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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왜 남의 여잘 함부로 만져, 열받게.
패션쇼와 브랜드 오픈이 맞물려 진행되었기 때문에, 패션쇼 이후의 행사 일정 탓에 하루를 더 소비하고. 일요일 오후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인천 공항에 도착한 승현이었다.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며 헤어지고. 승현이 그녀의 차가 주차된 근처 주차장으로 향했다. 탁, 트렁크에 캐리어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지이이잉.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
" 여보세요. "
- 응, 여보.
응? 무슨 말이야, 승현이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면. 제운이란 또렷한 글씨가.
" 갑자기 무슨 여보야. "
- 누나가 여보세요.라고 했잖아요.
" 치이. "
- 잘 도착했어요? 내가 데리러 간다니까.
승현의 귀국 시간에 맞춰 데리러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제운이었지만. 어차피 주차되어 있는 제 쏘울 탓에 운전도 직접 해야했고, 무엇보다 함께 귀국하는 회사 사람들에게 둘 사이를 들켜봐야 좋을것이 없기에. 극구 사양한 승현이었다.
- 지금 오고 있어요?
" 이제 출발하려구. "
- 빨리 와요, 나 누나 기다리다 목 빠질거 같아.
그의 마중을 거절한 대신 오늘은 제운의 집에서 그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알았어, 빨리 갈게. 대답하는 것으로 그와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오랜만에 만난 제 영혼의 동반자 쏘울의 핸들 위로 두 손을 올려놓았는데. 빈 조수석 위에서 다시 한 번 요란하게 진동하는 그녀의 핸드폰. 승우의 전화였다. 승현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 전화를 받았다.
" 응, 승우야. "
- 누나. 누나 지금 도착했어?
" 그럼, 벌써 도착했지. 우리 승우는 어디야? "
- 어디긴, 누나 집이지. 집으로 바로 올거지?
기대감 어린 승우의 목소리. 어떡하지, 고민하며 잠시 뜸을 들인 승현이,
" 승우야, 누나 약속이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은데. "
난감함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지만.
- 집으로 바로 안 와? 그럼 저녁은?
" 저녁 식사 약속이라. 아마 저녁도 먹고 들어가야할것 같아. "
- 아, 안돼에. 나 누나랑 저녁 먹으려고 맛집까지 알아놨단 말야. 저녁 약속 취소하고 그냥 집에 오면 안돼?
평소답지 않게 보채는 승우의 목소리. 거의 3주동안 만나지 못한 탓인지 승우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제운의 약속을 거절하면. 마치 승우처럼 서운함 어릴 그의 목소리가 일주일 내내 그를 그렸던 승현의 마음만큼이나 애달플것만 같아, 잠시 고민하던 승현이 승우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 승우야, 그럼 저녁 먹지 말고 조금만 기다릴래?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집에 갈게. "
- 나 지금 배고픈데, 그냥 바로 집에 오면 안돼?
" 조금만 기다려, 누나 금방 갈게. 우쭈쭈, 알았지? "
- 칫. 알았어. 빨리 오기다?
" 알았어. "
툭, 전화를 끊은 승현이 제 핸드폰을 보며 미소지었다. 고집부리거나 보채지 않는 승우인데. 오늘따라 어린 애같이 구는 승우가 귀여워서 그녀의 입가가 예쁜 곡선을 만들었다.
그 시각, 제운의 집. 편안한 차림으로. 티비 앞에 앉은 두 사람 옆엔 빈 컵라면 쓰레기 두 개가 낮은 탑을 쌓았고. 성의 없이 찢겨진 과자봉지. 그리고 맥주 캔 하나와 작은 캔 콜라 하나가. 그 중 콜라의 주인인 승우가 톡. 가벼운 터치로 스피커 폰으로 연결했던 승현과의 통화를 끊자마자. 따악, 경쾌한 딱밤 소리와 함께. 그 딱밤에 머리가 뒤로 밀릴 정도로 충격 받은 승우의 이마는 붉어지고야 말았다.
