을때 조심하라고 했는데 바로 다윗이 이런 사람인 것 같다. 다윗이 가만히 있어도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는 논쟁이 일어난다.
구정물이 혼탁할 때에 가만히 두면 찌꺼기들이 가라앉고 물이 점차 맑아지듯이 압살롬에게 휘둘려서 기름부은 다윗 왕을 잘 못 알아보고 경거망동 했던 죄를 돌아보고 과거에 다윗왕이 어떻게 블레셋을 물리쳤고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었는지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제정신이 돌아 온 것 같다.
눈 앞에 이익을 쫓아 앞 뒤 생각없이 무조건 행동했던 마음들이 차분히 가라 앉고나니 자신에게 정말 필요했던 왕이 누구인지 눈에 들어 오기를 시작한 모양이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사이에 이런 논쟁이 붙을 때에 다윗도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를 않는다.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연락한다.
1. 유대 장로들에게 요청한다.(11)
다윗이 유다 지파이기 때문에 그래도 가까운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유다 지파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 왕이 돌아오면 잘못하면 국물도 없다.
내심으로 다윗 왕이 돌아 왔을 때에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유다 지파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윗이 먼저 요청한다.
너희는 내 형제요 골육인 유다지파에게 왕을 모시는 일에 나중 되지 말라고 한다.(12)
내가 먼저 손을 내 미는 것 중요하다.
상대는 마음에 있어도 잘못하면 보복을 당할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입장에 있을 수 있다. 이런 마음을 읽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먼저 다가가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멘.
2. 아마사에게 요청한다.(13)
아마사는 다윗 정권에 반기를 든 압살롬이 요압 대신에 세운 군대 장관이다.(삼하17:25)
압살롬의 최 측근중의 실세 측근이였던 자이다.
그러나 이도 알고 보면 요압과 마찬가지로 다윗과는 조카 사이가 된다.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인 아비갈과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 아마사이기 때문이다(17:25)
다윗은 이 아마사에게도 먼저 손을 내 민다.
너도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내 앞에서 군장 자리를 보장하겠다 한다.(13)
나 같으면 이런 아마사 같은 적의 장군은 당연히 목을 베야 할 것 같은데 다윗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와는 스케일 자체가 다른 것 같다.
이렇게 한 결과들이 놀랍다.
1. 모든 유다 지파 사람들이 일제히 마음을 돌려서
2.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블어 돌아 오소서 요청한다.(14)
괴씸한 놈들하고 칼을 들고 들어가서 진멸을 할 수도 있었다.
다윗은 블레셋과 아말렉, 에돔, 모암, 암몬, 그술등 이방을 칠 때에는 용서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민족 동족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인내와 관용으로 대하고 있다.
그 결과 저들의 마음을 얻었다.
왕권은 스스로 찬탈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져 지는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는것 군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잘 살필줄 아는 사람이길 기도한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다윗 왕의 겸손한 모습을 봅니다. 힘이 있음에도 절제하는 모습을 봅니다.
먼저 동족에게 손을 내밀고 적의 장군에게도 기회를 주고 관용과 용서로 먼저 나아가는 다윗 왕의 모습을 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게 하시고 내가 먼저 용서하게 하시고 내가 먼저 섬기게 하시고 내가 먼저 이해 할 수 있도록 성령님 나를 이끌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 마음을 잘 살필 줄 아는 통찰력을 부어 주옵소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로 주님의 마음 더욱 알게 하옵소서.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 해
삼하 19:9-15 / 하늘기쁨
오늘 본문은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1. 이스라엘의 화해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를 무찌른 이후 다윗은 그 기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갈만 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마하나임에 남아 화해를 모색하였습니다. 이전에 그가 기브온에 있고 이스보셋이 마하나임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전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대화로써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화해는 늘 싸움보다 더 낫습니다. 특히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압살롬을 왕으로 세운 사람들은 압살롬이 죽은 이후 왕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삼하 19: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유다를 뺀 나머지 11지파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윗이 그들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여 낸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지금 잘 살게 된 것은 다윗이 왕으로서 압제자들을 무찔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삼하 19: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압살롬을 좋아하여 그를 왕으로 세웠지만 그가 싸움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다윗 왕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다윗 왕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마하나임에 있으니 다시금 왕을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다윗이 자신들의 왕임을 선포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압장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화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압살롬 편에 섰던 사람들이 다윗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같은 하나님의 백성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해가 쉽지 않습니다. 화해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화해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주저함으로 화해의 시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를 생각해보면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단지 압살롬의 꼬임에 넘어가 그들이 압살롬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마땅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니 다윗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잘못하였기 때문에 먼저 나서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잘못하였기에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황에서 다른 움직임이 필요하였습니다.
