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과 김성규, 그리고 그의 아들 김우진,
영산강 답사를 마친 뒤 들렀던 목포 문학관에서 의외의 인물 김성규를 만났다. 김우진의 아버지 김성규가 김개남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해탄에서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과 함께 몸을 던진 김우진과 그의 아버지 김성규, 조병갑이 해월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서광범이 전봉준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 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역사는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인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태인에서 동학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입암산 거쳐 순창으로 갔고 김개남은 회문산 아래 산내면 종성리 매부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 마을에 옛 친구 임병찬이 있었다. 그는 아전 출신이었고 그 근방의 부호였다. 임병찬이 아랫마을에 있는 김개남에게 자기가 있는 마을로 올라 오라고 한 뒤 전주 감영에 신고했다. 전라감사 이도재(李道栽)는 강화 수비병의 종군이었던 황헌주와 포교들을 보냈다.
김개남이 숨어 있던 집을 포위한 관군이 “어서 나와 포승줄을 받으라”라고 말하자 김개남은 측간에서 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다. 똥이나 누고 나가겠다.”하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
그를 잡아 갈 적에 그가 혹시 도술을 부릴지 모른다고,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손끝 발끝에 대꼬장이를 박았다고 한다.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가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즉결심판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효수당하여 고난에 찬 생애를 마감했다.
그 처형 상황을 황현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적 김개남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았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黃憲周)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모두 잡히지 않았다면 종성리에서 김개남을 만나 재기의 칼날을 갈았을 것이다. 김개남을 밀고한 임병찬은 훗날 면암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대마도까지 동행한다. 면암 최익현의 순절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후 다시 체포되었고, 1916년 5월 유배지 거제도에서 단식사하고 만다. 나라를 위한 마음은 똑 같았지만 나라를 위한 방법은 그렇게 달랐다.
김개남이 죽은 지 백 년이 넘은 1994년에야 전주 덕진공원에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추모비가 세워졌고, 그가 살았던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에 “김개남 장군이 살았던 옛터”라는 유허비와 가묘를 세웠다.
“지상 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기도는 비록 최고로 선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옥을 만들 뿐이다.”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 걸고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의 꿈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고, 동학을 유발했던 장본인 조병갑은 유배가 풀린 뒤 판사로 역사의 한복판에 다시 등장해서 1998년에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사는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광범이었다.
역사는 이렇듯 수많은 복선을 깔고서 세월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맺어진 우리들은 과연 어떤 인연들로 맺어진 인연들인가?
2022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