" 아, 너무 해요. 어쨌든 밥은 나랑 먹는다고 했잖아요. "
" 어쨌든 우리 집으로 오기로 했으니까. "
빙글. 미소짓는 제운은 아마 맥주 캔의 주인일 것이다. 두 사람은 꽤 유치한 내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맞은 이마가 쓰라려서 울상을 지으며. 형이랑 먼저 약속이 있었으니까, 시작부터 불리했다느니. 투덜거리는 승우이지만. 흡사 단호박인줄, 꽤 단호한 얼굴로 묻는 제운.
" 아무리 억울해도, 아까 한 말은 지킬거지? "
" 아, 알았어요. 눈치껏 빠져줄게요. 대신 10시 이후엔 둘만 있는거 금지에요. 딱 10시까지 우리 누나 집으로 들여보내요, 알았죠? "
경고하듯 말하는 승우에게.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운이다. 그리고 승우가 귀엽다는 듯이, 제운이 승우의 뒷머리를 헝클어 놓으면 아, 정말 왜요. 딴에 성질내는 승우의 뾰로통한 얼굴에서 승현의 모습이 보여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제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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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어떻게 둘이… 같이 있어? "
놀란 눈으로 묻는 승현에게. 누나, 정말 배신이야. 볼멘 목소리의 승우. 툭, 그런 승우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제운이 승우에게 눈짓으로 현관문을 가르키면. 왠지 제운의 큰 키 탓에 제운과 비교하면 작기만한 170센티, 제 키가 짓눌려 작아지는 기분만 들어, 스윽, 제운의 팔에서 빠져나온 승우가 대답했다.
" 나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 누나는 제운 형이랑 저녁 먹고 와. "
어떻게 제운과 승우가 함께 있는 것인지. 아직도 멍 한 얼굴의 승현과 달리, 제 패딩 조끼를 입으며 나갈 채비를 하는 승우. 그런 승우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진 승현이 잠시만, 승우야. 그를 부르며, 같이 저녁이라도 먹고 친구들 만나러 가라며. 승우를 붙잡는데. 결국 제운이 한 손으로는 그런 승현을 끌어 당기고, 한 손으로는 승우의 어깨를 툭, 밀어버리고는 말하는 것이다.
" 다음에 보자, 승우야. "
" 알았어요, 시간이나 잘 지켜요. 누나, 그럼 나 갈게. 나중에 집에서 봐. "
" 아, 승우야 잠시만, "
그녀가 승우를 붙잡으려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감싼 제운의 한 팔 때문에 승현이 한 발자국도 채 옮기지 못한 탓에 그 사이, 쾅. 하고 현관문이 닫혀버렸다. 빙글, 제운 쪽으로 돌아보며.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하는 승현.
" 저렇게 보내면 어떡해. "
" 승우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
그리고 유치한 그의 질문. 3주만에 만난 승우이건만, 이렇게 보내버린게 미안해서 승현이 그의 질문에 대답도 않고 입술을 비죽이면. 대답할 때까지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는듯 승현의 허리를 두 팔으로 감싸며 여유롭게 웃기만 하는 그. 대답해줘요,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도 앙. 입술을 다무는 승현이라 오히려 그런 그녀를 제 품에 꼬옥 안아버리는 제운이다.
" 대답할 때까지 안 놓아줄텐데. "
그러면 그제서야 부끄러운듯 작은 승현의 목소리.