2. 다윗의 화해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논의한 내용을 첩보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가 움직일 차례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삼하 19:11) '유다 장로들에게 이르기를...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뜻을 안 다윗은 자신의 편에 서 있던 대제사장들을 통해 유다 장로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유다 장로들에게 특별히 자신의 뜻을 전한 것은 유다 사람들이 더 망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압살롬이 기브온에서 반란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유다 사람들은 압살롬 반란의 최선봉에 섰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과 화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를 생각하여 쉽게 나서지 않고 있었기에 다윗은 그들에게 더욱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문제가 생긴 경우 보통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이 있는 사람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다윗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좋습니다. 손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내밀 수 있습니다. 내밀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화해를 원한다는 것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기 위한 실제적 제안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삼하 19:13) '아마사에게 이르기를...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아마사에게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아주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믿기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면서 확신을 주었습니다. 일시적으로 군대장관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군대 장관이 되는 것입니다. 변수가 생기기 전에는 아마사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진정성 있는 제안에 유다 지파 사람들은 의견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삼하 19:14)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에 하매'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다윗 지지파와 다윗 반대파가 나뉘어 있었는데 다윗의 제안을 듣고 이제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다윗을 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진정성 있는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전에는 분명히 반대파가 있었으나 다윗의 말에 의해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화해가 어렵지만 진정성 있는 말로 다가갈 때 한 마음이 되고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렵다고 말만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자세로 나가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해를 하면 참 좋습니다.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삼하 19:15)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하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서로 칼을 겨누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화해를 하니 멀리 요단강까지 나와서 맞이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싸우려면 싸울 이유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화해하려면 화해할 이유 또한 수없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화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인 사이의 문제라면 더욱더 화해해야 합니다.
신앙인 사이의 싸움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이겨도 무너진 상대방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상함이요 내가 져도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백성이 상함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신앙인의 피터지는 싸움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싸움이 아니라 늘 화해를 도모해야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따르던 사람들과 화해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화해정책을 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뭇거렸습니다. 유다 지파는 더욱더 많이 머뭇거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먼저 화해를 위해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다윗이 정직한 마음으로 화해를 시도하자 화해가 되었습니다. 화해는 쓸데 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얼굴을 웃게 합니다. 싸워서 내가 이기려 하지 말고 화해하여 모두가 이기는 세상을 만들어야 가야 합니다.
다윗의 화해 전략
삼하 19:9~15 / 새봄커뮤니티교회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놓고 통곡했던 것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다시 왕좌에 앉았습니다. 압살롬 반란은 이스라엘을 관통했고 국론분열(國論分裂)이라는 상처만 남겼습니다. 남쪽의 유다 지파와 북쪽의 열 지파가 서로 등졌습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압살롬 편은 "이스라엘 온 무리" (삼하 17:24)로, 다윗 편은 "그 백성" (삼하 15:17)으로 기록된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유다 지파도 만만치 않습니다. 유다 지파가 전적으로 다윗을 지지한 게 아닙니다. 상당한 수가 다윗 지지를 철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먼저 유다 지파의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9.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0.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9~10절)
압살롬이 죽고 반란이 진정되자 가장 먼저 북 이스라엘에서 다윗 복권논쟁(復權論爭)이 일어납니다. 9절에 "변론하여"라는 표현은 '서로 다투며 의견이 분분하다'는 뜻입니다. 압살롬이 죽자 북 이스라엘 진영의 의견이 갈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압살롬이 죽었으니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압살롬은 기름부어 세운 왕인데 어찌 다윗에게 왕권을 위임할 수 있겠냐고 했을 것입니다. 여론은 다윗을 왕으로 복권하자는 쪽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우세하다고 다윗을 왕으로 덥석 세울 순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두 가지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9절에 "그 땅에서 나가셨고"란 표현인데 이것은 다윗 왕권의 종식 선언을 말합니다. 왕권은 압살롬에게 있었지 다윗에게 주어진 게 아니었음을 말해 줍니다. 다른 하나는 10절에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이란 표현인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기름 부음 의식은 아주 중요한 공식 행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압살롬이 공식적인 기름 부음을 통해서 세워졌다는 것인데 압살롬이 죽었다고 해서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왕권을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이것이 섣불리 다윗을 왕으로 추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다윗은 북이스라엘의 여론이 요동을 치는 동안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는 고요합니다. 다윗은 우선 남쪽의 유다 지파 인심을 섭력(攝力)하고자 심열(心熱)을 기울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탁월한 지략이 나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1) 그 하나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특사로 보낸 일입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를 설득할 특사로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보냅니다. 왜 유다 지파를 설득해야 했을까?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유다 지파 전체가 다윗을 지지한 게 아닙니다. 정황상 다윗의 지지도는 상당히 낮았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압살롬 반란의 전초기지가 헤브론입니다. 헤브론은 다윗이 7년 반이나 남 유다의 수도로 삼았던 곳입니다. (삼하 2:4, 5:3~5) 이런 곳이 반란의 성지가 된 것은 그만큼 다윗이 유다 지파의 지지를 얻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아마도 다윗이 범죄함으로 지지를 철회한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혜롭습니다. 탁월한 정치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11.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12.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11~12절)
다윗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특사로 파견한 이유는 압살롬 반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첩보(諜報)를 제공했고 전령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그들은 다윗 지지의 핵심 인물입니다. 이제 사독과 아비아달은 유다 장로들의 지지를 끌어내야 합니다. 다윗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맡긴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북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 지지 선언을 했다는 점을 유다 지파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둘째는 유다 지파에게 "내 형제요 내 골육" (삼하 5:1)이라는 동질감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압살롬이 죽었지만 아직 입장 정리를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유다 지파를 설득해야 합니다.
