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보고 어느 신문에다가 조인성이 눈에 힘주고 소리만 지른다고 투덜댔을 때였다. 당연히 그 팬들한테 “네 눈깔이 제대로 박힌 거냐”, “소지섭이 보낸 스파이냐”, “그 따위로 사니까 네가 애 딸린 이혼녀밖에 안되는 거다”, “63빌딩에서 뛰어내려라”등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 그래서 충격 먹은 건 아니었다. 얼마 뒤엔가,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조인성 보는 재미로 그 드라마 보신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던 것이다. “귀여워 죽겠어!” 하시면서, 말이다. 내가 모르는 게 있었구나! 배우가 꼭 연기로만 말하는 건 아닐 수 있겠구나! 연기든 외모든 보는 사람한테 ‘낙’을 준다면, 탓할 게 뭐냔 말이지, 라는 시각의 발견(근데 그렇게 험담한 효과가 있었던 덕인지, 요즘 CF에서 조인성의 표정 연기는 장난이 아니다. 다음 드라마에서는 어떨까 무지 기대된다).
그러니까 매력과 연기, 두 가지가 다 되면 좋겠지만 그 중 한 가지라도 보는 이에게 만족감을 준다면 용서가 된다는 얘기 되겠다. 근데, 그런가? 아무래도 매력은 시효가 짧으니까 기본 연기력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좋은 사람, 싫증 안 내고 오래 보고 싶으니까.
김남주나 고소영처럼 CF에 주력하는 게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면, 그런 생각 하는 시청자 관객 입장에서, 자기가 인정머리 없는 것 같아 괜히 죄스러워지지 않겠는가. 미디어 전문지에 방송평을 연재할 당시, 내가 그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경험이 있다. 지금은 아시아권에서 한류스타로 나름 활동하는 한 남자 연기자는 연기가 너무도 끔찍했다(류시원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그는 연기자보다는 사회자가 딱이다). 그는 인기 절정의 드라마 시리즈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그가 등장하는 신마다, 마치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할 때처럼 답답한 심정이 되곤 했다. 그가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의 상태로 장기입원해 있다가 다시 깨어난다는 설정이 있었는데, 내가 방송평에다가 ‘그대로 죽게 내버려두지 왜 그랬어, 나라면 주렁주렁 생명연장 호스들 일찌감치 제거했을 텐데’라는 요지의 악담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게끔 미리미리 연기력을 확보하라는 주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재능이 그렇듯이 연기력도 어느 정도는 타고 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는, 연기 잘하라는 채근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방송작가 김수현 선생은 어떻게 하면 대본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타고나야 한다”고 칼같이 잘라 말한다고 한다. 반면, 연기도 열심히 연습하면 하는 만큼 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매일 하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양희은 씨 말처럼, 연기도 매일 하다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까지는 늘어야 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문제는 정상이 아닌 배우들이 꽤 된다는 거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어색한 연기도 아주 오랜 세월을 그 상태로 지속할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해 계속해서 연기자 활동이 가능하다면, 그 자체가 예술 수준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 연배에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해 마땅한 나와 동갑인 어느 여배우(역시, 그게 장미희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어색한 연기의 대명사이자 대가인데, 그게 트레이드마크가 돼서 나름대로 보는 재미가 생겼다. 차인표도 꽤 오랜 세월, 그 귀족적인 혀짧은 발음을 고수하다 보니 이제 익숙해져서 그 자체가 매력이다. 안성기 씨는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절정을 찍고는 더 이상 연기가 늘지 않는 배우지만, 그 성실하고 모범적인 태도로 누구에게도 저항감 불러 일으키지 않는 국민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운 좋은 극소수에게나 가능한 얘길 테니 신인연기자들이 귀담아 들을 얘기는 못된다.
좌우당간 요즘 드라마 편수가 늘어나면서, 연기 못하는 연기자들도 공해 수준으로 늘어났다. 연기 못하는 배우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태도는 대개 이렇게 정리된다. 처음이면 용서한다. 두 번째는 참아준다. 세 번째는 의심한다. 네 번째는 화낸다.
그럼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참아주고 누구를 의심하고 누구한테 화내는가? 배우나 연기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서, 여기선 가장 보편인식에 가깝다고 믿는 내 주관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겠다. 동의하면 좋고 아님 말고다. 일반론은 재미 없으니깐 실명을 들어 사례연구 들어가시겠다는 말씀.
갓 데뷔한 신인한테 강부자 나문희 김지영 같은, 메릴 스트립도 놀라자빠질 연기력을 요구하면 심할테니, 그래서 ‘아, 오락프로그램 시절이 좋았어’, 소리가 절로 나오는 <해변으로 가요>의 전진, <슬픔이여, 안녕>의 김동완은 당분간 용서가 되겠다. 장동건처럼 얼굴 감상하면서 참아주다가 나중에 환호작약 동반한 연기대역전의 성공사례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신입사원>에서 귀여움의 절정을 선보인 에릭도 <불새>에서는 보기 조마조마하지 않았냐 말이다. 요즘 겹치기 출연이 잦은 한진희 아저씨도, 젊었을 때는 우리 어머니한테서 “얼굴 먹고 사네”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이혁재, 김영철, 문천식 같은 개그맨들은 정말 연기자보다 더 연기를 잘하는데. 그들이 꽃미남 아니라고 더 많은 출연기회를 얻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 예를 들어 <부모님 전상서>에서 김영철 연기와 대사 치는 걸 보란 말이지. 세상은 참 불공평한 곳이다.)