" 승우는, 승우는 동생이구… 당연히…, "
" 당연히? "
당연히 네가 더 좋아.라고 말하면 그 장난스런 얼굴로 미소지을 제운이 얄미워서. 승현이 그 나지막한 목소리 대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 세제 향인지, 그의 방에서 나는 옅은 허브향과 같은 시원한 향기가 그의 품에서 흩어졌다. 시원한 그의 향기가 기분 좋아서. 승현 역시도 제운을 두 팔으로 끌어안았다. 따뜻한 그의 온기가 승현을 감싸고. 잇지 않은 대답대신,
" …보고 싶었어. "
단지 일주일, 하지만 그 시간보다 더 길기만 했던 그리움이 쌓인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이면. 나도 그래요. 대답하는 제운의 따스한 손길이 승현을 천천히 토닥였다. 마지막으로 몸을 살짝, 당겨 쪽. 소리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배고프죠? 앉아서 쉬고 있을래요, 저녁 금방 준비할게. "
승현을 식탁 의자에 앉히고는, 냉장고에서 직접 재료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하는 제운. 얼굴 아래, 예쁜 꽃받침으로 그런 제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승현의 얼굴엔 처음 맛보게 될 그의 요리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승우와 함께 자신을 맞아주던 제운의 모습이 다시 생각났는지,
" 승우랑은 어떻게 같이 있었던 거야? "
호기심 어린 얼굴로 승현이 물으면. 탁탁, 규칙적인 칼질소리가 낮게 깔리고. 입가에 작은 웃음을 만드는 제운이 대답했다.
" 어제 승우한테 전화가 왔더라구요. "
" 승우가? "
" 응, 혼자 밥 먹기 싫다고 맛있는거 사달라길래. 밖에서 같이 점심 먹었어요. "
아주 어릴 땐, 낯가림이 심해서 걱정했던 승우였는데. 의외로 제운한텐 넉살좋은 승우라서 승현의 눈빛이 조금 의외라는듯 반짝였다. 마치 승우의 엄마라도 되는냥, 내 아이가 궁금한 극성맞은 엄마처럼. 제운에게 질문을 쏟는 승현.
" 같이 맛있는거 먹었어? 친구나 학교 얘기도 많이 해? 요샌 머리 좀 컸다고, 집에 와서 하는 얘기란게 다 내 걱정인거 있지? 아직도 쪼그만게. "
사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승현이 가장 작고 여려서. 제운은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관심을 듬뿍, 받은 승우에게 아주 약간의 질투가 어리긴 했지만. 보고 싶었어. 그 작은 목소리로 제 품에서 속삭였던 그녀였기에 이 작은 질투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예쁜 말투로 대답하는 제운.
"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어요. 친구나 학교 얘기도 곧잘 했는데, 친구도 많은것 같고 학교도 잘 다니는것 같아요. "
" 그래? 다행이다, 요즘엔 너무 공부만 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 "
제운의 대답에 승현이 안심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천천히, 제운의 뒷모습을 가득 담은 그녀의 눈동자.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운 씨, 운을 떼는 승현의 목소리.
" 제운 씨는 어땠어, 학교 다닐 때. 궁금해, 승우처럼 키도 작았지? "
" 아마 승우보단 키가 컸을걸요. "
고등학생인 제운은 어땠을까. 승현의 머리 속엔 제운이라곤 제 키보다 작고 연약했던 유리와. 그리고 그런 유리는 상상해낼 수 없을 정도로 키가 크고 한 팔으로도 그녀를 쏙 품에 가둘만큼 듬직한 지금의 제운의 모습밖에 없어서. 마치 유리와 제운 사이의 그 소년을. 승현은 잃어버린 것만같은 기분이었다.
" 친구도 많았어? "
" ……. "
" 학교는. 학교는 잘 다녔어? "
" 승우만큼 친구도 많았고, 학교도 잘 다녔어요. "
차분히 대답하는 저 말은 정말일까. 거짓말도 능숙하기만한 제운이란걸 이미 알고 있는 승현이므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제운의 뒷모습이 승현은 서운하기만 하다. 더 이상 물어보아도. 그의 대답은 같기만 할 것 같아서, 식탁 위로 포갠 두 팔에 얼굴을 기대는 승현의 표정은 뾰로통하기만 하다.