(2) 다윗의 두번째 지략의 아마사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한 일입니다. 압살롬 반란에서 공을 세운 요압은 임명에서 탈락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13.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14.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13~14절)
아마사는 다윗의 누이 아비가일의 아들이자 조카입니다. 말 그대로 다윗의 골육입니다. (삼하 17:25, 대상 2:16~17) 왕의 안전을 위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이 왕을 호위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아마사를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사는 위험 인물입니다. 아마사는 압살롬 반란에 장관에 봉직한 자입니다. 지휘관 임명에 있어서 공을 세운 사람은 탈락되고 오히려 반란군에 있던 자를 임명한 셈입니다.
왜 다윗이 이토록 모험적인 임명을 한 것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 지파 안에서 다윗을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려는 시도입니다. 압살롬 반란군에서 봉직한 자는 처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직(要職)에 임명합니다. 이로써 유다 지파 내의 반(反) 다윗 세력을 회유(懷柔)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왜 요압을 지휘관 임명에서 탈락시켰을까요? 그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 입장에서는 요압도 위험 인물입니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요압은 다윗을 긴장시켰습니다. 우선 다윗의 명령도 없이 아브넬을 암살했는데 그때 다윗은 그를 저주했고 너무 강성(強性)이라고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삼하 5:39)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변개(變改)하여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게다가 왕권 안정을 위하여 드고아 여인을 고용하여 적대적인 다윗과 압살롬을 화해시킨 적도 있습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그를 죽이는데 눈도 꿈쩍하지 않았으며, 다윗이 통곡할 때 오히려 모진 말로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요압이 아주 불편한 존재였을 겁니다. 다윗이 아마사를 임명할 때 요압은 이렇다할 저항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항상 마음에 칼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훗날 아마사를 암살해 버립니다. 여하튼 아마사는 유다 지파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인물임에 분명합니다.
이제 다윗이 요단을 건너 길갈로 갑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15절)
요단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황급히 건넜던 강입니다. 이곳을 건널 때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삼하 17:22)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으로 강을 건넙니다. 특히 요단을 건너 길갈로 갑니다. 그곳에서 유다 지파가 다윗을 맞이합니다. 길갈은 각별한 지역입니다. 길갈은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은 장소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으로 복권하는 첫 지역이 길갈입니다. 길갈은 여호수아 시대에 요단을 건너 최초로 진쳤던 곳이기도 하고 가나안 정복의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수 4:19~20, 5:9~10, 9:6, 10:6) 더욱이 유다 지파의 북쪽 경계가 길갈이고 (수 15:7)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넌 기념으로 12개의 돌을 기념비로 세웠던 곳입니다. (수 4:1~8, 19:24) 길갈은 다윗이 남북 재통합을 위한 발걸음으로 어울리는 곳입니다.
나와 갈등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화해를 위해서 어떤 방법을 주로 사용하나요?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경험케 하소서. 아멘.
삼하 19:9-15
삼하 19:9-15 / 김순식목사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의 분쟁으로 야기된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그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와같은 일은 독재성을 띈 군국주의 국가에서 더 크게 나타납니다. 다윗 왕과 압살롬 부자 간의 전쟁에 있어서도 국민들은 어느 일면에서 보면 모든 피해의 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피해의 보상보다는 오히려 다윗의 환란 날에 그를 돕거나 따르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은전을 바라며 승자를 위한 축제를 준비하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 왕이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을 통하여 전쟁의 결과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가져다주는 가슴 아픈 인간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본문과 같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대
정치란 한사람 한 사람이 모인 국민 전체가 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지가 없는 왕은 위대한 왕이 될 수 없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1) 다윗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
압살롬의 반란에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습니다. 다스릴 백성이 없어진 다윗은 쓸쓸히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외로운 망명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히 죄악의 행위입니다. 비록 그들이 다윗 왕을 모반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사와 주권을 모반에 이용하도록 방관한 죄는 변명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압살롬에게 기름부은 백성들
기름부음은 특별한 명예와 특권의 상징입니다 (삼 24:6, 10 ; 대하 22:7 ; 시 23:5 ; 시 105:15). 따라서 이러한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의해서만 시행되어야 합니다 (삼상 10:1, 삼상 16:1). 그런데 이들은 기름부음 받은 왕 다윗을 저버리고 패역한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기름을 부어 '압살롬 왕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죄악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저버린 죄악이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죄악입니다.
