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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해 성주간 월요일
<봉헌을 아까워하면 은총도 아까워하신다>
복음: 요한 12.1-11
‘알파: 위대한 여정’(2018)은 수만 년 전 개가 탄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 한 영화입니다. 케다라는 이름의 한 부족의 추장 아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으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추장은 아들을 매우 사랑했지만 사냥하는 가운데 그만 그를 잃고 맙니다. 죽은 줄 알고 아버지와 동료들은 다시 집으로 복귀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신념과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험난한 길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과정에서 늑대에게 쫓기면서 한 늑대를 칼로 찔러 상처를 줍니다. 늑대는 동료들에게 그렇게 버려졌습니다. 케다는 자신이 찌른 늑대가 자신과 같은 처지로 여겨져 그 늑대를 돌보아주고 서로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늑대는 인간에게 길들여지고 또 인간도 늑대를 의지합니다. 집이 있는 마을로 도착했을 때 늑대는 새끼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길들여진 늑대들과 인간이 함께 사냥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늑대가 개가 되려면 몇 세대에 걸쳐 길들여지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도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늑대가 길들여졌고 그렇게 길들여진 늑대를 통해 인간은 그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사냥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케다는 자신이 길들인 늑대에게 ‘알파’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전제됩니다.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동물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던 일은 세상 창조 ‘육’일 째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이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삼(3)’은 죽음과 부활, 혹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태어남이 두 번 반복되면 ‘육(6)’이 됩니다. 그래서 ‘육(6)’은 누군가 ‘새로’ 태어나는 날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은 무덤이 아니라 ‘동산’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동산지기로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 들려 고생하던 마리아에게 새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장면에서만 ‘마리아’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한 여인에게서 일곱 마귀를 당신 피로 쫓아내시고 세례를 통한 새 이름을 주시고 계신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하며 이 복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 막달레나와 이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만나신 마리아가 동일인물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황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마리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기 위해 그분의 발에 미리 준비한 향유를 붓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감사의 행위입니다. 발을 머리로 닦는다는 말은 그 분을 주인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마치 길들여지는 짐승이 인간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길들여짐은 분명 이렇게 상대가 자신에게 해 주는 사랑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성지주일에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마리아 안으로 들어오셔 일곱 가지의 죄로 표현되는 욕구를 없애버리십니다. 당신이 주인이 되셔서 동물처럼 지내던 한 여인을 당신의 하와로 삼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를 위해 자신의 나르드 향유 병을 깬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리옷 유다입니다. 유다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하며 향유를 아까워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면 장정만도 오천 명이 되는 인원을 먹일 수 있는 빵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리아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기 위해 깨뜨린 향유는 약 삼천만 원쯤 됩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유다가 아까워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것이 바쳐지는 것을 질투한 것입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가리옷 유다의 차이점은 주님께 무언가 바치는 것에 대해 한 명은 아까워하고, 한 명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은 만큼 바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길들여졌고 새로 태어났지만 유다는 길들여지지 못하고 영원한 야생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께 무언가를 바칠 때 아깝다는 말은 그분에게서 어떤 은총이 오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총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효과를 발휘합니다. 약처럼 먹기만 하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 바치는 것이 아무 것도 아깝지 않을 때 그만큼 많은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밭에 묻힌 보물입니다. 생명을 바치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깨뜨려 바칠 수 있는지, 혹은 유다처럼 아까워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전삼용신부)
TV와 인터넷은 마귀가 아닙니다(2010, 9, 2)
저에게 전화를 주시어 "이것이 제 성격입니다."를 쓰게 만드신
자매님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어제 저녁, 어느 자매님이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리산 <마리아처럼>에 가려 합니다."
"그러면, 자매님이 <마리아처럼> 카페에 들어가셔서 직접 원장님께
신청하세요."
"저는 컴퓨터가 없습니다."
"그러시면 아는 친구분에게 부탁 드려서라도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저도 컴퓨터를 못 했었는데 하느님 때문에 컴퓨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집에 컴퓨터가 있는데 저는 컴퓨터를 안 할 겁니다."