한참을 재잘대던 승현이 잠잠해지자, 빙글. 제운이 승현을 돌아보면 제운에겐 귀엽기만한 뾰로통한 그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승현. 그러면 스윽, 어느새 다가온 제운이 식탁 위로 한 손은 제 턱을 괴고. 나머지 한 손은 그녀의 속눈썹 언저리를 조심히 매만졌다. 그의 손길때문에 살짝, 감기는는 그녀의 눈매가 사랑스럽다.
" 이 표정이 정말 닮았더라구요. "
" 응? "
" 승우랑 누나요. 말투도, 표정도, 행동도 많이 닮은거 알아요? "
" 그래? "
" 어제 승우 너무 귀여워서 우리 집에서 재웠거든요. 누나도… 오늘 우리 집에서 재우고 싶은데. "
말하는 제운의 눈빛이 순간 묘해지더니. 부드럽게 손끝으로 승현의 볼을 훑는 그의 손길.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지나, 보드라운 귓볼에 닿는 그의 손가락. 조금만 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려고하면, 이렇게 그녀를 매만지는 애뜻한 그의 손길이 승현을 정신없게 해서 승현의 얼굴엔 금세 옅은 홍조가 어리고만다. 나즈막한 그의 목소리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여유롭게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와 달리, 열기 오른 얼굴이 창피한듯. 승현이 제 손등 위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 그런데, 그러면 나 승우한테 엄청 혼나겠죠? "
그러면 그제야 장난스런 그의 목소리. 살짝, 승현의 눈길이 다시금 제운을 향하면. 귀엽다는듯이. 그녀의 고운 눈썹을 부드럽게 훑는 그의 엄지 손가락. 그리고는 빙글, 다시 주방으로 돌아선 제운. 정말 미워할 수도 없게. 그녀를 향한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도 사랑스러움이 담겨 있으므로, 한번 더 그의 뒷모습을 품은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 역시도 제운을 향한 서운함보단 그를 향한 여린 애정이 가득 담기고야 말았다.
탁, 제운이 식탁 위로 파스타 두 접시를 내어놓았다. 그리고는 승현의 맞은편에 앉으며 먹어보라는듯이. 살짝, 고개를 기웃하며 미소짓는 그. 그러면 꽤 모양새 예쁜 제 앞의 요리 덕에 승현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더니, 포크로 한 입, 파스타를 가득 넣고는 오물오물 거렸다. 슥, 제운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가에 살짝, 묻은 파스타 소스를 훑어내고. 그의 손길에 찡긋.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크게 뜬 한 입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했으면서 척,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 맛있어요? "
제운의 물음에 여러번 고개를 끄덕이는 승현. 평소에도 입이 짧을 뿐더러. 지난주, 호텔에선 술병이 나서 스프도 한 술 제대로 못 뜨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렇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한 입 한 입, 넘기는 승현의 분홍빛 입술이 대견한 마음마저 드는 제운이었다.
승현은 그가 해 준 파스타가 정말 맛있기도 했고,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해 준 요리를 조금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가 건낸 한 접시를 싹싹, 모두 비워내니 배가 올챙이마냥 빵빵해졌다. 반면 제운은 젖병을 물린 아기 고양이의 배를 빵빵하게 채운 집사마냥 뿌듯한 얼굴.
" 평소에도 이렇게 잘 먹으면 얼마나 보기 좋아. "
" 그럼 매일 제운 씨가 요리 해주면 되지. "
" 지금, 프로포즈 하는 거예요? "
" 응? "
" 같이 살자고, 프로포즈 하는거 아니에요? "
아, 프로포즈라니. 제운의 그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두 눈만 깜빡이는 승현. 그 모습에 픽, 웃으며 식탁을 정돈하는 제운. 그가 승현의 파스타 접시를 눈짓으로 가르키면, 프로포즈 하는거 아니에요? 그 질문에 아직도 당황해서. 허둥대며 제 빈 접시를 제운에게 건내는 그녀이다. 그러다 승현의 검지 손가락에 파스타 소스가 조금 묻었는데. 한 손으로 그녀에게서 접시를 건내받은 제운이 톡, 다시 그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 승현의 손목을 살며시, 잡는 것이다.
