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이 30개월 동안의 진통(陣痛) 끝에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실질적으로 타결했다”는 뉴스가 TV 화면에 뜨는 것을 보는 필자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고인(故人)의 영상(映像)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1997년 북한으로부터 탈출하여 13년 간 ‘자유 대한민국’에서 ‘망명(亡命)’ 아닌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0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故) 현강(玄江) 황장엽(黃長燁)의 영상이다. 생전(生前)의 고인은 필자를 비롯하여 평소 가까이 했던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FTA가 체결되기만 하면 그로부터 머지않아 북한의 ‘김가왕조(金家王朝)’는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면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에게도 의사소통의 길이 열리기만 하면 그러한 그의 생각을 전하면서 한-중 FTA의조기(早期) 타결을 촉구해 마지않았었다.
그의 그러한 주장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가 탈북을 단행한 1977년의 시점에서 김정일(金正日)이 이끄는 북한(당시)의 전근대적인 세습 독재체제는 이미 권력유지 능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간의 ‘동맹’ 관계와 이를 통하여 중국이 연례적으로 제공하는 2억 달러 상당 규모의 식량과 유류 원조 때문에 생존(生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의 예언(豫言)(?)은 이 때문에 한-중간에 FTA가 체결되면 이는 중국과 북한 간의 ‘동맹’ 관계가 실질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되어서 북한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한-중 FTA 체결이 기정사실이 되었으니만큼 고인의 예언이 과연 적중할 것인지는 앞으로 지켜보아야 할 일이 되었다.
지난 10월8일은 고인의 4주기(週忌)가 되는 날이었다. [고인은 10월8일 오후 그가 독거(獨居)하던 논현동 자택 목욕탕의 탕(湯) 안에서 앉은 자세로 절명(絶命)해 있는 것을 다음 날인 9일 출근한 가사도우미 여인이 발견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항간(巷間)에서는 10월10일이 고인의 기일(忌日)인 것처럼 널리 인식되어 있다.] 고인의 사후(死後) 3년간은 필자가 중심이 되어 고인이 생전에 발족시킨 <북한민주화위원회> 주관으로 탈북자들을 포함하여 국내에서 고인과 가까이 지난 분들과 ‘추모위원회’를 조직하여 매년 10월8일을 전후하여 추모 행사를 거행하고 8일에는 버스를 동원하여 대전 국립묘지의 ‘애국선열’ 묘역(墓域)에 있는 고인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관례화했었다.
그러나, <북한민주화위원회>(위원장: 홍순경)를 주관으로 하는 추모행사는 탈북동포 사회가 지리멸렬(支離滅裂)로 분열되어 있어서 계속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금년 4주기 때는 ‘추모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일인 8일 대전 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추모 행사를 가름할 수밖에 없었다. 고인의 생전에 고인과 친교(親交)를 나누었던 남쪽의 많은 뜻있는 분들이 이 같은 상황에 대해서 애석(哀惜)해 할 뿐 아니라 고인에게 송구스러움을 느껴서 뜻 있는 유지(有志)들이 내년 초에 모여서 고인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유지(遺志)를 계승하기 위한 추모 행사를 조직화하자는 화두(話頭)의 공론화(公論化)를 상론(相論)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 같이 새로이 시작되는 고인의 추모 행사는 이번에는 남쪽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주도하고 탈북동포들은 거기에 동참하는 형식으로 추진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유력하다.
