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찬송가 365장 (구 484장) / 민수기 11 : 1 - 15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찬송가 365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민수기 11장 1절 – 15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10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시험 문제로, 누군가가 무슨 결심을 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는 경우를 가르쳐 고사성어 네 글자로 괄호를 완성하라는 문제를 냈다고 합니다. “작( ) 삼( )” 정답은 물론 ‘작심삼일(作心三日)’ 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작은 삼촌’ 이라고 썼습니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답을 썼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작은 삼촌은 늘 담배 끊는다고 결심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틀린 답이지만, 의미는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작심삼일의 실패를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기대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 받을 것에 대한 기대를 안고 시내산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 시내 산까지는 3개월 남짓 걸렸지만, 시내산에서 거의 일년을 머문 다음, 애굽을 떠난 지 두 번째 해 둘째 달에 시내 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결심을 단단히 하고 드디어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여호와의 산 - 시내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갔을 때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다베라, 그리고 기브롯 핫다아와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내산의 결심은 작심삼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심삼일의 불평과 원망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일까요? 오늘의 우리는 과연 그들과 다를까요?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망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인생의 길을 가면서도 원망을 계속할까요?
첫째 이유는, 과거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모든 은혜들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들이 노예 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된 것 - 너무나 큰 은혜였습니다.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었던 홍해를 건넌 것도 은혜 중에 은혜였습니다. 목마를 때 마실수 없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고 단물이 되게 하신 일, 르비딤 반석을 쳐서 마시게 한 일, 만나로 먹이신 일 등등 -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큰 은혜를 받고도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우리가 원망의 언어를 쏟고 있을 때 우리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원망하는 말을 악한 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로 진노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불사르게 하시매” - 그래서 그 곳을 ‘다베라 = 불사름’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영 끝이었을까요? 아마 그날의 원망은 진영 끝에 있던 백성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된 때문이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공동체의 행진에서 끝에 위치한 사람들은 헌신 자들이나 일꾼들이 아닌 구경꾼의 자세를 가진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일꾼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구경꾼들이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할일은 무엇입니까? 구경꾼의 자세를 청산하고 주 앞에 나아와 주의 은혜를 경험하시고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시는 일입니다.
둘째로, 현재의 축복을 망각하기 때문에 원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부터 9절 말씀까지는 엄격하게 말하면 다베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연이어 일어난 사건으로 보여집니다. 먹을 것을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메뉴가 바뀌지 않는다고 이제는 만나만 만날 먹는 것이 지겨워졌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만나는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축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이 축복으로 느껴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그렇게 하찮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리 광야에서 음식을 대할 수 없었을 때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내리는 만나는 기적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히브리어로 ‘만후 = 저것이 뭐냐?’ 고 외치다가 그 이름은 ‘만후 = 만나’ 라고 칭한 것입니다. 처음 그들은 만나의 맛을 ‘꿀 과자 같다.’ 고 했습니다.(출 16:31) 그러나 이제 오늘 본문 8절에서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고 하다가, 더 나중에는 ‘하찮은 음식- 박한 식물’ 이라고까지 했습니다.(민 21:5) 우리는 축복에 익숙해 지다보면 더 이상 축복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까지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믿음을 갖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광야에 아직도 만나는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구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우리에게 축복을 축복으로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감사 기도이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원망하는 이유는 미래의 약속을 잊어버리기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를 떠나서 바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이 광야에서 특히 불평과 원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지금 지나는 이 바란 광야가 크고 적막한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고,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신 1:19, 8:15).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광야를 지나야 그들은 비로소 약속의 땅으로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는 이제 이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자 하는 주의 놀라운 계획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의 약속을 망각하는 순간 그들은 마치 미래가 없는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에 빨리 나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가나안’ 을 거꾸로 ‘안 나가’ 로 읽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행진을 계속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는 일입니다.
10일간의 우주 탐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귀환한 한국 역사상 첫 우주인 이소연 자매는 광주 성지교회 이길수안수집사와 정금순권사의 1남 2녀 중 장녀로 어려서부터 기도 안에서 자라온 믿음의 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정금순 권사는 특히 딸 소연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인물로 자라게 해 달라.” 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매일처럼 딸과 QT를 나누었고 이 소연 자매는 늘 어머니와 고향교회에 기도 제목을 전해 왔다고 합니다. 소연 자매는 한국을 떠나기 전 지구로 귀환하고 귀국하면 제일 먼저 고향 교회에 와서 간증을 나누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내일을 향한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준비된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 은혜를 주신 주님, 현재 내 인생의 광야에 만나를 내리시고 생수의 축복을 주고 계신 주님, 그리고 미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