부드럽게. 승현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제운이 살짝, 그녀의 검지 손가락에 뭍은 파스타 소스를 핥았다. 강아지마냥, 제 손을 핥는 제운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해서 승현이 다시금 제 쪽으로 손을 끌어 당겨보지만.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녀의 손가락을 스치는 야릇한 그 감촉에 움찔, 하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 반응하는 그녀가 귀여워서. 옅게 미소지은 제운이 살짝, 눈을 감으며 그녀의 검지 손가락에 입맞춤 하고. 손가락 위로 내린 따뜻한 그 입술에 그녀의 얼굴엔 금세 열기가 오르고야 말았다.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에 입맞추며. 천천히. 눈커풀을 들어올리는 그의 연갈빛 눈동자와 승현의 투명한 두 눈이 마주하고. 승현의 맑은 눈동자엔 그녀의 손가락에 키스하는 그의 모습이 가득담겼다. 그리고, 중저음의 목소리.
" 오늘 정말 보내기 싫다. 누나, 나랑 같이 살래요? "
붙잡았던 그 손에 깍지를 끼며, 묻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승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단지, 손가락 키스. 그리고 꽉 마주잡은 그의 손아귀에. 승현은 온 몸의 피가 빨리 돌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두 볼을 붉힌 승현이 고개를 끄덕일뻔 했지만. 탁, 풀리고야마는 그의 한 손. 깜짝, 정신을 차린 승현이 허전해진 제 한 손 탓에 잼잼. 맴을 돌고. 그런 승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태우듯. 빈 접시를 들고 빙글, 돌아가버리는 제운이었다.
아, 방금 나 무슨 말을 들은거지. 프로포즈? 프로포즈 였을까? 누나, 나랑 같이 살래요? 제운의 그 낮은 목소리가 마치 헛손질을 하던 그녀의 한 손처럼, 승현의 머리 속을 빙빙 맴돌았다. 그런 그녀와 달리 싯기를 정리하는 그의 뒷모습은 무덤덤하기만 해서 승현은 얼떨떨한 기분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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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옆자리의 제운을 기다리는 승현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제 그렇게, 온갖 끼를 부리며 사람의 혼을 쏙 빼놓고. 아무 일 없었단 사람처럼. 겨우 9시가 조금 늦은 시간이었는데 피곤하지 않냐며, 식사가 끝나자마자 승현을 집 앞에 고이 모셔준 제운이었기에. 오늘의 제운이 더욱 궁금한 승현이었다. 승현의 눈길이 몇 번이고 출입문을 향하던 그 때,
" 구 대리, 대한 쪽에 연락 해봤어? "
" 네, 연락은 해뒀구요. 현 제운씨가 아마 지금쯤 도착 했을 거예요. "
" 아, 나 미치겠네. 현 사원한테 연락 오는대로 나한테 바로 보고해. "
꽤 긴박한듯한 한 차장과 구 대리의 대화 내용. 그 속에 현 제운이란 단어 하나에, 승현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뒷 자리의 김 대리를 부르는데.
" 김 대리님, 혹시 무슨 문제 생겼어요? "
" 아, 수입 원단 통관에 문제가 생겨서. 현 제운씨가 포워딩 업체 쪽에 해결하러 갔을거야. "
통관 문제라면, 해결하는데 꽤 시간이 걸릴텐데. 모니터의 시간을 확인하면 야속하게도 겨우 9시 20분. 살짝, 사무실을 빠져나온 승현이 제운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제운의 목소리 대신 긴 신호음만이.