고인은 그가 평생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하던 ‘인간중심 철학’을 탈북, 월남 후 더욱 천착(穿鑿)하여 그 내용을 <인간중심철학원론>(시대정신 2008) 등 도합 19권의 주옥(珠玉) 같은 저서(著書)에 담아 세상에 펴내놓았다. 마침, 고인의 독창적 학문 영역인 ‘인간중심 철학’에 관하여 고인이 생전 7년간에 걸쳐 매주 1회씩 진행했던 ‘학습 클라스’에 참가한 수강생(受講生) 의 한 사람인 흥사단(興士團) 출신 강태욱 씨가 녹음하고 해독한 강의 내용을, 2013년 10월 고인의 3주기에 즈음하여,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 ①②권에 담아 출판하는 큰일을 해 놓았다. 앞으로 고인의 추모 사업이 본격화되면 강태욱 씨의 노작(勞作)을 토대로 고인이 평생을 바쳤던 철학연구를 이어받아서 올바르게 평가하고 해석하고 보급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북한민주화위원회>는 2011년 고인의 1주기 추모 사업으로 10명의 고인의 생전 친지(親知)들의 10명의 탈북동포들로부터 수집한 추모의 글을 엮어서 <걸머지고 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라는 제목으로 ‘추모문집(追慕文集)’을 출판했었다. 오늘 한-중 FTA 타결 소식에 접하면서 머릿속으로 물밀 듯 밀려드는 고인에 대한 회상(回想)에 떠밀린 나머지 필자가 ‘추모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입장에서 쓴 이 문집의 ‘발간사(發刊辭)’를 여기에 싣는다. 한반도 분단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애국 선비 황장엽을 기억하는 분들의 일독(一讀)과 편달(鞭撻)이 있기를 감히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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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황장엽 선생 서거 1주기 추모 문집> 發刊辭
1945년 8월15일 광복(光復)의 시점에서 22세의 황장엽은 좌(左)도, 우(右)도 아닌 ‘해방(解放)’의 감격에 들뜬 조선의 한 지식인이었다. 해방의 순간, 그의 정위치는 38선 이남인 강원도 삼척이었다. 1941년 평양상고를 졸업한 뒤 1942년부터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그는 1944년 일제의 징용으로 삼척의 탄광에 투입되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해방으로 징용에서 풀린 그는 집이 있는 평양으로 귀환을 서둘렀고 이로써 그의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공산당이라는 호랑이가 그를 집어삼킨 것이다.
코민테른이 주도하는 세계공산화 전략에 따라 북한 땅에 공산국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공산세력은 황장엽의 두뇌를 ‘징발’하여 공산주의 노멘클라투라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그는 1946년 북한판 공산당인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했고, 김일성(金日成)이 6·25 전쟁을 도발하기 한 해 전인 1949년 ‘선발된 엘리트’로 모스크바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는 6·25 전쟁의 전쟁기간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보내고 휴전의 해인 1953년 귀국했다. 세계공산화 운동의 메카인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전공한 그의 귀국 후 진로는 탄탄대로였다. 귀국 다음 해인 1954년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 강좌장으로 발탁이 되었고 동시에 김일성의 이론담당 서기로 그의 연설문 작성을 전담하여 그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 황장엽의 머리에서 자라기 시작한 공산주의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모스크바 유학 기간 중에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소련 공산당과 학계의 전문 이론가들과 공산주의 이론을 가지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맑스-레닌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론적 가설과 가정에 결정적 허구와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맑스-레닌주의의 기본 명제들인 ‘역사적 유물론’·‘계급투쟁론’·‘프롤레타리아 독재론’·‘자본주의 모순론’·‘잉여가치론’·‘유물론적 변증법’이 모두 허구와 모순 투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국가통치 이념으로서 새로운 정치철학에 대한 그의 탐구가 시작되었다. 그의 ‘인간중심 정치철학’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의 ‘인간중심 정치철학’의 기본적 운동법칙은 ‘변증법’에 의한 사물의 무한한 변화와 발전이었다. 그는 인간의 ‘정신(精神)’을 중시하는 헤겔의 유심론적 ‘관념 변증법’과 ‘믈질(物質)’을 중시하는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모두 “반 쪼가리의 진리를 담은 2개의 극단”이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두 ‘변증법’의 편파성을 극복하고 그의 독창적인 ‘인간중심 변증법’을 완성시키려 했다.
‘인간중심 철학’의 세계에서 그는 모든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양과 질의 통일”·“대립물의 통일”·“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통일”·“목적과 수단의 통일”·“주체와 객체의 통일” 등 변증법의 법칙에 입각하여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양면성을 ‘극복’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무한대로 반복함으로써 “인간개조”·“자연개조”·“사회관계개조”로 이루어지는 3대 개조를 끝없이 지속시켜 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그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유한(有限)’하나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무한(無限)’하다”고 갈파한다. 이 같은 ‘인간중심 변증법’의 세계는 “정(正) ⇒ 반(反) ⇒ 합(合)”의 수렴(收斂) 과정이 중단 없이 무한정 영원히 반복되는 무변광대한 ‘긍정’과 ‘낙관’의 세계라는 것을 그가 2008년 8월15일 탈고(脫稿)한 역작(力作) <인간중심 철학 원론>의 다음 대목이 보여 준다.