3) 환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결과론적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모두 다윗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이들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결국 잃었던 왕좌를 되찾았습니다. 이때 이들은 과거 다윗왕의 공적을 생각하여 조속히 예루살렘 궁으로 환궁을 하도록 하는 축제에 대하여 논의 하였습니다. 결국 다윗은 한 때 범죄의 대가로 잃었던 왕좌는 물론이요 그의 백성들을 되찾았습니다. 다윗 왕을 향한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순간의 실수로 말미암은 자신들의 죄악을 보상하는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의사와 주권을 포기하여 타인이 행사하도록 한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자업 자득의 결과를 보면서 오늘 우리들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2. 다윗이 마음
다윗은 승자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살렘의 환궁에 대하여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며 잠잠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전쟁 자체가 다윗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집안 싸움이라는 점에서 볼 때 스스로 자중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인도하심을 바라고 있다는 두 가지 점에서 겸허함과 인내함의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1) 모든 백성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다윗
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청한 도움:예루살렘의 열 지파는 다윗의 환궁에 대한 일을 결정하였지만 유다 지파만은 아무 언급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들의 수고로 다윗의 친족인 유다 지파의 지지를 얻음으로 다윗은 거의 모든 백성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② 아마사에게 청한 도움:아마사는 다윗의 조카로 압살롬의 모반에 가담한 군장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를 다시금 등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던 모반의 무리에게까지도 다윗은 지지를 얻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2) 성취된 다윗의 목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다윗의 환궁을 위한 축제 그리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의 도움으로 얻은 유다 지파의 환영과 군장 아마사의 도움으로 얻은 남아 있는 반군들의 지지는 다윗이 의도한 모든 목적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지혜는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선을 추구하는 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항상 쓰임받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이 보여 준 것과 같이 신앙을 향한 선한 지혜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받는 성도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기도제목>
1. 주께서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인도하심을 바라며 겸손과 인내를 배우며 나아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소서.
2.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 부터도 칭송받는 그리스도인되게 하소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틈을 주십시오
삼하 19장 9절~15절 / 산호석목사
압살롬에게 기름 부었던 이스라엘이 이제 다윗 왕을 도로 모셔 와야 할 때라고 변론합니다. 다윗은 형제요 골육인 유다에게 왕을 모시는 일에 나중 되지 말라고 전합니다. 요압에 이어 아마사를 지휘관이 되게 하자 유다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고 길갈로 옵니다.
1. 다윗과 이스라엘 지파들 (9~10절)
지도자는 따르는 이들에게서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존경과 신뢰는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겪은 후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실정으로 백성이 등을 돌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바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마음을 돌려 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지파들이 지난날 주변 나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했던 다윗의 업적을 되새기며 그를 다시 왕으로 모시자고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지도자는 세워지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왕으로 세운 이들이 하나님과 백성임을 깨닫습니다.
* 묵상 질문
압살롬을 따랐던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이 승리하자 무엇을 걱정했을까요?
* 적용 질문
눈앞의 이익 때문에 관계를 저버리거나 배신당한 적이 있다면 어떤 교훈을 얻었나요?
2. 다윗의 귀환과 유다 지파 (11~15절)
회개는 용서를 가져오고, 용서는 화합을 이룹니다. 회개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용서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악을 행한 이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유다 지파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지만, 유다 지파가 압살롬의 편에 서자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에게 보복당할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먼저 유다 지파에게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통해 특별한 애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 압살롬의 군 지휘관을 맡았던 아마사에게도 자리를 보장해 줍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을 다시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이에 화답합니다. 용서는 반목과 질시를 무너뜨리고 사랑과 화합의 장을 이룹니다.
* 묵상 질문
다윗의 제안은 유다 지파에게 어떤 기회를 주었나요?
* 적용 질문
용서와 화합이 필요한 관계가 있다면, 어떻게 실마리를 푸는 것이 좋을까요?
오늘의 기도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질 때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통해 저를 깊고 넓은 겸손과 온유로 이끄실 주님! 이 고난 학교에서 참된 지도자의 수업을 끝까지 잘 받게 하소서.
신의 한 수(?)
