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 툭" 긴 동면에 앞서 부지런함으로 채비한 겨울이 가득 담긴 김치 냉장고 소리다. "남들처럼 부식 가게나 백화점에서 사다 먹으면 그만일 걸 왜 사서 고생이람"
20포기나 되는 배추를 소금에 절일 때만 해도 입에 달고 살던 투덜거림이 다 사라지고 마치 만석 군이 된 듯 뿌듯하다. 김치 냉장고 가득 채운 배추김치를 선두로 무김치, 갓김치, 동김치, 순천이 원천인 고들빼기김치까지 그득그득 채워져 있으니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러 이 소리에 여전히 허리 휘도록 김장을 담아 김치 냉장고에 채운다.
하지만 대한민국 주부들 다 통감하는 일이겠지만 겨우내 먹을 김장 앞에선 돌덩이 같은 중압감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김장때가 되면 일주일 전부터 걱정으로 잠을 설친다. 하지만 어쩌랴. 귀신 같이 산 김치 인줄 알고 젓가락 가는 횟수를 줄이는 남편의 까다로운 입맛도 입맛이지만 남의 손이 간 김치는 못 미더워 결국 내 손으로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성격도 문제는 문제다.
요즘은 산 김치도 맛과 품질 면에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지만 김치란 장맛과 같아서 집집마다 다르듯 그 맛이 달라 독특한 맛이니 어쩔 수 없다. 더구나 남편은 재료 고르는 것부터 열과 성을 다한 솜씨 좋은 어머님의 손맛에 길들여진 사람이라 웬만한 김치는 합격점을 받을 수 없다.
양근 고추에 잘 숙성된 젓갈은 물론이고 싱싱한 토하(민물새우), 속살이 얇으면서도잎이 노란 배추 고르기, 알맞게 매우며 단 무는 김장의 맛을 더한층 깊게 한다고 김치를 담그실 때면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신 시어머님 덕에 이제는 남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런 힘겨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몇 해 전 김치 냉장고까지 사 주며 은근 슬쩍 김치를 많이 담그라는 충동질을 해 댔다. 그 충돌질로 20포기 되는 배추를 사와 허리 끊어지는 김장에 돌입했다. 배추 포기를 2등분으로 잘라 물 간한 후 켜켜 소금 뿌려 절인 후 풀이 죽었다 싶으면 간수를 빼고(그러지 않으면 쓴 맛이 나기 때문) 통닭처럼 밑둥을 아래로 세워 고루 간이 들게 하였다. 무엇보다 김장은 간이 잘 되어야 한다. 살짝 구부러뜨려 부러지지 않으면 간이 잘 된 거다.
잘 절여진 배추를 두세 번 씻어 건진 후,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아서 하룻밤을 물을 뺀 뒤 꽁지 부분은 잘 다듬은 후 배, 양파, 멸치젓, 마늘, 생강, 새우젓, 생새우(토하나 일반 새우), 고추 간 것에 찹쌀 풀을 넣어 휘휘 저은 뒤 액젓으로 간한다. 좀 묽다 싶으면 고춧가루를 넣어 되직하게 농도를 맞추었다. 그리고 밤새 준비한 속 재료인 무채, 갓, 파, 미나리 썬 것과 배, 밤, 고구마 채 등을 넣어 버무린 속을 배추 한 켜 한 켜에 넣어 양념을 한 뒤 곱게 옹송그려 두었다.
간 좀 봐달라며 부른 딸은 엄마 김치가 최고라며 배추김치 한 가닥을 뜯어 참깨 듬뿍 묻혀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맛있다는 듯 엄지 척을 세웠고 이에 질세라 김치는 매워 싫다는 아들도 누나 따라 김치를 먹었다. 배추김치를 다 담은 뒤 무도 납작하게 잘라 간한 뒤 양념에 버무려 배추김치 사이사이 넣어 김치 통에 넣어 두고 돌산 갓도 멸치젓을 첨가하여 감칠맛 나게 버무려 김치통에 차곡차곡 넣어두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이 뿌듯했다.
김장하는 날은 언제나 수육을 먹는 날, 목 삼겹 고기를 사와 된장과 무, 파, 월계수 잎을 넣어 삶아낸 수육과 보쌈을 준비했더니 남편 소주와 달게 먹었다. "역시, 당신 김치가 최고야" "어디 어머님 솜씨만 하겠어?" "아냐,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집들이 때 당신 김치 맛엔 다들 넘어갔잖아, 나도 인정해" "맞아 엄마 김치가 최고야" 딸과 아들도 합창하듯 소리쳤고 남편은 김장하느라 힘들었으니 내일 낙안 민속촌으로 놀러 가자는 하사품까지 내렸다.
그러나 낙안 민속촌에서 만난 고들빼기가 문제였다. 꽁보리밥만 먹고 놀다 왔으면 좋으련만 민속촌 입구에서 파는 고들빼기가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에라, 김장 담근 김에 고들빼기까지 담자` 눈 질끈 감고 한 단에 1300원 달라는 걸 1000원으로 깎아 10단을 샀다. 그러나 고들빼기를 산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뿌리까지 갉아가며 다듬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밤 12시가 다 되도록 다듬어 씻은 뒤 간 하고 보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쌉쌀한 맛이 양념과 어우러져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울 정도로 묘한 맛인 고들빼기김치를 떠올리니 힘든 것은 사라지고 입맛 돋울 고들빼기김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 이틀동안 우려낸 고들빼기 꼭 짠 뒤 배추 양념과 같은 양념을 만들어 쪽파, 당근 채를 넣어 찹쌀 풀까지 더해 버무린 뒤 깨를 듬뿍 뿌려 한 잎 먹어보니 쌉쌀한 맛이 입맛을 확 살아나 예전 임금님 진상품이라는 말이 실감되었고 이왕 김치를 담근 김에 친정어머님이 전수해 주신 동치미까지 담기로 마음먹고 부식 가게에서 동치미 무 세 단을 사와 부드러운 무 청 몇 가닥만 남기고 다듬은 뒤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넣고 고루 소금을 뿌려 간해 두었다.
삼일 후, 사또 약수를 길러와 부은 뒤 주머니에 찰밥, 마늘, 생강을 납작하게 자른 것과 청각, 쪽파 뿌리를 넣어 깊숙이 넣어두고, 청홍 생고추와 대추를 동동 띄워 두고 댓잎으로 덮은 뒤 뚜껑을 덮어 두었다.
"이제 정말로 김장 끝!" 돌침대에 누워 끊어질 듯 아픈 허리 지지며 겨우내 먹을 김치를 떠올려 본다. 소복소복 눈 내리는 날 냉면 넣어 후루룩 거릴 동치미의 알싸한 맛, 사골 국에 넣어 먹는 삭힌 무김치, 겨우내 밥상에 오를 배추김치와 갓김치, 고들빼기김치 생각으로 힘겨운 며칠을 씻어냈다.
윙-툭 여전히 김치 냉장고에선 김치 숙성 소리 요란하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겨우내 식탁에 올라 식구들의 입맛을 돋워 줄 김치가 생각났다. 김치 냉장고 가득 채워진 배추, 무, 갓, 고들빼기김치와 베란다 장독에 든 동치미 생각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처럼 해마다 냉장고에 담긴 행복이 전해져서일까? 여전히 허리가 끊어진 아픔에도 김치 냉장고에 김치를 담가 채워 넣고 작은 텃밭이 있는 해남으로 와서는 손수 배추, 무 갓, 고들빼기 등 채소를 심어 김장을 하고 있다. 겨울을 이겨 내는 김치 냉장고 속에 담긴 행복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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