세계는 무한하다. 무한한 세계의 주인으로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영원한 발전의 길을 걸어야 한다. 발전이 멎어지면 인류는 멸망한다. 세계의 주인으로 되지 않고서는 자기운명의 완전한 주인으로 될 수 없다. 좀 먼 앞날의 이야기지만 약 50억 년 후에는 태양이 소멸되거나 폭발할 수도 있고 또 태양의 지름이 현재의 200배로 되고 부피는 800만 배로 되어 지구궤도까지 팽창할 수도 있다고 예견하고 있다. 인간이 태양을 완전히 관리하게 되지 않고서는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 또 우주팽창설에 의하면 지금 속도로 우주가 팽창되어 가면 몇 천 억년 후에는 우주물질이 다 녹아버려 원시물질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약 200만 년 후에는 인간이 우리 은하계 우주(은하수계 우주)를 관리할 수 있다고 내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 크기는 약 10만 광년인 만큼 빛의 속도로 한 번 가는 데만 10만 년이 걸린다. 오늘날 100년도 못사는 사람으로서는 은하계 우주의 주인으로 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를 개조하고 수명을 늘리는 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끝없는 세계의 완전한 주인으로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완전한 주인의 지위에 끝없이 접근하여 가도록 끝없이 발전을 계속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원한 발전이 곧 인간의 삶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것은 영원한 발전의 길만이 영원히 인간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길이며 영원히 행복의 수준을 높여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 바로 여기에 인간의 종국적인 삶의 목적과 그것을 실현하는 근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인간의 영원한 발전이 곧 인간의 영원한 삶의 목적이며 인간의 창조적 역할을 영원히 높여 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을 실현하는 근본방법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인간중심철학의 사명인 것이다. |
그러나, 황장엽에게는 ‘좌절’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권력체제에서도 하나의 금기(禁忌)인 ‘권력의 세습’을 통해 북한의 ‘일당독재(一黨獨裁)’를 ‘수령독재(首領獨裁)’를 넘어 서서 전근대적인 ‘봉건왕조(封建王朝)’로 변질시키는 역사 파괴적 실험을 시작한 김정일(金正日)이 그의 ‘인간중심 철학’ 이론을 압수(押收)하고 이를 북한판 ‘주체사상’으로 개조하여 ‘세습독재(世襲獨裁)’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데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북한에는 엄청난 재난이 밀어 닥쳤다. 이른바 ‘당우위(黨優位)’의 정치논리에 짓눌려 경제법칙이 압사(壓死)된 북한의 경제는 파국을 지나 파탄 지경에 이르는 가운데 300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굶어 죽고 수십만명이 굶주림을 못 이겨 탈북(脫北) 길에 오르는 가운데 북한은 수십만 명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서 지나는 거대한 ‘수용소군도’로 변모했다.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주축으로 한반도 긴장의 고조를 지속적으로 주도함으로써 전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했다.
황장엽에게 새로운 선택이 강요되었다. 1997년 2월 그는 북한을 탈출하는 역사적 결단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랑하는 부인과 1남3녀의 자녀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으로 이주한 그는 그로부터 13년의 여생(餘生)을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불살랐다. “김정일 독재정권의 타도”와 “북한의 민주화”였다. 그에게 그가 버린 북한의 ‘김정일 독재정권’은 “오늘날 한반도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주적(主敵)”이었다. “김정일은 수백만 북한 주민들을 무참히 굶겨 죽이고 북한 땅을 하나의 큰 감옥으로 만든 전대미문의 독재자”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자기의 생존전략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그 누구도 김정일이 독재자이며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2003.3.20 “김정일에 대한 태도는 진짜 민주주의자와 가짜 민주주의자를 가르는 시금석”]
1997년 황장엽이 베이징으로부터 필리핀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행을 택할 때 그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당시)으로부터 두 가지 ‘약속’을 확보했다. 하나는 서울에서 그의 “‘인간중심 철학’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것, 또 하나는 “서울을 거점으로 하여 북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약속’은 공염불이었다. 무엇보다도 황장엽 서울 도착으로부터 5개월 후인 12월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이 당선됨으로써 대한민국은 10년간의 ‘좌향좌(左向左)’ 실험을 경험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盧武鉉) 정권으로 ‘좌파 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에서의 황장엽의 생활은 ‘유수(幽囚)’의 생활과 다를 것이 없었다.