삼하 19:9-15 / 정민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간 후 모든 이스라엘 지파 백성들은 다윗 왕의 환궁에 대해 변론한다. 그들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압살롬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다윗편에 섰던 사람들은 다윗이 성을 떠날 때 모두 그와 함께 요단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압살롬이 죽자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과 변론하고 있다. 일부는 그런 주장을 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반역에 가담했던 자신들이 무사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며 반대 의견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사람을 보내 유다 장로들을 설득하게 한다.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니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지 말라 한 것이다.
다윗이 골육임을 내세워 이리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과도 골육이었고 압살롬을 도와 반역을 일으킨 주범이었고 주축 세력이었다. 다윗은 먼저 골육임을 내세워 그들을 설득하고 있다.
아마샤도 마찬가지다. 그는 반역군의 군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그를 포섭하지 않으면 환궁이 어려워진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희생이 따를 것이다.
반역이 실패로 끝난 후 가장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 즉 반역에 가담한 핵심 인물들을 설득해서 포섭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쉽게 정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골육임을 내세워 그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이스보셋의 군 사령관인 아브넬을 환대하고 그의 제안을 수용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괜히 분쟁을 일으켜 전쟁을 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유익이기 때문이다.
정말 지혜로운 처사라 할 수 있다. 다윗이 유다 장로들을 설득하고 아마샤를 요압을 대신한 군 지휘관으로 세우겠다 한 것은 속된 말로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신의 한 수'를 두는 듯 하지만 정작 '신'이신 하나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점이다. 셈은 빨랐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께 묻거나 인도함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대단히 지혜로운 처사였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길은 결국 패망에 이를 뿐이다. 그 자체가 패망이다.
이로 인해 결국 유다 족속과 다른 이스라엘 족속 간에 분열이 일어났고 세바의 반역으로까지 이어졌다. 인간적인 지혜를 따르기 전에 늘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인간적인 방법과 계획을 버리고 오직 주의 인도하심에 반응하여 감사와 찬양으로 살게 하소서
삼하 19장 9-15절 / 복음생명선교회
주님,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하루를 시작합니다.
분주한 일정이지만 오늘은 비로 인해 조금은 여유 있는 아침을 맞이하네요.
오늘 하루도 주님이 베풀어 주신 것을 누리는 시간이 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먼저 죄와 부정함으로 더러워진 마음과 영혼을 주님 앞에 내어드립니다.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새 영과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며 주와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여행의 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주의 뜻을 깨닫고 성숙의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안전한 여행으로 인도해 주시고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함께 하시고 날마다 은혜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해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압살롬을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자기 집으로 도망하게 되었고 이에 남은 모든 백성들은 서로 변론하여 당시 상황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다.
그들은 다윗이 자신들은 이방 원수들의 손에서 구워했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했지만 압살롬을 피해 이스라엘 땅에서 나가고 자신들이 세운 압살롬은 전쟁에서 죽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세운 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임을 고백하면서 압살롬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 와야 함을 주장하며 이 일에 잠잠하고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런 백성들의 모습은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환궁을 서두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보내게 된다.
다윗은 유다 장로들에게 다윗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왕궁으로 모셔오자는 말이 들렸음을 제시하며 다윗을 다시 왕궁으로 모시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지를 물어보게 한다.
그리고 유다지파는 자신의 형제요 골육임을 제시하고 왕을 모셔오는 일이 미뤄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음을 전하게 한다.
또한 유다지파의 지휘관이요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사에게도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다윗은 아마사는 다윗의 친척이기에 요압 다음의 군 지휘관으로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돌아올 것을 제안한다.
다윗은 아마사가 요압을 견제할 인물로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반란군의 군장인 아마사를 영입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처사는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다윗의 계획은 요압이 아마사를 죽임으로써 틀어지게 되었고 요압이 반란군을 제압함으로써 요압의 위치는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게 된다.
여하튼 다윗의 이러한 제안과 노력은 결국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했으며 그들은 다윗에게 전갈을 보내어 다윗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환궁할 것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다윗이 왕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요단강에 이르게 되자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게 된다.
이러한 유다 족속의 모습은 다른 지파들과의 논의 없이 진행 된 것으로 결국 다른 지파들의 원성을 얻게 되고 다윗을 거부하는 반란군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의 묵상
요압의 강한 권고를 들었던 다윗이 다시 왕의 업무를 감당하게 되면서 다윗은 왕궁으로 돌아가는 일을 진행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백성들이 다윗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 지지부진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이자 이에 대한 책망과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기에 바로 궁으로 돌아와 자신이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도록 기다렸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임의적이고 충동적으로 행하지 않는 다윗의 신중함을 보여주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까지 기다리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과정에서는 다윗이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주목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지속적인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만들게 된다.