점심시간이 다다라서야 도착한 제운의 문자 한 통. 너무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어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 문자를 확인하는 승현의 눈빛엔 실망감이 깃든다. 사실. 누나, 나랑 같이 살래요? 제운의 그 한마디 덕에. 어젯밤 승현은 그와의 신혼 생활이라던가, 결혼이라던가, 하는 것들의 상상의 나래가 펼쳐져 한 숨도 채 이루지 못했을만큼. 그 한 마디를 건낸 제운의 속내가 궁금하기만 했다. 나만 혼자 또 오버하는건가, 아주, 그냥, 확 그 때 고개를 끄덕여버릴걸 그랬나. 아니, 차라리 정말 내가 그에게 프로포즈할까. 이렇게 온갖 고민을 하게 만들어놓고는. 전화도 한 통 없는 그가 정말 밉다.
새로운 프로젝트 탓에 퇴근 시간을 지나서까지도 디자인 회의가 이어졌다. 긴 출장의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았을뿐더러, 제운 덕에 잠을 설친 승현은 자꾸만 눈커풀이 아래로 쳐지는 느낌이었다. 지상이 그런 승현을 눈치챘는지,
" 잠시 쉬었다 하죠. "
짧은 휴식 시간을 선언하면. 피곤한듯. 두 손에 얼굴을 묻는 승현. 다른 사원들 역시도 뻐근한 목을 풀거나 기지개를 켜고 혹은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긴 회의에 대한 노곤함을 달래는듯 했다. 건조한 눈가가 뻑뻑해서 한참을 그렇게 두 손에 얼굴을 묻었던 승현이 안되겠는지. 화장실을 향하는데. 그 때, 복도에서 딱 마주친 지상.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지상을 지나치려는데. 슥, 걸음을 옮겨 그런 승현의 길을 막아서는 그. 무슨 일이냐는듯. 승현이 그런 지상을 올려다보면,
" 많이 피곤하지? "
뒷짐지고 있던 두 손에서 승현에게 건내는 커피 한 잔. 승현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커피였다. 승현이 잠시 망설이는듯 하자,
" 방금 휴게실에 있는 다른 직원들 한테도 주고 왔는데. "
반듯하게.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하며 말하는 지상의 단정한 목소리. 지상이 머뭇거리는 승현의 한 손에 커피를 쥐어주면, 따스한 그 감촉에 그가 건낸 커피 컵을 움켜쥐는 승현의 작은 손도.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대답하는 승현의 목소리도 귀엽다는듯. 승현의 머리를 헝클어 놓는 지상이었다.
" 회의 금방 끝날거야, 조금만 힘내자? "
싱긋 웃으며 말한 지상이 승현을 스쳐지나가고. 따뜻한 커피 컵을 두 손으로 움켜쥐는 승현이 다시 살짝, 고개를 들었을 땐. 언제부터인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본듯한 제운이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승현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루 내내, 그를 기다렸던 승현의 얼굴엔 예쁜 웃음이 걸리고.
" 제운 씨, 이제 오는거야? "
제 손에 따뜻한 커피가 들렸단 사실도 잊은 채, 들뜬 마음으로 그를 향해 달려간 승현. 찰랑이던 일회용 컵 속의 커피가 조금 흘러 승현의 한 손을 적시기도 했다. 쏙, 그녀의 한 손에서 그 컵을 빼내며.
" 우선 손 씻고 와요, 내가 들고 있을게. "
반가움이 깃든 그녀의 목소리완 달리, 작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차분한 목소리. 지금 제 손을 적신 커피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에게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은 승현이지만. 그 차분한 목소리에 결국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대답하고는 혹시나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화장실로 향하는 승현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승현이 화장실에서 다시 나왔을 때. 화장실 앞 벽, 가볍게 몸을 기대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제운.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 외근 탓인지 살짝 흩어진 앞머리 그 아래 수려한 얼굴선. 그리고 두어개 풀어진 셔츠 단추. 그런 그의 모습이 왠지 섹시하단 생각이 들어서 승현은 마치, 첫눈에 반한 소녀마냥 혼자 얼굴을 붉혔는데.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온 제운이 거의 끌어안다싶이 승현의 허리를 한 팔으로 감싸고, 그윽한 눈매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 제운 씨, 여기서 이러면, "
곤란한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와 달리. 사락, 그녀의 앞머리를 훑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 상냥한 그 손짓과는 달리, 건조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
" 왜 남의 여잘 함부로 만져, 열받게. "
왠지 화난듯한.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승현이 그를 향해 두 눈을 깜빡였다가도, 불안한듯 다시 주위를 훑은 그녀의 시선. 그러면 안되겠다는듯 그런 승현의 손목을 잡아끄는 제운의 발걸음은 남자 화장실으로. 억센 그의 손아귀에 이끌려 어느새 남자 화장실 한 칸으로 들어오게된 승현은 여전히 깜찍한 토끼마냥 놀란 얼굴인데. 슥, 좁기만한 그 공간의 구석 틈으로. 승현을 가두는 제운 때문에 그녀는 어찌할바를 몰라 정신이 없다.