2000년 김대중의 평양방문과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로 대한민국의 ‘좌경화(左傾化)’는 위험한 속도로 가속화되었다. 이 무렵 황장엽의 절박한 관심사는 대한민국에서의 “‘종북(從北)’·‘좌경’·‘반미(反美)’ 세력의 장성”이었다. 그의 이 같은 심경은 2003년 3월20일자 “김정일에 대한 태도는 진짜 민주주의자와 가짜 민주주의자를 가르는 시금석” 제목의 글 속에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일부 사람들은 민족공조를 구실로 내세우고 김정일 독재집단과의 협조를 강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김정일 독재집단에게 체제유지를 담보해 주고 그들에게 경제적 원조와 정치적 지원을 적극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김정일 독재집단의 범죄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민주주의적 제재조치를 반대하고 김정일 독재집단의 부당한 요구에 대한 타협과 양보를 설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사실상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자이며 동맹자인 미국의 편에서 물러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적인 김정일 독재집단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김정일 독재집단과 타협하는 것만이 민족의 통일을 실현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민족의 통일을 반대하고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옳다고 볼 수 있겠느냐”고 자문(自問)하고 이에 대해 “옳다고 볼 수 없다”고 자답(自答)했다. 그는 다음의 네 가지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첫째로, “민주주의자라면 김정일 독재집단과의 민족공조에 대하여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민족 반역집단과의 민족공조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민주주의자라면 봉건 가부장적인 수령 독재집단을 북한의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독재의 희생자인 북한 인민들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 “김정일 독재집단과 공조하여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평화의 원수에 의지하여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평화의 간판을 내걸고 침략자들 앞에서 인민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려는 기만술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평화가 아무리 귀중하여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귀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해야 한다는 투항주의적 입장에서는 평화도 민주주의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경고를 빠뜨리지 않았다.
2007년 12월 새누리당의 이명박(李明博) 후보가 530만표라는 대한민국 직선제 대통령선거사상 최대의 표차로 17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황장엽에게는 잠시 희망의 등불이 반짝 켜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의 환각(幻覺)이었다. 황장엽은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주문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 민족의 모든 재난과 불행의 화근은 김정일 독재집단”임을 강조하고 “북한 동포들을 해방하고 남북의 민주주의적 통일을 이룩하는 유일한 길은 김정일 수령독재집단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2010년 1월1일 신년사]. 그는 북핵 문제 해결에 관해서도 “정도(正道)는 경제원조로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을 퇴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반응은 벽창호였다. 10월10일 운명(殞命) 직전의 어느 날 황장엽은 “이별”이라는 제목으로 남긴 미발표 ‘유작시(遺作詩)’에 그의 암울한 심회(心懷)를 적나나하게 써서 남겨 놓았다.
“지루한 밤은 가고 새 아침은 밝아 온 듯 하건만, 지평선에 보이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는구나.” 그는 그의 임박한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다.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간이라고, 값없는 시절과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미래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라는 대목에는 그래도 꺼지지 않는 생에의 그의 집념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라는 구절로 그는 그의 생애가 종장(終章)에 이르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여한 없이 최선 다해 받들고 가자, 삶을 안겨 준 조국의 거룩한 뜻 새기며...”였다. 황장엽은 그가 가족들과 52년간의 생활을 영위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13년간 그의 여생을 보냈던 대한민국에 대한 애틋한 애국심을 이 구절에 담아 놓고 있었다.
현대사의 한 위대한 애국자, 철학자, 정치가, 시인이었던 황장엽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벌써 1년의 세월이 경과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난 13년간 그를 기둥으로 삼아 의존했던 탈북동포들 가운데서 10명,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독거(獨居)의 노인으로 여생을 보내는 동안 주변을 감싸며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던 남쪽의 지인(知人) 10명으로부터 추모의 글을 모아서 이 조그마한 책을 펴낸다. 가급적 많은 분들이 이 글들을 읽으면서 위대했던 고인의 유덕(遺德)을 추모하는 것과 함께 생전에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이룩하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간 유지(遺志)를 이어 갈 수 있는 동기(動機)를 부여 받게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2011년10월10일
故 黃長燁 선생 1週忌 追慕委員會
공동위원장 (상임) 李東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