먼저 다윗은 유다의 장로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왕으로 모셔가도록 제안하고 자신의 친족이지만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던 장군 아마사를 요압 다음의 군지휘관으로 세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반란군의 장수를 아무런 징계 없이 수용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면에서도 옳은 일이 아니었다.
이런 다윗의 조치는 자신의 말도 듣지 않는 요압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는 말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였으며 다윗이 잘못하고 있다고 다윗을 찾아와 화를 내며 자신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엄포를 했던 사람이었다.
요압의 세력은 커지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자 이를 막기 위해 아마사를 세우려고 했으며 하나님의 공의보다 자신의 계획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압살롬은 사람의 방법과 계획으로 왕이 되었던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며 그 결과는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의 방법과 계획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 앞에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면 세상의 방법과 계획으로 살게 되고 인간적인 계산으로 행한 결과는 결코 선한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됨을 보여준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의 눈이 사람에게 중심을 두었을 때 그들은 다윗이 아닌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결국 압살롬을 왕으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압살롬의 죽음이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전쟁이었다.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긴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졌으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계획과 뜻은 결국 무어지고 사라지며 허무함으로 향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 가르침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죄와 타협하는 자리에 서게 한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이나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경고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들며 눈에 보이는대로 행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의 결과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는 것임을 경고했다.
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2:15~19)
하나님은 다윗이라 할지라도 그가 세운 인간적인 계획은 무너지게 하시고 불의와 타협한 모든 일은 분열과 분쟁으로 끝나게 만드심으로써 하나님의 계획만 온전히 서도록 만드신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계획,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이룰 수 없음을 철저히 가르치시는 모습이며 인생이 따라야 할 교훈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저하게 인생의 죄와 허물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순종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인생의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반역과 거부, 부인과 도망, 거짓과 불의의 타협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져오게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모든 불의와 죄악으로 인한 죽음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생명과 능력과 모든 권세를 부여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드러내셨다.
결국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께 어떤 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런 사람에게 생명과 능력, 온전함을 나눠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고백하게 하신다.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동일하며 하나님은 늘 신실하게 그의 백성들을 의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계신다.
오늘의 삶에서 사람은 불의와 거짓으로 살아가며 자기의 이익을 따라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만이 참 된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
여행의 일정에서 비는 늘 불평의 이유가 되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그 모든 불평이 온전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기회가 되도록 인도하신다.
주의 인도하심 가운데 오늘도 주와 동행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하고 주의 지체들도 주의 공의와 사랑에 감사하며 모든 상황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고백하며 사는 모습이 되길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다윗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대적들을 견제하기도 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무너지도록 만드십니다.
사람의 방법과 계획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견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임을 다시 고백하며 오직 주의 뜻만 기대하며 살도록 인도하옵소서.
주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에 순종하게 하셔서 주의 일에 동참하는 자 되길 소망합니다.
인간적인 계획과 생각을 버리는 삶이 되게 하시고 주의 공의와 사랑에 마음을 두게 하옵소서.
하루를 살아감도 주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겸손함으로 살게 하시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오늘의 모든 일정 가운데에도 함께 해 주시고 주님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날마다 은혜와 진리로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앞뒤가 동일한 사람
삼하 19:9-15 / leeapostle
이제 모든 것이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오자고 말하고 있다.
그에 대해 다윗 역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
다윗은 모든 부하들과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참 악하기 그지없다.
자신들이 압살롬을 따라 반역해놓고선 이제와서 다윗왕을 다시 찾고 있다.
아니 다시 찾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자기네가 언제 반역을 했냐는 식이다.
잘못을 했으면 반성을 하고 자신들의 죄악을 하나님께 자백하는게 우선이건만 그런건 안중에 없는듯 보인다.
나의 삶이 보인다.
앞과 뒤가 다른 내 모습...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척... 열심인 척... 순종하는 척...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맘대로 결정하고... 너무 피곤하다고 핑계대고... 책임감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그리고는 그런 것들은 한쪽 구석으로 미루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다시 자연스럽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아니다.
이래서는 안된다.
더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
다윗은 바로 이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다윗은 두 제사장을 통해 말함으로 모두를 품어주고 있다.
이스라엘을 품고 있고... 적장이었던 아마사를 품고 있다...
전쟁 이전의 모습이나 끝나고 난 이후의 모습이나 동일한 다윗의 모습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앞뒤가 동일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나에게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사랑... 공의... 긍휼... 선함... 거룩... 오래참음... 위로하심... 겸손... 이타적... 연합...
쫓는 척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자가 되고 싶다.