" 저, 제운 씨, 누가 있으면 어떡해. "
" 아무도 없어요, 내가 아까 확인 했어. "
떨리는 목소리의 그녀와 달리 단호하기만한 제운의 목소리. 화장실이라는 아슬한 이 공간도, 그녀를 향해 내리깔린 그의 깊은 눈매도, 승현은 불안하기만 해서 그녀의 눈동자가 요동치는데. 그런 승현의 허리에 한 손을 두르고.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한 손에 깍지를 끼며, 그 손을 벽으로 밀어붙인 제운 탓에 승현은 완전히 그의 품 속 안이다.
" 왜 가만 있어요? "
" 무, 무슨 말이야. "
" 왜 다른 남자가 손 잡고 만져도, 가만히 있어요? "
낮은 음성으로 묻는 그의 표정이. 방금 전에, 얼른 손을 씻고 오라며. 예쁘게 웃던 그가 맞나 싶을정도로 차가운 얼굴이라 마치 잘못을 들킨 아이라도 되는냥, 승현은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 아, 아니, 손을 잡은게 아니라… 커피, 커피를, "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이어지는 승현의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틀어막는 그의 입맞춤. 승현은 질끈, 눈을 감았는데. 놀라지말라는듯.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듯 그녀의 입술 위로 멈춰있고. 조금 긴장이 풀린 승현이 살짝 눈을 떴을 때, 그제서야 조심스럽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그. 어느새 그녀의 두 볼을 감싼 제운의 손 그리고 부드러운 그 감촉에. 여리게 떨리던 승현의 눈매가 사락, 감겼다. 그의 키스에서 쌉싸름한 커피향이 맴돌았다. 그와의 입맞춤이 짙어질수록 가빠지는 그녀의 숨소리만큼이나 승현의 심장이 쉴새없이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제운의 한 손이 그녀의 셔츠 단추 두어개를 풀어 버렸다. 깜짝 놀란 승현이 그의 옷깃을 움켜쥐자 오히려 스윽, 그녀의 셔츠 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그의 손. 그 차가운 감촉에 움찔, 하는 승현의 어깨. 승현이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리자. 살짝, 떨어지는 그의 입술. 승현이 멈춘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에도, 제운의 한 손에 톡, 풀려버리는 그녀의 브래지어 끈.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승현이 제운에게 입술을 달싹일 때, 쉬잇. 그의 검지 손가락이 승현의 입술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 오늘 마치고 한 잔 할까? "
" 안 돼, 오늘도 늦게 들어가면 나 오늘 마눌님한테 죽음. "
낯선 목소리. 승현은 혹시라도 문 밖의 그 사람들에게 들킬새라, 초조한듯 제 입술을 꼭 깨물었는데. 그런 그녀와 달리 여유롭기만한 손짓으로 스윽,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는 그의 엄지 손가락.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빈틈이 생기면. 그녀의 잇새로 제 검지 손가락을 물리고야 마는 제운. 그 순간에도, 흩트러진 제 앞의 그녀의 모습이 제운의 심장을 일렁였고. 그리고 여전히 그녀의 맨살에 닿은 그의 한 손이 승현의 가슴을 움켜쥐는 것이다. 잇사이에 물린 그의 손가락이 아니였다면. 헉 소리가 나올만큼 놀란 승현이 제운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 너 너무 제수 씨한테 잡혀 사는거 아냐? "
" 몰라, 그 여자 결혼하고 성격이 변했어. 요샌 가끔 헐크 같다니까. "