이제, 용서의 단계를 지나 참아주다가 어, 언제까지 그대로 버티려구? 의심 들게 만드는 명단의 대표선수 몇 명만 알아보자(‘아 임 쏘리.’ 당사자들은 절대로 이 기사를 읽지 마세요. 당신 인생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으니깐요. 그리고 읽은 사람들은 절대로 일러바치지 마세요. 저 맞아죽으면 안되는 소녀가장이니깐요.)
<그녀가 돌아왔다>의 김남진은, 에구에구, 한 번도 드라마에서 배역에 녹아든 적이 없다. 그냥 언제나 똑같이 억눌리고 긴장된 표정의 김남진일 뿐. 지금 같아서는 역할 모델을 차인표로 삼으면 인생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사처리는 안 돼도 좋다, 매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간성만 좋아다오. 그런데 연기가 못 미더워 그에게 목소리 까는 역만 맡기는 걸까 싶을 정도로, 맡는 배역마다 꿀꿀해서 그것도 어렵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차라리 넌센스 코미디에서 얼굴 긴장 푸는 연습부터 하고 오면 어떨까? 그 준수하고 개성적인 용모가 연기력을 만나면 드라마 물의 질이 얼마나 좋아지겠는가. 김남진은 차인표, 신현준 계보의,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굵직한 선과 독특한 개성을 지닌 외모로, 연기력만 갖추어진다면 우리 방송 영화 콘텐츠 산업의 보배가 될 수 있는 배우인데 말이다.
<변호사들>의 김성수 총각도, 그를 띄워주려는 스타 시스템의 노력이 안타까울 정도로 진도가 안 나가고 있는 것 같다. 같은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고 있는 김상경이나 추상미를 좀 보란 말이지. 드라마에 비해 배우가 아까울 정도잖느냔 말이다. 배우의 연기가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파리의 연인>을 보면 안다. 박신양과 김정은 아니었으면, 아무리 대본이 좋아도 그 런 시청률 못 나온다. 솔직히 박신양 외모가 그런 판타지 멜로에 딱이다 싶은 과(科)는 아니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 일단 입을 열면 말이 되니까 그 나이에도 다들 가슴 설레게 하는 왕자가 될 수 있었던 거다.
뭐니뭐니 해도 배우 헐뜯기 작업의 항목을 분류할 때 맨 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혀 짧은 형’이다. <천국의 계단>때 시청자들이 권상우와 최지우 커플을 싸잡아 얼마나 놀려 먹었던가. 그렇지만 내 생각엔, 권상우는 꼭 근육이 아니라도 표정의 카리스마가 있어서, 짧은 혀만 빼면 모든 게 용서가 되고, 나아가 배우로서 장수할 것으로 사료되며 미래가 심히 기대된다. 그리고 최지우는 혀가 짧아도 이자벨 아자니를 닮아서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당분간, 그러니까 ‘지우히메’가 젊은 이자벨 아자니의 매력을 유지할 때까지만(일본 사람들이 한국어 못 알아듣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조만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도 장차 몇몇 선배 여배우처럼 CF로 연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박근형, 최불암 같은 연기의 대가들이 연기 못하는 젊은 것들에 대해 한말씀 하셨다고 들었다. 그건 젊은 것들 자체에 대한 발언이라기보다, 얼굴과 이름값에 연연해서 드라마 망쳐가면서 그런 배우들 쓰는 시스템에 대한 항변이라고 봐야 될 것 같다. 일리가 있는 것이, 요즘 드라마를 서핑하다 보면 “시청자를 모르모트(유식한 발음으로 ‘마멋’)로 아느냐”는 방송평의 클리셰가 그리울 정도의 형편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덕분에 여러 사람 헐뜯어서 한여름 무더위 스트레스도 풀고, 그 대가로 원고료까지 받아 챙기고 일석이조이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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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공감...드라마 재밌다고 해서 보는데 연기가 뭐지?싶어서 못보는 드라마가 한두개가 아냐 한편 볼때마다 영혼의 휴식이 필요한 드라마들
맞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씨원하다~!!!!!!!!!!!!!!1
크아... 사이다 한캔을 원샷하고 목이 아프도록 시원한 느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말못하겠다면서 다 했어 ㅋㅋㅋㅋ
고소영이 연기력에있어서 김남주랑 같이 언급될만한급인가...?
김남주 예전엔 진짜 연기 별로였음.
엄청나게 발전한거임.
이거 아주 예전기사 같음
현재 발연기스타들 이름이 없어서...
김성수 진심 미치겠다. 어떻게 저 나이 먹도록 연기하고 있으면서 제자리 걸음만 하는지. 발성이랑 호흡부터 다시 배웠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