오늘 하루 만나게 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영향력이 흘러가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
삼하 19:9-15 / Samanju
목차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
사무엘하 19:9-15
1. 깨어진 그릇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2. 승리 뒤의 침묵, 깨어진 공동체의 민낯
3. 왕의 첫 번째 손길, 기다림과 초청
4. 가장 깊은 상처에 금을 채우다: 아마사의 등용
5. “그가 마음을 기울게 하셨다”, 보이지 않는 도공의 손길
6. 당신의 삶에 필요한 킨츠기
Q1. 관계가 깨졌을 때, 상대방이 전혀 변할 기미가 없는데도 저만 노력해야 하나요?
Q2. 다윗이 요압 대신 아마사를 세운 것은, 충성스러운 부하를 내친 비정한 결정이 아닌가요?
Q3. 용서는 알겠는데, 도저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깨어진 그릇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한 도공이 일생의 역작이 될 만한 완벽한 도자기를 구웠습니다. 그러나 잠시의 실수로 그만 손에서 미끄러져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깨어진 그릇은 다시 붙여도 자국이 남는다’는 속담처럼,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도공은 깨진 조각들을 정성껏 모아 옻칠로 이어 붙인 뒤, 그 상처의 흔적이 남은 균열 위를 금가루로 칠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상처의 흔적이었던 균열은 이제 그 그릇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황금빛 문양이 되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God Who Gathers Us Again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 A cinematic close-up of a master potter's hands carefully applying gold lacquer to the cracks of a beautifully shattered ceramic bowl. The golden lines run like rivers across the ceramic surface, making the repaired bowl more precious than the original. The lighting is warm and focused on the golden cracks. 도자기 장인의 손이, 아름답게 깨진 도자기 그릇의 균열에 금박 옻칠을 조심스럽게 바르는 모습을 영화처럼 클로즈업. 금빛 선들이 도자기 표면을 가로지르는 강물처럼 흘러, 수리된 그릇이 원래보다 더 귀하게 보임. 조명은 따뜻하고 금빛 균열에 집중됨.
일본의 전통 공예 기법인 ‘킨츠기(Kintsugi)’ 이야기입니다. 킨츠기는 상처를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깨어짐의 역사를 금으로 장식하여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승화시킵니다.
교회 공동체, 혹은 우리의 가정과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큰 위기는 관계가 깨어질 때입니다. 한번 생긴 균열은 좀처럼 아물지 않고, 서로를 향한 불신과 원망은 공동체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끝난 후, 다윗 왕국은 바로 이 산산조각 난 도자기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대적하고, 백성이 둘로 나뉘어 서로에게 칼을 겨눈 그 끔찍한 상처는 과연 회복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깨어진 공동체라는 절망 속에서, 상처의 흔적을 통해 더 위대한 회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킨츠기’ 기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 승리 뒤의 침묵, 깨어진 공동체의 민낯
압살롬은 죽었고, 반란은 끝났습니다. 다윗은 승리했지만, 그의 진영에는 승리의 환호 대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통곡 소리만 가득했습니다. 한편, 패배한 반란군은 어땠을까요? 압살롬의 편에 섰던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와 유다 지파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배신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승리한 다윗 왕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면 어떤 피의 숙청이 벌어질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 사이에서 변론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으로 기묘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으니, 왕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자”고 회개하는 대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합니다.
“압살롬 때문에 왕이 도망가서 어쩔 수 없었다”며 죽은 압살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 “이제 압살롬도 죽었으니 왕의 친족인 너희 유다 지파가 왕을 모셔와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유다 지파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 오직 정치적 셈법과 자기 변명만 가득한 상황. 이것이 바로 승리 뒤에 찾아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깨어진 민낯이었습니다. 공동체의 회복은커녕,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3. 왕의 첫 번째 손길, 기다림과 초청
승리한 왕 다윗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반역의 주동자들을 처단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하나임에 머물며 ‘기다렸습니다’. 반역했던 그의 백성, 특히 그의 혈육인 유다 지파가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밀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는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통해 유다 장로들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칼날 같은 위협이 아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을 모셔오자고 한다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맨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God Who Gathers Us Again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 King David is shown in his makeshift camp in Mahanaim, looking out towards Jerusalem in the distance. Instead of putting on armor, he is giving a sealed letter to a priest (Zadok), instructing him with a look of earnest compassion. He chooses diplomacy and grace over force. 마하나임의 임시 진영에 있는 다윗 왕이 멀리 예루살렘을 향해 밖을 내다보고 있음. 그는 갑옷을 입는 대신, 진지한 연민의 표정으로 제사장(사독)에게 봉인된 편지를 주며 지시하고 있음. 그는 무력 대신 외교와 은혜를 선택함.