그 순간에도 문 밖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아찔한 그 상황에 승현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감싸는 그의 손길에 승현은 온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풀어진 셔츠 사이로.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며 아이처럼 키스하는 제운 때문에 신음이 나올것만같아 그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어 버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야하기만한 그 상황에 결국 승현이 제 두 눈을 그녀의 작은 손으로 가리고야 말았고, 그녀의 목덜미에 묻은 그의 입술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그제야 울상이 되어버린 승현이 두 손으로 제운을 밀어버리면. 약한 그 힘에 밀릴리가 없는데도, 제운이 조금 밀려나주고. 너 정말 미워, 울먹이며 토해내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이지만. 일주일만에, 희미해졌던 그녀의 목 언저리에 다시 새겨진 선명한 키스마크를 보며 제운은 만족스러운듯 예쁘게 미소 지었다.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 나 질투심에 눈 멀면, 다음엔 더 나쁜짓 할지도 몰라요. "
평소처럼. 나즈막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승현을 보며 웃었다. 그런 제운과 달리, 긴장이 풀린 승현은 다리가 풀려 거의 주저앉을뻔 했는데. 타악, 승현을 일으킨 제운이 단단히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는.
" 여기저기 다, 내 거라고 표시해놓고 싶다. "
중얼거리듯 말하면. 그런 제운을 향해 눈을 흘기는 승현. 하지만 그런 승현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서 그의 입가엔 웃음만 걸리고. 다시, 반듯하게. 풀어진 승현의 셔츠 단추를 채워주는 제운의 손길.
" 놀라지 마요, 다시 원래대로 해줄게. "
속삭이듯 경고하고는 슥, 그녀의 등 위로 손을 넣어 다시 속옷 끈까지 채워주는 제운. 나 잘했죠?란 눈으로 승현을 마주하는 연갈빛 눈동자. 벌이라도 주는 선생님처럼,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그가 미웠다가도. 이렇게 말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따뜻한 그 눈빛에 승현은 속절없이, 다시 그가 좋아져버리고 만다.
" 누나, 오늘… 우리 집에 갈래요? "
그리고 그녀를 향했던 짧은 손길이 아쉬운듯 제운이 물었지만. 어느새 쉬는 시간은 끝나버렸을텐데. 까마득해진 프로포즈 얘기는 꺼내보지도 못하고. 제 혼만 쏙 빼놓은 제운이 또 다시금 미워서. 싫어. 콧잔등을 찡그리며 앙칼지게 대답하고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승현이었다. 픽, 웃으며 그녀를 뒷따르는 제운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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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늦잠을 잔 탓에,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하는 승현이다. 제 손목에 채워진 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면 9시 30분. 큰일났다. 서둘러 한 차장에게 전화를 하고, 몇 년간 초보 딱지를 붙이고 다니는 제 쏘울 대신 택시를 선택한 승현. 회사 앞에 도착해서도, 하이힐을 신은 발바닥이 따끔거릴만큼 엘레베이터를 향해 달리는 승현이었다. 지잉, 닫히는 엘레베이터를 탁. 한 손으로 잡고,
" 죄송합니다, "
인사하면서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는데. 순간, 뻥져버리는 그녀의 표정. 반면에,
" 또 보네요, 이 승현씨? "
싱긋. 그녀를 향해 웃는 인주의 얼굴.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왠지 그녀와의 관계는 이미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으로 엮여버린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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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냥거리는꼴은 못봐주는 인주의 등장, 빠밤.
지상이가 건낸 커피는 제운이가 마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