"교황님께서도 사제들에게까지 인터넷을 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위한 블로그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듯이 우리 신앙인은
현대 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황님이 하신 말씀인지 제가 알고 있지만,
오늘날 많은 사제들을 죄로 몰아넣는 것이 인터넷이고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죄에 빠져 생활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인터넷에 음란물이 떠돌고 있다고 해서 인터넷을 안 하시면 앞으로
영적인 도움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TV, 특히
평화방송이나 기독교방송을 열심히 보셔야 됩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TV나 인터넷을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방송이 얼마나 편성을 잘 합니까?"
"어느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교구 신부님입니다."
"그 신부님이 뭘 몰라서 그렇지 평화방송과 인터넷이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모릅니다. TV와 인터넷은 사용하는 사람이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충 한 10분 정도의 통화였는데 제가 그 자매님께 드린 말씀은 대체로
매체를 선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그 자매님은
"어떤 신부님의 말씀에 따라 TV나 인터넷을 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에 좋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먼저, "TV에 대해서" 저의 경험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평화방송에 근무할 때는 제 사무실에 타 종교 방송 모니터용까지
여러 대의 모니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저희 평화방송을 재미없다고 잘 시청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참 부족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평화방송이 저에게 영적으로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어느 영성강좌가 있으면 시간을 기다려 시청하게 되었으며,
지나간 영성강좌 프로도 평화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평화방송의 지나간 프로그램 보기를 통하여 그곳에 모아진 영성강좌를
차례로 다 시청한다면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무신 세미나다,
무신 신학원이다, 무신 학교다 하고 돌아다니지 않으셔도
많은 영적 지식을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긴 세월 "신학을 전공한 신학생"보다도 더 높은 신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평화방송뿐만 아니라 기독교방송도 자주 시청하십시오.
하느님을 진짜로 경험하고 사랑하는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는
정말 살아있고 은혜로워 우리의 영을 살찌게 합니다.
그리고, 일반 방송의 TV프로 중에 특히 "연속 드라마"는 시청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역사적인 사극이라 하여도 차라리 역사책을
읽는 것이 낫지 영적인 차원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역사극을 시청하려 시도해 본 적도 있지만,
시청하다 보면 권모술수, 계략, 모략 등의 내용으로
제 영혼이 짜증을 느껴 끝까지 잘 시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팔순이 넘은 어느 수녀님이 찾아오셨는데,
저녁 시간의 연속드라마 방영시간이 되니 TV앞에 진을 치고 앉으셔서
드라마에 아주 푹 빠져 계신 모습을 보고 그 분의 영혼에 측은지심을
느꼈습니다. 그 수녀님의 하루 중 제일 큰 취미 시간이 드라마
시청이시랍니다.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면 그 드라마의 노예가 됩니다.
아무리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라 하여도 영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드라마 속의 인물과 사상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TV에는 우리 생활에 아주 필요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다큐 프로,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하여 시청하면
영육간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인터넷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터넷의 폐해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그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다 그 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터넷을 죄악"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칼이 위험하다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주방의 서랍 속에 감추어 둡니까?
도저히 음식을 조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입니다.
TV를 시청하지 않고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마치도 거룩한 사람들의 표상인양 가르치거나 착각하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합니다.
저는 감히,
"TV와 인터넷은 하느님 은총의 도구!"라고 외쳐봅니다.
제 사무실의 거실 TV 화면 상단에는 작은 십자가가 붙어 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왜 저기에 십자가를 붙여 놓았냐고 궁금해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TV가 바보상자가 아니라 "은총 상자"라는 의미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인터넷이 현대 사회의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이기(利器)이면 교황님께서 모든 사제들에게
"하느님을 위한 블로그를 만들라."고 하셨겠습니까?
정말 인터넷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 카페 하더덧들의 영적 교류가
그 어디 가능했겠습니까?
이 카페는 "하덧사 공동의 하느님을 위한 블로그"입니다.
"영혼의 거룩한 공동우물(샘물)"입니다.
저를 통해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을 하신 분들이
인터넷을 시작하시지 않으면 저와의 영적 교류가 끊기게 됩니다.
제가 이 카페의 지기이지만, 이 카페는 저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덧사 모든 이의 소유이고 곧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하느님의 소유이기에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거룩한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을 통하여
모든 분들과 소통합니다.
영적지도도 이 성전에서 펼쳐집니다.
정말 TV와 인터넷은 최고(最善)의 "하느님 은총의 전달자"라고
저는 외쳐봅니다!(이해욱신부)
http://cafe.daum.net/likeama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