이것은 왕의 명령이 아니라, 상처 입은 가족의 애틋한 호소였습니다. 반역자들을 향해 “너희는 내 원수”라고 말하는 대신 “너희는 내 뼈요 내 살붙이”라고 선언하며, 그들의 두려운 마음을 어루만지고 돌아올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힘으로 굴복시키는 대신, 사랑으로 초청하는 것. 이것이 깨어진 공동체를 향한 다윗의 첫 번째 ‘킨츠기’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심판자가 아닌 화해를 갈망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깨어진 조각들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4. 가장 깊은 상처에 금을 채우다: 아마사의 등용
다윗의 다음 행보는 더욱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는 반란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마사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이는 단순히 반역의 수장을 용서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충신이었던 요압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반역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을 앉히겠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제안이었습니다.
God Who Gathers Us Again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 In a tense throne room, King David stands before two generals. One is Joab, his loyal but fierce commander. The other is Amasa, the defeated rebel commander, looking fearful. David bypasses Joab and places a hand on Amasa's shoulder, offering him the position of commander, a shocking act of grace. 긴장감이 감도는 왕좌의 방, 다윗 왕이 두 명의 장군 앞에 서 있음. 한 명은 그의 충성스럽지만 사나운 지휘관 요압이고, 다른 한 명은 패배한 반란군 사령관으로 두려워하는 아마사임. 다윗은 요압을 지나쳐 아마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에게 지휘관 직책을 제안하는 충격적인 은혜의 행동을 보임.
이것이야말로 킨츠기 기법의 정수입니다. 깨어진 그릇의 가장 크고 깊은 균열, 즉 공동체의 배신과 분열을 상징하는 아마사라는 인물을, 숨기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군대 총사령관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힘으로써 그 상처를 공동체 회복의 중심으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이 결정은 유다 지파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반란군의 수장마저 나의 혈육으로 끌어안고 최고 직책을 맡겼으니, 너희 중에 용서받지 못할 자가 누구겠느냐?”. 다윗은 아마사에게 최고의 자리를 선물함으로써, 두려움에 떨던 모든 유다 백성의 마음을 얻고 진정한 연합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계산을 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는 다윗의 목자 된 마음에서 나온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5. “그가 마음을 기울게 하셨다”, 보이지 않는 도공의 손길
다윗의 이 놀라운 용서와 화해의 전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4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같이 기울게 하매…”
‘기울게 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숨겨진 주어는 바로 ‘그(He)’입니다. 문맥적으로는 다윗의 행동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지만,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그 마음을 궁극적으로 움직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깨어진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기다렸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진정한 화학적 결합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역사하사, 반역으로 굳어졌던 백성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이고 왕을 향해 돌아오도록 마음을 ‘기울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회복 사역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 즉 용서와 사랑의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을 통해 역사하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모든 회복의 과정 뒤에는,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으시는 위대한 도공,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6. 당신의 삶에 필요한 킨츠기
다윗의 이야기는 단순히 고대 왕국의 정치적 통합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한 반역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칼 대신 화해의 손을 먼저 내미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개역개정). 그리고 반역의 수장이었던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을 넘어, 당신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최고의 지위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깨어진 관계, 분열된 공동체의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윗의 선택을 기억해야 합니다.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먼저 기다려주고, 먼저 기도해주고,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 한 걸음 내디딜 때, 위대한 도공이신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서투른 순종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기울게 하시고, 우리의 깨어진 관계의 틈을 당신의 은혜라는 금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상처는 더 이상 아픔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더 깊고 아름다운 관계의 증표가 될 줄로 믿습니다.
Q1. 관계가 깨졌을 때, 상대방이 전혀 변할 기미가 없는데도 저만 노력해야 하나요?
A1. 다윗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행동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더 큰 그림을 보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었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닮은 용서와 사랑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결과, 즉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Q2. 다윗이 요압 대신 아마사를 세운 것은, 충성스러운 부하를 내친 비정한 결정이 아닌가요?
A2. 이 결정은 요압 개인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공동체 전체의 회복이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요압은 충성스러웠지만,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이는 등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통제 불가능한 면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와의 연합이라는 중요한 시점에, 요압의 강경한 성품이 오히려 회복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공동체 전체의 평화를 위해 개인적으로 뼈아픈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Q3. 용서는 알겠는데, 도저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3. 용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밉고 화가 나더라도, “하나님, 제 힘으로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용서하셨듯이, 저도 그를 용서하기로 결단합니다. 제 마음에 용서할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용서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를 선택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만지시고 미움의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붙잡는 기도
위대한 도공이신 하나님 아버지,
압살롬의 반역으로 산산조각 난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그 상처의 흔적을 통해 더 견고한 공동체를 세우시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감탄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배반했던 반역자였으나, 주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삶의 모든 관계 속에 다윗과 같은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옳음과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먼저 기다리고 먼저 손 내미는 용서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깨어진 관계의 틈들이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금으로 채워져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간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